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엄청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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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엄청 길다)

몰러 0 1,639 2005.06.20 18:51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엄청 길다)    
  
 
 
작성일: 2002/11/25
작성자: 몰러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고찰


○ 서 론

신의 존재에 대한 논의는 인류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나중에 과학적으로 규명이 된 것까지 포함하여)을 목격하면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자연적인 현상에서 신의 간섭을 느낀 인류는 차츰 그것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신관의 정점은 그리스/로마 신화가 될 것이다. 그러나, 차츰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일방적이고 순환적인 사고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고 또한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스 시대에 논리학의 기초가 어느 정도 정립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이러한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암흑시대를 거친 뒤 11세기에 와서 그리스/로마 철학이 아랍권을 거치고 기독교권에 재유입되어 스콜라 철학이 시작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한 규명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믿음의 영역에서는 신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성으로 고찰했을 때는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논거가 계속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의 존재를 순수이성으로 증명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러한 작업은 철저히 사유에 의한 방식으로만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신은 실질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단서만(그것도 경전 속에서만) 제공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철학이 진정으로 종교의 교리를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자들과 종교인들은 철학자들이 신 존재증명을 시도하였으며, 또 상당한 성과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영혼이나 신의 존재 같은 문제를 고찰하고 증명하는 것을 그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후대의 철학자들은 전대 철학자들의 증명을 비판해왔다. 예를 들어 안셀무스의 증명은 아퀴나스가, 데카르트의 증명은 칸트가 부정했던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 후대의 비판자들조차 그들 나름의 새로운 증명들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들이 한 것이라고는 자신이 만든 증명을 타당하게 보이기 위하여 비논리를 동원하고, 수학을 신비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또한 자신이 성장과정에서 영향을 받고 또 체득하게 된 편견을 하늘이 내린 직관처럼 위장했다.
특히 아퀴나스,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같은 학자들은 신에 대한 문제에 다다르면 논리가 이끄는 대로 따르지 않고, 또한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탐구를 하려 들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들은 철학적으로 탐구하기 전에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리 주어진 결론을 위해 이론을 찾는 이 같은 행위들은 아전인수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신존재증명 방법론을 버리지 않는다.

‘특별 계시(성경, 이적, 신현 등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영광과 구원의 섭리를 드러내 보이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존재는 합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하나님의 구체적 속성에 대해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합리적 유신논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보여 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기독교를 변증하고 전도하는데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사실 논리적/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신 존재증명”이 분명히 효과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초보자를 위한 유신논증 디비기’를 하고자 한다. 또한 이 글에서 필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시도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기된 “신 존재증명”을 고찰하여 과연 그것이 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확신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려 한다. 신존재론을 부정/반박한다고 해서 무신론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유신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자세이다. 무신론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여 신이 있다고 결론 내리는 자세를 버리라는 말이다. 학생들에게 무신론을 증명하면 종교수업에서 제외시켜주겠다고 호언한 미션스쿨의 교사는 억지를 부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무신론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특정 종교가 주장하는 신관을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서는 충분하다.

다소 글쓰기가 어려워질지 모르지만 독자들이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문적인 용어사용을 지양하려 한다.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할 경우 주석을 달아야 하겠으나, 그러면 이 글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으로 생각되므로 여러분 각자가 검색해서 확인할 것을 양해바라는 바이다. 또한, 다른 종교가 추구하고 있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이번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만 다루기로 한다.


존재론적 증명(Ontological Argument)

우리는 “신”을 있을 수 있는 대상들 중에서 최고의 것, 즉 가장 위대한 사유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와 똑같은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보다 위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다 위대한 어떤 것, 즉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상상할 수 있으므로 신은 존재한다.

아침 식사 후에 신이 나타나 안셀무스에게 내려주었다는 이 증명을 정리해서 말하면 “인간이 신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신 관념을 갖게끔 하는 절대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 되겠다. 이 증명은 논리적인 형태(논리적이란 뜻은 아님)로 신의 존재를 진술한 것 중 최초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신학자들에게 인정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아퀴나스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었다고 생각되었으나, 데카르트에 의해 다소 수정되어 부활하였고, 라이프니쯔가 조금 보태었다. 그리고 다시 칸트에 의해 뒤집어졌으나, 헤겔과 그의 후계자들의 밑바탕에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현대의 일부 성직자들이 이 증명을 계속 내세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첫째, 안셀무스의 논증은 ‘더 이상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존재(즉, 가장 위대한 존재)’를 말해주지 못한다. 어떤 존재가 없을 경우 다른 존재가 있다고 한다면,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단계 이상의 존재를 신으로 규정하면 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존재, 가장 위대한 존재이므로 안셀무스의 논증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반박은 제1원인론을 주장하기 위한 예비적 장치일 뿐이며 안셀무스의 증명에 대한 적절한 반박은 아니다.)

둘째, 신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인간이성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 대신 감각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감각경험이 신의 본질을 가르쳐 줄지 의문이다. 감각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신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은 개념에서 존재로, 관념에서 사실로 비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생각하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사물은 실제로도 존재하는가? 좀더 자세하게 말해서 우리가 그 사물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물이 우리의 사유 외부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인들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어와 유니콘과 용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인은 이것들이 실제로 존재했었고 지금도 숨어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한편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 때 더 위대한 존재가 있다고 상상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상상을 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상상을 해야한다고는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신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이 세상에는 분명히 무신론자들이 있다) 그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신은 누구에게는 존재하고 누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이중성을 띠게 되는데, 이 이중성은 사람들을 불가지론자로 만들어 버린다(물론 필자가 견지하고 있는 불가지론은 이것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다).


변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Transformation)

사물들 중에서 어떤 것은 단지 변화(움직임)를 받고, 어떤 것은 다른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움직임을 당한다. 즉, 변화는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의 원인은 무한히 소급해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우리는 움직임을 받지 않고 다른 것에 운동을 일으키는 어떤 존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와 같은 존재가 곧 신이다.

우선 운동의 원인에 있어서 그것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는 증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동의 동자가 존재한다는 필연을 유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원인의 무한소급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지만 제 1항이 없는 수열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1로 시작되는 부의 정수의 수열이 그것이다. (이 원인무한소급불가론은 뒤에 나오는 제1원인론,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 그리고 우월성 정도로부터의 증명의 근원이 되고 있다)
안티기독교계에서 우스개소리로 회자되던 “비포신(The BeforeGod)”이 있다. 비포신은 성경 속의 하나님을 존재하도록 만든 분이다. 그리고, 이 비포신은 비포비포신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으며, 비포비포비포신이 비포비포신이 존재하는 원인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제1원인은 “비포비포...(n+1)비포신”이시며 이때 n=∞이다.

부동의 동자는 목적인(目的因)을 중시한다. 그러나, 움직임 또는 변화는 사실 운동인만 적용된다. 최초의 운동은 신의 목적(또는 간섭)의 결과이고, 이 최초의 운동이 계속하여 다른 목적과 운동을 유발함으로써 이제는 셀 수 없는 목적인과 운동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이것은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운동에 어떠한 목적이 끼어들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없다. 목적 없이도 움직이는 것이 있다. 중력에 의해 땅에 떨어지고 있는 물체가 무슨 목적을 가진단 말인가? 빅벵은 또 어떠한가? 무의 상태에서 저절로 어떤 요동이 생겨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는데 말이다.

정리하면, 운동인은 우리 인간이 무한하게 소급하지 못하는 것일 뿐, 실제로 운동의 원인이 유한하게 소급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부동의 동자가 가진 목적이 없이 움직이는 존재도 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떠한 신도 부동의 동자의 성격을 구현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신이 뭔가를 창조할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그 신이 부동의 동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보기에 좋고 나쁘고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창조주도 좋고 나쁨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좋고 나쁨을 구별한 것이 창조주 자신이라 해도 그 가치에 자신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부동의 동자가 가질 만한 성격은 아니다.

다른 방식의 반박은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론을 차용하는 것이다.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量子)들의 변화는 누가 어떻게 일으키는가? 각 양자들은 분명히 제 멋대로 움직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이 운동들의 조합은 어떤 근사치 또는 평균치에 접근한다. 확정할 수 없는 양자들의 변화가 원자나 분자를 형성하고 생물이 형성된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엔트로피 감소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어떤 변화의 주체가 간섭한 결과가 아닌가 하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엔트로피 증감과는 상관없이 개별 양자는 여전히 제 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운동들의 조합조차 절대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근사치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도 부동의 동자를 부정하는 결과이다. 개별 양자의 변화는 부동의 동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거나, 양자 자체가 아무런 의지나 목적이 없는 부동의 동자가 된다.


제 1 원인론(Theory of 1st Origin)

※ ‘변화로부터의 증명’이 운동에 국한하여 신을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하여, 제1원인론은 의지, 사유, 물자체의 생멸 등 모두를 포함한다. 바꿔 말하면 ‘변화로부터의 증명’이 입증되지 않으므로 제1원인론은 저절로 부정되며, 또한 반박도 중복되므로 사실 논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땅에 떨어지는 물체에 대해 중력을 제정한 어떤 존재가 있다는 주장을 접하면 그냥 무시할 수만도 없다.

우리는 어떤 사물이 존재하도록 만든 다른 사물이나, 어떤 행동을 낳게 한 의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물이나 의지 등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은 선행되는 다른 원인에 종속된다. 이렇게 누가(무엇이) 원인을 일으키는지 점점 캐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 제1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종교인들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날까?”라는 속담을 들어가면서 주장하는 제1원인론은 우주론적 증명(Cosmological Argument)이라고도 불린다. 존 로크와 라이프니츠가 주장했던 이 증명은 논리철학이 발달하면서 여지없이 부정되고 만다.

일단 인과율은 대체로 시간에 종속된다고 보여진다. 즉, 어떤 결과에는 어떤 원인이 선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현대의 물리학은 인과율을 초월하는 입자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입자를 아직 우리가 직접 측정하기가 곤란하다는 것뿐이다. 또한, ‘변화로부터의 증명’에 대한 반박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들의 변화를 관찰해보면 거기에 아무런 원인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인과율을 초월하거나 원인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결국 제1원인도 없을 수가 있다.

버트란드 러셀이 제기한 반박을 살펴보라.

“만약 모든 것에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신도 (‘모든 것’에 포함되므로)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만약 원인이 없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다면 신과 마찬가지로 세계도 원인이 없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논변에는 하등의 타당성이 없다.”

러셀의 반박에 대한 종교계의 재반박은 원인(또는 존재이유)을 자신에 내포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표현되며, 러셀이 말한 ‘모든 것’의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인들은 여기에서 ‘모든 것’의 정의를 ‘하나 또는 일부를 제외하고’라고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바꾼 정의를 가지고 우겨봐도 여전히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도 그 자체에 존재의 원인이나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셀이 말한 대로 여전히 이런 논변에는 타당성이 없다.

반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제일 손쉬워 보이는 반박은 “제1원인이 있다 해도 그것이 특정 종교의 신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인데, 이것은 상당히 무책임한 결론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인정하기 싫어서 논지와 관계없는 다른 것(증명되지 않은 범신론, 다신교의 개념)을 끌어들여서 변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존재증명’은 이성적으로 가능하지만 신의 유일성은 신앙으로써만 알 수 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Chance)

우리는 자연이 우연성을 갖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우연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짐작한다. 우연성을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존재가 있다고)...

아퀴나스 시대에는 별의 움직임, 물의 흐름, 불꽃의 움직임 같은 것이 모두 우연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저런 식으로 표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을 뛰어넘는 존재, 즉 ‘우연’들을 조정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있다고 하게 되면 ‘우연’은 없고 ‘ 필연 ’만이 남게 된다. 결국 아퀴나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연성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 존재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부동의 동자와 비슷한 개념이 되어버리는데, 이것은 나중에 뉴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가 "자연법칙론"으로 발전시킨다. 뉴턴은 결정론적 우주론으로써 세상의 모든 운동이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과학이 발전하면 모든 운동이 설명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뉴턴은 여기에서 이러한 법칙을 제정하고 운용하는 어떤 절대자가 있을 것이며 이 존재를 신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데카르트가 이원론과 예정설을 제안하는 기초가 되기도 했다(그런데, 예정설은 기독교계가 원죄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자유의지론과 모순이 되어 버린다).

이렇듯 자연이 획일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칼테지안-뉴터니안 패러다임은 200년 넘게 세상을 지배해 왔으나 원자의 구조와 운동을 규명하는 단계에 이르러 거부되기 시작한다. 인간이 발견해 낸 법칙들에 따르는 정도가 원자와 같은 미시 입자들은 생각보다 낮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우연들’이 종합되어 평균치 또는 근사치로 움직인다는 혁신적인 개념은 예정설과 자연법칙론을 더 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아퀴나스가 주장한 우연성을 다시 거론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퀴나스가 생각한 ‘우연’은 절대적 존재가 통제하는 우연이기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이나 현대의 물리학이 말하는 ‘우연’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자연법칙을 말하고, 또 이용하고 있다. 즉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법칙의 존재를 느낀다고 해서 법칙부여자나 조정자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칙이란 운동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자연이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법칙부여자(하나님)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법칙은 만들고 어떤 법칙은 만들지 않았다. 만일 법칙을 선별적으로 제정함에 있어서 이유(목적)나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어떤 법칙에 따랐다는 말이 된다. 그럼 하나님이 따랐던 법칙의 부여자는 과연 누구일까? 반대로, 어떤 법칙을 제정하는 이유는 없고 순전히 하나님의 기분에 따라 정해진 것이라면 법칙이란 것은 우연히 생겨났다는 말과 아무런 차이점이 없으므로, 결국 신은 불필요한 개념이 될 뿐이다. 결국 오캄의 면도날을 적용하면, 법칙부여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에 가까울 것이다.

법칙제정의 선별성에 대한 기준뿐만 아니라 법칙 자체도 그 내용에 있어서 기준이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신은 왜 시간과 공간을 찌그러뜨리면서까지 빛의 속도를 절대한계치로 규정하였는가? 왜 속도가 증가하면 질량이 증가하도록 하여 빛의 속도에 이르면 질량이 무한대가 되도록 하였는가? 광속은 신의 전용속도이기 때문인가? 유신론자들은 이런 물음에 대해 ‘조화로운 우주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주가 인과율이 흔들리지 않는 최선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신도 어떤 법칙에 따랐다는 말이 된다. 그 법칙을 따르지 않았으면 우주는 금방 붕괴하였을 테니 말이다.


우월성의 정도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Superior Degree)

우리는 자연의 모든 사물이 가진 우월성에 그 차이가 있음을 안다. 이런 생각은 완전성의 개념을 함축한다. 우리는 점점 우월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덧 완전한 존재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이나 우주론적 증명과 적용대상은 틀리지만 똑같은 형식을 가진 논변이다. 이에 대한 반박 역시 같은 형식이 될 수 있다. 물론 “완전한 존재보다 더 완전한 존재가 있다”라는 식은 아니다. 어폐가 있는 진술이니까... 여기서는 완전한 존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할 것이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모든 사물에 우열이 있다고 하는 관념에 대해서이다. 똑같은 대상을 놓고도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면 우열이 뒤바뀐다.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는 일만 본다면 개구리는 벌레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벌레의 번식력을 개구리의 그것과 놓고 본다면 벌레가 우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공룡은 바퀴벌레를 무수히 짓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공룡은 화석으로만 남아 있고 바퀴벌레는 인간으로 하여금 전문구충회사를 설립케 할 정도다. 사회적으로 살펴보면 어떤 측면에서는 개미나 벌이 인간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우월성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측면에 한해서만 정당하다.

그래도 여전히 우열은 존재한다. 그러나 완전한 존재는 나타날 수 없다. 가장 우월한 존재가 완전한 존재일 것이라는 것은 기대에 불과하며, 가장 우월한 존재는 생각보다 우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우월한 존재도 회의적이다. 우열은 비교에 의할 때만 의미가 있는데, 이때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는 가장 우월한 존재의 가능성은 없다. 무제한적 범위에서 더 우월한 존재가 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증이 성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를 취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솝우화에서 생쥐부부가 딸을 시집보내는 이야기는 바로 위에서 말한 우열의 개념과 함께 가장 우월한 존재의 무의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더 우월한 어떤 것이 존재할 가능성은 항상 있으며, 이것은 완전한 존재를 부정하고 만다.

쓸데없는 짓이지만 한발 양보해서 완전한 존재를 상상해보자. 완전한 존재는 곧 전능자의 개념을 함축한다. 전능하지 않으면 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전능자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전능자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까?
“그는 자신이 도저히 들 수 없는 바위를 만들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속을 투시할 수 없는 상자를 만들 수 있는가?”
위의 물음들은 전능자의 존재를 모순과 역설에 빠뜨린다.

“그는 자신의 전능을 해제할 수 있는가?”
“그는 자살할 수 있는가?”
흔히 종교인들은 전능자가 자살할 수는 있지만 그럴 필요를 못 느낀다고 답한다. 하지만 전능자가 그럴 필요를 느끼든 말든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전능자가 실제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라는 결과론적 진술만이 유효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므로 결국 전능자가 아니게 되어 버린다.
우스갯소리나 하나 하자.
“전능자는 자신이 자살할 수 있는지, 혹은 자신의 능력을 해제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다 그만 죽었거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전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화로부터의 증명(Argument from Harmony)

우리는 어디에서나 적응과 일치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에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며, 개는 뼈다귀를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센 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순전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획 - 사물을 다스리는 어떤 지성의 선언 - 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유신론자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 증명은 지적설계론이라고도 하며, 텔레오필루스와 클레멘트가 주장한 ‘자연 만물이 질서를 유지하되 혼돈에 이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 질서를 유지하는 어떠한 이성적 존재가 필연적으로 있다’는 논증, 즉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과 비슷하다. 또한 지적설계론은 자연법칙론과도 비슷하다.

목적론이 옳다면 토끼는 몰이사냥을 당하기 위해 앞다리는 약하게 뒷다리는 튼튼하게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산 위로 몰려서 결국 사냥개에게 포위당하니까... 또한 토끼의 꼬리가 위로 젖혀지고 그 색깔이 선명한 흰색인 이유는 사냥꾼이 조준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토끼에게 이성이 있다면 동의하지 않겠지만, 다행히 일부 극단적인 동물보호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끼에게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토끼에게는 이성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것일 뿐이니 괘념치 말자.

그럼 지적설계론부터 살펴보자. 계획 또는 설계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포함한다. 그것이 단순히 ‘보기에 좋다’라는 이유뿐이라고 해도 어쨌든 목적이 포함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사물은 이런저런 이유로 면밀하게 설계되고 조정되었다는 믿음이 18세기까지 이어져왔다. 그런데, 다윈으로부터 시작된 진화론이 세상에 충격을 주었던 것은 이러한 목적을 배제한 적응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환경이 생물에 맞추어 만들어졌다고 보기엔 너무나 가혹하고 삭막하며, 오히려 생물이 환경에 맞추어 변해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세의 사물이 적응과 일치를 보인다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것(자연의 선택)일 뿐이지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의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목적론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을 보자.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인간과 짐승들을 창조한 목적에는 창조주 자신의 허영(보기에 좋았더라)도 있지만, 생육하고 번성시키려는 이유도 있었다. 그냥 소멸하고 말 것이라면 수고스럽게 창조할 필요가 없으니까... 여기에서 궁금한 점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면서 다른 동물들처럼 인간을 한꺼번에 여럿을 만들지 않은 이유, 공룡이나 도도새처럼 멸종된 동물들, 동물의 생육을 방해하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만든 이유 등이다. 그리고 수억, 수십억년 뒤에 태양의 노화로 인해 접하게 될 궁극적 소멸은 어떤 목적에 의해서 정한 것인지 가장 궁금하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각각에 대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죄에 대한 징벌 등의 이유를 들어 억지 섞인 답변을 제시하겠지만, 그 어떤 답변도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로서의 창조주를 표현하지 못하며, 그의 애초의 목적은 희석되고 만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적응과 일치는 어디에서나 볼 수는 있을지라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어쩌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변에 적응과 일치의 현상이 많다면 일견 좋은 일이겠으나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니다. 어쨌든 모든 것이 적응과 일치를 보이지는 않는다. 이 세상만 보아도 결함투성이임을 알 수 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이는 누구인가?)

질서를 유지하는 이성적 존재가 있어서 이 세상을 통제해 왔다면, 헤롯이 유아들을 학살한 것도 질서이며, 이교도인 알라의 전사들이 석유를 석권한 것도 질서이며, 나찌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낸 일이나 전쟁을 일으켜서 인구증가를 잠시 억제해준 것도 질서이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여 핵무기를 마구 찍어낸 것도 질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질서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한편 적응과 일치가 계획과 통제의 결과라고 인정하더라도 이 세상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또 진행되고 있는 부적응과 불일치는 무엇인가? 계획의 실패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부적응과 불일치 자체가 계획의 일부였는가? 후자의 물음에 부합되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에이즈다. HIV바이러스는 세균에 침투한 후에 자신을 복제할 때 많은 실수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세대의 HIV바이러스는 본래의 바이러스와 사뭇 다르다. 이것이 아직도 인간이 에이즈 예방 및 치료백신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다(이 시점에서 진화론도 수용할 종교인이 있을지 모르겠다). 최초로 세상을 창조한 이후에는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든 방임하는 신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부적응과 불일치가 계획이다 또는 아니다라는 전제는 확인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세상의 흐름을 방임하는 신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은 목적론을 명백하게 부정한다.

결국 자연법칙론을 다룰 때 얘기했듯이 세상을 지성의 선언이라고 한다거나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를 상상하는 것보다는 세상이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저절로 흘러간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


도덕론적 증명(Moral Argument)

이 사회에는 권선징악을 권장하는 도덕적 판단이 있다. 또한 개인의 양심도 악을 미워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이와 같이 선을 지향하는 도덕적 성향은 곧 이 사회를 도덕적으로 인도하려는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를 증명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데카르트의 것을 포함하여 기존의 신존재증명을 모두 폐기처분하면서 이상한 이론을 하나 만들어냈다. 이 도덕론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서 어느 정도 유용할 지는 모르나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에는 역부족이며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우선 도덕적인 존재가 이 세상을 인도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일단은 편하게 이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자. 신은 우리에게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하는 것은 악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살인자에게 쫓기던 친구가 자신의 집에 피신해 왔을 때 뒤쫓아온 살인자가 친구의 행방을 묻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때 정직하게 말함으로써 친구를 살인자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 친구를 구해야 하는가? 이때 칸트는 자신의 논리에 갇혀서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은 죄악이라고 선언하고 말았다. 논리적으로 엄격하고 또한 철학적인 결과이지만 상식적으로는 실책이다. 그가 조금만 더 수학적으로 생각했었다면 악에 대한 악은 선이 된다는 간단한 공식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이것마저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 칸트 이상으로 신은 상대적 선악기준을 거부하고 절대적 선악기준만을 고수하는 자세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좀 전에 했던 가정을 폐기해야할 것 같다. 신은 도덕적인 존재가 아닌 것이다. 또한 악한 존재도 아니다. 신에게는 선악에 차이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아니 선과 악 자체가 차이가 없어야 한다. 나 또는 우리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쁜 것은 악이라고 분류한 것일 뿐이며, 또 이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뀌는 성질이 있다. 결국 선과 악 자체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럼 역으로, 우리가 통상 느끼는 것처럼 선악에 차이가 있다고 가정해서 생각해보자. 그 차이는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차이가 있었던 것인가? 신의 명령에 의해 차이가 있다면 앞서 말한 대로 신 자신은 선악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래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신은 선한 존재이며 악은 인간의 죄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이 선하다면 신이 선하게 된 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인가? 그리고 누가 신을 선하게 했는가? 스스로 선하게 되었다고 어느 목사가 반론을 제기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답변이다. 스스로 선하게 됨에 있어서도 신은 어떤 기준을 따랐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악에 대해서 살펴보아도 인간의 죄로 인한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라고 책임을 씌울 수 있겠지만 인간창조 이전의 악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신은 선과 함께 악도 포함하고 있다는 결론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보다는 선과 악의 기준이 신이 존재하기 이전에 정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도덕적 주권자의 존재는 좀처럼 실체를 정의 내릴 수 없다. 어떤 측면에서 살펴보든 간에 역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도덕과 양심을 재조명함으로써 해결이 될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역사적으로 보아 도덕율은 인간의 사회성이 만들어 낸 것이며, 또 도덕은 끊임없이 변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양심은 단지 도덕을 내적으로 투영하는 것일 뿐이다. 또 늑대소녀에게 어떤 도덕과 양심을 발견할 수 있는가? 결국 도덕과 양심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며 어떤 가상의 주권자가 끼어 들 자리는 없다는 것으로 도덕론을 정리할 수 있겠다.


종속론적 증명(Ethnological Argument)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 관념과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절대자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이 말은 신에 대한 관념, 미신, 종교가 생긴 이유를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일단은 다음의 예를 들고나서 계속 논의하기로 한다.

번개나 벼락에 대해 고대인들은 신 자체, 신의 징벌 또는 그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벤자민 프랭클린이 피뢰침을 발명하자 성직자들은 이것이 신의 의지를 방해하는 불경스러운 시도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벼락은 불경한 사람이나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벌하려고 내리는 것인데, 피뢰침은 그런 자들을 보호하는 악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나 성당도 꼭대기에 피뢰침을 설치해 놓고 있다.

인간의 지식이 일천하였던 과거에는 바람, 홍수, 해가 뜨고 짐, 번개, 신기루, 화산 등 자연현상이 모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전염병,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지의 두려움에 대해 자연현상 자체나 아니면 상징물을 경배함으로써 그것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미신이나 종교는 모두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켜줄 존재를 추구함에 있어서 자신이 실증적으로 파악 가능한 것은 제외되었다. 신은 알 수 없는 존재여야 하지, 완전히 알 수 있다면 이미 신의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모든 종족이 보편적인 신 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종족마다 차이는 있으며 절대자를 믿지 않는 종교가 더 많다. 물론 절대자를 신봉하는 종교가 더 오랫동안 존속할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자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번개의 정체가 규명되면서 번개신을 숭상하는 종족이 없어졌듯이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절대자의 존재여부도 이제는 불투명하다.

결국 종속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의 한 변형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다수결 오류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불의치유론적 증명(Treat for Injustice)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나 큰 불의가 있다. 선한 자들이 고통받고, 악한 자들이 흥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서 신은 존재해야 하며, 그의 심판에 따라 현세의 불균형은 내세(천국과 지옥)에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이 증명은 이 세상의 불의를 누가 만들었는가만 따지면 반박이 가능한 증명이다.

이 세상이 선하고 전능하신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전능하신 창조주는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세상이 가지게 될 온갖 불의와 고통과 불행을 내다보셨다. 그렇다면 창조주에게 그 모든 것에 책임이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의 고통과 불행이 불순종과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화산이 폭발하고 지진이 일어나서 수만 명이 죽거나 다치는 것이 죄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러셀이 말한 것을 인용해 보겠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으려 하는데 그 아이가 장차 살인광이 될 것임을 알면서도 낳는다면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장차 저지르게 될 죄악을 미리 아셨다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 죄악의 모든 결과에 분명한 책임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 능동체이든 아니면 사전에 프로그래밍된 절차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든 상관없이 창조주는 책임을 면할 길이 없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세상이 죄악에 빠져도 모른척 방치하고 별도의 장소에서 특정한 시기에 심판을 하겠다고 신이 결심하기 전에 이미 신은 실책을 범한 것이다. 자신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인간에게 떠넘기고 심판하겠다는 신을 믿고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 신은 독단에 빠진 독재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좀더 간단하게 반박해 보자.

이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정의의 신이 아닌 불의의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볼 수도 있고, 아예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할 수 있지 않는가? 불의의 신이 중간에 회심하여 인간에게 보상을 해주기로 했다는 그럴 듯한 설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꼭 내세를 정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왜 현세의 불의를 현세에서 치유하지 않는가? 또한 어떤 결과가 꼭 우리가 원하는 대로, 우리가 상상한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근거가 있는가?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보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한편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어떠한가?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아는 이 세계는 기쁘거나 불쾌한 온갖 사건들과 죽음과 실패와 재앙들로 가득차 있으나 상상의 세계에는 보상과 필벌을 위한 장소가 별도로 마련되어 있으니 심판자를 믿고 덕행을 쌓으라고 한다. 심지어 심판자를 믿기만 해도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달리 없다. 단지 이러한 세계가 있어야만 하고 또 그 세계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정한 것밖에는 없다. 이것은 믿음과 필요성의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믿음은 존재를 입증하지 못함을 앞서 설명했다. 그럼 필요성은? 필요성이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면 사람의 팔은 왜 두 개 뿐인가? 세 쌍둥이, 네 쌍둥이도 낳을 수 있는데 왜 여성의 유방은 두 개 뿐인가?


성경적 증명(Biblical Argument)

앞에서와 같은 합리적 신 존재증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유한한 인간의 증명시도로서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론적인 유추에 의해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당연한 전제로 하고 있다(창 1:1). 따라서 믿는 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완전한 증명이 된다.

논의할 가치가 전혀 없는 궤변이다. 순환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증명은, 기독교는 이런 걸 증명이라고 내세우는 바보들이나 믿는 것이라는 증거로서의 가치만 있다.


○ 결 론

이제까지 논의의 편이성을 위해, 그 동안 제기되었던 유신논증들을 ‘증명’이라고 호칭했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갖가지 유신논증들 대부분이 가설과 기대와 선언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유신론자들, 특히 종교인들의 신 존재에 대한 실증 노력은 아직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며, 앞으로도 증명의 기대는 없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시도는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 딴지를 걸 이유가 없다. 여전히 신의 존재여부는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 문제삼야 할 것은 이미 실패했음이 자명한 논증들을 진리인 양 하는 무리들의 책동이다. 선량한 사람들을 이런 독단과 착각에 빠진 자들에게 내버려두어서는 아니 된다. 이 글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신에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다. 신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를 따라야 할 이유가 없으며, 신이 없다고 해서 허무주의에 빠질 이유도 없다. 우리의 가치는 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관건이다.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있어서 우리를 가소롭게 혹은 따뜻하고 인자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을 지라도 우리가 거기에 불안해하거나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그 신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인간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증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세상을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과거에 일천한 지식을 가진 이들이 만든 논리에 갇혀서 독단에 빠지거나 자기비하를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좀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각자가 온정을 가지고 지성과 창조력을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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