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쫌 짧은 FAQ버젼)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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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8:52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쫌 짧은 FAQ버젼)
작성일: 2002/11/26
작성자: 몰러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신의 존재는 경외와 호기심, 그리고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것이 형상, 자연현상, 관념 등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든 간에 인간의 직관과 이해를 넘어 서는 객체들은 숭배의 대상이 될 소지가 있었다. 그러나 신은 아직도 인류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나서 자신의 실체를 증거한 바가 없다. 신현에 대한 보고는 가끔 있었으나 주장에 그쳤을 뿐 그것이 착각이나 사기, 또는 긍정적 단정 같은 것이 아니라고 할 만한 증인이나 물증이 없었기에 이 보고들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우리가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는 초자연적인 현상, 비정상적 상황은 신의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로 간주되기도 했으나 당시 사람들의 능력으로 설명이나 이해가 곤란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속속 제기되면서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과학의 발전은 이런 현상들의 원인을 속속 규명하였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도 언젠가는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결국 기적이나 이적은 비록 연구나 추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라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 채택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다.
이렇듯 신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문헌과 보고들도 증거로 채택되기에는 부족한 데다가 신앙의 영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가 도출되자 기독교계는 과거 폐기된 것들까지 끌어 모아 나름대로의 이성적 논증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한때 신의 존재를 규명하는 것을 임무로 삼기도 했다. 하지만 논리철학이 등장하면서 이런 류의 논증은 모두 부정되고 말았다.
이제부터 나열되는 유신논증들은 사실상 가설에 불과하다고 알려진 것들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성직자들은 이 논증들을 내세워 신자들에 대해서는 신앙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비신자들에게는 논쟁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유신논증들을 해부하여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일단 제안자들이 부여한 명칭, 즉 ‘증명’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신은 가장 위대한 사유의 대상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와 똑같은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다 위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다 위대한 어떤 것, 즉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상상할 수 있으므로 신은 존재한다.
이 증명을 정리하면 “인간이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 관념을 갖게끔 하는 절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주장과 같다. 이 증명의 문제점은 생각 또는 상상 같은 관념적인 것을 통해 존재가 입증된다고 비약한 점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끝일뿐이다.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고 설사 존재한다 하여도 더 위대한 것이 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관념이 사실이 될 수 있다고 우긴다면, 다른 측면도 사실이 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상상하지 않는다면(이 세상에는 분명히 무신론자들이 있으므로) 그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 변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Transformation)
사물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단지 변화(움직임)를 받고, 어떤 것은 다른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움직임을 당한다. 즉, 변화는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원인은 무한히 소급해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움직임을 받지 않고 다른 것에 운동을 일으키는 어떤 존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와 같은 존재가 곧 신이다.
우선 운동의 원인에 있어서 그것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증명되지 않는다. 원인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1로 시작되는 부의 정수의 수열이 그것이다. 고로 우리는 부동의 동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동의 동자는 목적인(目的因)을 중시한다. 그러나 운동에 어떠한 목적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 그리고 목적 없이도 움직이는 것이 있다. 중력에 의해 땅에 떨어지고 있는 물체가 무슨 목적을 가진단 말인가? 한편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量子)들의 변화를 살펴보면 분명히 제 멋대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이며, 여기에 부동의 동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때 양자 자체가 아무런 의지나 목적이 없는 부동의 동자가 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양자들을 신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 제 1 원인론(Theory of 1st Origin)
우리는 어떤 사물이 존재하도록 만든 다른 사물이나, 어떤 행동을 낳게 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물이나 의지 등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선행되는 다른 원인에 종속된다. 이렇게 누가(무엇이) 원인을 일으키는지 점점 캐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 제1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제1원인론은 부동의 동자가 수십 개가 될 소지가 있는 반면 신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도 불린다.
일단 인과율은 대체로 시간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여진다고 할 수 있다. 즉, 어떤 결과에는 어떤 원인이 선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현대의 물리학은 인과율을 초월하는 입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변화로부터의 증명’에 대한 반박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들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거기에는 아무런 원인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인과율을 초월하거나 원인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제1원인도 없을 수가 있다.
현상에 대한 관찰 대신 러셀이 제기한 반박을 소개한다.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신도 (‘모든 것’에 포함되므로)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만약 원인이 없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신과 마찬가지로 세계도 원인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논변에는 하등의 타당성이 없다.”
○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Chance)
우리는 자연이 우연성을 갖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짐작한다. 우연성을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존재가 있다고)...
위 증명을 정리하면 “자연은 우연성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 존재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자연법칙론과 비슷하다. 하지만 원자와 같은 미시 입자들은 인간이 발견해 낸 법칙들에 따르는 정도가 생각보다 낮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우연들’이 종합되어 평균치 또는 근사치로 움직인다. 우연들을 평균치 또는 근사치로 종합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그 신은 세상을 너무나 어렵게 또 불명확한 기준으로 조정하는 셈이다. 이렇게 복잡한 신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 우월성의 정도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Superior Degree)
우리는 자연의 모든 사물이 가진 우월성에 그 차이가 있음을 안다. 이런 생각은 완전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우리는 점점 우월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덧 완전한 존재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이나 우주론적 증명과 적용대상은 틀리지만 똑같은 형식을 가진 논변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열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도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우열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는 일만 본다면 개구리는 벌레보다 우월하지만 벌레의 번식력을 개구리의 그것과 놓고 본다면 벌레가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열은 존재하지만 완전한 존재를 목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장 우월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일 것이라는 것은, 가장 우월한 존재가 생각보다 그리 우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기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가장 우월한 존재 자체도 어느 정도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는 가능성이 없다. 범위가 한정되지 않았을 때 더 우월한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증을 세우지 않는 한 가장 우월한 존재를 취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 조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Harmony)
우리는 어디에서나 적응과 일치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에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며, 개는 뼈다귀를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센 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순전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획 - 사물을 다스리는 어떤 지성의 선언 -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유신론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 증명은 지적설계론이라고도 하며, ‘자연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되 혼돈에 이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논증, 즉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과 비슷하다. 또한 지적설계론은 자연법칙론과도 비슷하다.
계획 또는 설계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포함하며,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렇게 설계되고 조정되었다는 믿음이 18세기까지 이어져왔다. 하지만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다고 보기엔 너무나 가혹하고 삭막하며, 오히려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변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그리고 사물이 적응과 일치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것(자연의 선택)일 뿐이지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의 증거도 찾을 수 없다. 한편 적응과 일치가 계획과 통제의 결과라고 인정하더라도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또 진행되고 있는 부적응과 불일치가 있는데, 이것은 지성적 설계자와 질서유지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목적론에 대하여 기독교계의 주장을 가지고 살펴보자. 성경에 나온 창조의 목적 중에는 생육하고 번성시키려는 이유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생육하고 번성하라면서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을 한꺼번에 여럿을 만들지 않은 이유라든지, 멸종된 동물들, 그리고 동물의 생육과 번성을 방해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만든 이유 등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각각에 대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 등의 이유를 들겠지만, 그 어떤 답변도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의 창조주를 표현하지 못하며, 그의 애초의 목적은 희석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ment)
이 사회에는 권선징악을 권장하는 도덕적 판단이 있다. 또한 개인의 양심도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는 도덕적 성향은 곧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 증명은 우선 선이나 도덕이 절대적 가치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함으로써 실책을 범했다. 강도에게 쫓기던 친구가 우리 집에 숨어들었을 때 뒤쫓아온 강도가 친구의 행방을 묻는 경우 절대적 도덕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지만 사실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악인을 돕는 것, 그리고 친구에 대한 배신은 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은 선한 존재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럼 선과 악에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 차이는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차이가 있었던 것인가? 신의 명령에 의해 차이가 있다면 신 자신은 선악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므로 신은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신이 선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선악의 기준이 정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 기준은 누가 정한 것인가? 그것이 누구든지 간에 선한 존재는 그 위의 존재가 행사하는 악을 어쩌지 못한다.
결국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는 좀처럼 실체를 정의 내릴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살펴보든 간에 역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들의 도덕적 성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를 보면 도덕율은 인간의 사회성이 만들어 낸 것이며, 또 도덕은 끊임없이 변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양심은 단지 도덕을 내적으로 투영하는 것일 뿐이다. 결국 도덕과 양심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며 어떤 가상의 주권자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
○ 종속론적 증명(Ethnological Argument)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 관념과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이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과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관념, 미신, 종교가 생긴 이유를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것이므로 의미가 없다. 보편적인 신 관념과 종교는 다름 아닌 두려움에 기반하는 것이다. 1차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상(바람, 홍수, 해가 뜨고 짐, 번개, 신기루, 화산 등 자연현상)에 대한 두려움이며, 고차원적으로 올라가면 죽음, 미래(내세)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 관념과 종교는 모두 사람이 정한 것으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존재를 형상화하거나 관념화한 것일 뿐이다.
○ 불의치유론적 증명(Treat for Injustice)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나 큰 불의가 있다. 선한 자들이 고통받고, 악한 자들이 흥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신은 존재해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라 현세의 불균형은 내세(천국과 지옥)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증명은 이 세상의 불의를 누가 만들었는가만 따지면 반박이 가능하다.
이 세상이 선하고 전능하신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한다면 전능하신 창조주는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세상이 가지게 될 온갖 불의와 고통과 불행을 내다본 셈이다. 그렇다면 창조주에게 그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이 불순종과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가 있는데, 이것은 자학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이 세상을 정의의 신이 아닌 불의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고, 아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또 현세의 불의를 내세에서 보상한다는 것은 창조주가 현세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천국과 지옥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달리 없다. 단지 이러한 세계가 있어야만 하고 또 그 세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정한 것밖에는 말이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치유론을 내세우기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고 보는 편이 훨씬 이해하기가 편하다.
○ 성경적 증명(Biblical Argument)
앞에서와 같은 합리적 신 존재증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증명시도로서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인 유추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창 1:1). 따라서 믿는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증명이 된다.
논의할 가치가 전혀 없는 궤변이다.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 말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도 전혀 반박할 길이 없다.
“믿지 않는 자에게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장 좋은 증거가 된다.”
이 증명은, 기독교는 이런 걸 증명이라고 내세우는 바보들이나 믿는 것이라는 증거로서의 가치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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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제기된 유신논증들은 실은 가설과 기대에 불과하다. 신 존재에 대한 실증 노력은 아직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며, 앞으로도 증명은 그리 기대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시도는 계속되고 있는데 그러한 시도들 자체는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 우리가 문제삼아야 할 것은 이미 실패가 자명한 논증을 진리인 것처럼 호도하는 짓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다. 신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를 따라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신이 없다고 해서 불안해하거나 허무주의에 빠질 이유도 없다. 우리의 가치는 신의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관건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을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과거에 일천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만든 논리에 갇혀서 독단에 빠지거나 자기비하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좀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각자가 온정을 가지고 지성과 창조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