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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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신화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 잡설

몰러 0 1,390 2005.06.20 17:34

신화로서의 기독교에 대한 전반적 잡설    
  
 
 
작성일: 2002/07/24
작성자: 몰러
  
 
1900년대 초 유럽 계몽사상가들이 본 종교와 21세기 안티들의 시각으로 본 한국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거의 없다. 즉,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100년 전 유럽의 기독교를 답습하고 있다는 말이다. 세계의 종교가 초교파적인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국기독교는 전통교의에 대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다. 이것은 근본주의자는 물론이고 소위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물론 진보를 표방하는 기독교인들은 ecumenical reform에 동참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내면에 깊숙히 자리잡은 전통적인 믿음은 결국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어떨 때는 근본주의보다도 더 외곬적이다. KNCC, 기윤실, 뉴스엔조이 등의 활동을 관찰해 보면 이러한 성향이 잘 드러남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기독교에 대해 반드시 초교파적 개혁을 하라고 강요할 생각이 없고 그렇게 될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 이런 방향의 논의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다만 한국기독교의 현실태가 100년 전 유럽의 상황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화적인 것으로써 나쁜 측면의 사변화를 획책하려는 태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사변화의 나쁜 측면이란 다름 아닌 관념의 사실화를 시도하는 것을 말하며, 이 시도의 보편적인 형태는 미신이다.


필자는 종교의 특성 중 하나인 신화적인 부분에 대해 그것이 함축하고 내포한 역사성이나 문화성, 그리고 사회성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신화는 정확한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던 시대상황을 투영하여 후대에 전해주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상당한 가치가 있다. 한편 신화는 구전으로 또는 문자로 전환되어 전파되는데, 이 전파과정에서 구술자나 기록자의 사견이 이입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견이입조차도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때가 있다. 그래서 신화는 단순히 허구의 기록이라고만 볼 수 없고 나름대로 역사서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는 것이다.

문제는 신화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반대자를 박해하고 억압하거나 거짓을 호도하려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약간이 아니라 상당했다는 점이 그렇다.

고대의 경우 신화는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지배자나 피지배자나 신화를 사실로 간주했으나, 내부적으로는 신화가 그리 큰 악영향을 발휘하지 않았고, 당시의 상황에는 그것이 정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패러다임이 변한 뒤에도 신화를 액면 그대로 사실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는 것은 바로 종교독재의 원천이며 죄악의 씨앗이다.

고대 중동을 살펴보자. 모두 민족적 생존을 위해 나름의 법과 도덕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신의 임재와 기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불확실한 주변환경에서 자신들을 지켜주고 돌보아줄 초월적인 존재가 필요했으며, 그 중에서 유대는 타민족과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신상을 오랜 기간에 걸쳐 정립한 것이다. 유대민족처럼 혈통과 전통을 중시하는 민족특성은 결국 선민의식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선민의식은 종종 배타적인 성격을 띠게 되지만 다른 문화와 의식이 유입되는 것을 완벽하게 차단하거나 거부할 수는 없다. 단지 자기방식으로 치환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이라는 신화서는 이러한 의식과 치환의 총체이며 -융화는 아니다- 유대민족을 지배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럼 예수는 어떠한가? 예수의 사상은 원래 유대의 한 분파로서 계속 이어져 나가거나 아니면 사라질 성질의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정책이 바뀌어 -물론 유대인들이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로마에 반기를 듦으로써 화를 자초한 것이다- 자치적인 식민통치 대신 직접 통치와 추방정책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 유대는 마사다 항전을 끝으로 민족공동체가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사도들은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로마에 융합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 것이다. 4복음서에서 왜곡된 것들, 즉 바리새파의 위상, 빌라도의 처신 같은 것이나 갈라디아서, 로마서에 나오는 전통율법에 대한 유연한 해석시도는 이러한 생존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할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면 어느 로마인이 예수사상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렇듯 신화는 시대상과 문화와 의식을 반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역사에서 보여준 태도는 신화의 절대적 사실화를 추구하고 강요한 것밖에 없다. 여기에 대한 어떠한 이견도 용납되지 않았으며 탄압은 극에 달했다. 로마가 타락하기 시작한 시기에 기독교의 독특하고도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률은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이후의 상황은 인류사에 큰 교훈을 남기게 되었다. 종교가 권력을 장악하면 좋을 것이 없다는 교훈 말이다.


일정 세월이 흐른 뒤에는 현실에 대한 구속력이 상실되는 것이 신화이다. 그런데 만약 계속적으로 신화로써 현실을 구속시키려 한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정체도 아니고 아예 퇴보를 유발하고 만다. 단적인 예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찬란한 문화가 기독교로 인해 사장되고 부정된 것이 그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밝혀냈고, 또한 지구 둘레를 재는 완벽한 방법을 고안(비록 측정방법이 따라가지 못하여 많은 오차가 있었지만)했으며, 시, 음악, 미술 등 예술 전분야에 걸쳐 획기적 성과를 이루었던 그리스-로마 시대에 비하면 중세에는 지구는 편평하며, 세상의 끝에는 가볼 엄두도 못내는 등 이성적 탐구방법이 거부되었으며, 단지 비성경적인 것에 대한 탄압과 공격만 있었다. 사상과 철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와 고민은 사실상 금지되었으며, 오로지 기독교와 관련된 것만 다룰 수 있었다. 이교도 성인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조차 그의 진수는 무시되고 기독교적에 것에 합목적성을 띤 것만 용인되었다. 가끔 기독교인들이 위대한 철학자로 내세우는 아퀴나스를 예로 들어보자. 필자가 보기에 아퀴나스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적인 정신을 소유한 자가 아니다. 그가 철학적 탐구를 하는 출발점은 그리스의 철학자들과는 어긋나 있다. 그는 예측이 불가능한 것, 즉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결과들, 즉 이미 종교적인 신앙에 바탕을 두고 선포된 진리를 탐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어떤 것을 논변을 통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결론을 위해 논변을 찾아내려는 노력만 했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신화적 계시를 논변으로 전환시켰다. 아퀴나스는 그나마 논변을 다루기나 했지만 당대의 다른 신학자들이 한 일이란 오류를 해소하기 위해 또 다른 오류로써 덮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리스-로마 시대의 유물들은 아랍에 의해 발전하고, 은둔한 수도사들에 의해 보존(단지 보관일 뿐이다. 세상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뒤쥐처럼 모으기만 했을 뿐 연구발전시킨 것은 아니다)되었다.


창세기에 나타난 인간의 운명을 다른 방법으로 살펴보자. 인간은 어릴 때에는 부모의 보호 아래 생존에 대한 고민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철이 들면서 부끄러움과 선악을 알게 되고,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며,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해야 한다. 고통 속에 후손을 낳아야 하고 뼈빠지게 일해야 한다. 그리고 늙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창세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려는 순간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되는 노예가 되고 만다. 단지 저주받은 존재가 될 뿐이며,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여기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가치를 격하시켜 놓고는 이상한 방법으로 가치를 격상시키려는 노력을 해왔다.

창세기의 반대쪽인 요한계시록도 살펴보자. 사실 계시록은 과거의 신화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 논의할 성격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를 다룬 텍스트들과 계시록이 가진 공통의 코드 때문에 잠깐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공통의 코드란 다름 아닌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고, 이 믿음은 바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표면적으로 기독교는 죽음이나 영혼의 향방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방법과 이유를 제공해준다.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기독교는 공포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써 낙관적이고 즐거운 신앙을 가지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공포는 모두 과거의 신화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기독교는 용기의 가치를 보여주고 가르쳐서 공포를 벗어나게 하는 대신 공포를 보여주고 회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나마 실존하였거나 실현이 예상되는 공포가 아니라 스스로 허상의 공포에 호소하는 오류를 범하고 남에게도 그 공포를 전달하려고 한다.

“종교가 스스로를 공포에 호소하는 한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격하시키는 것이다.” - 버트란드 러셀

 

지금까지 신화의 사실화를 추구하고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보여준 폐해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신화의 허구적인 부분이 무조건 배격되고 삭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허구조차도 신화가 형성되고 서술되던 시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신화는 신화로 끝나야지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면 분명히 트러블이 발생하게 된다. 신화는 삶의 피난처가 되어서는 아니 되며, 삶에 참고는 할지언정 지표가 되어서도 아니 된다. 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다.
기독교인이나 반기독교인이나 모두 이러한 신화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성경에 접근해야할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철학적 엄격성에 기반하였을 때 누구나 물질적 사물의 존재를 의심하고 세계는 불과 5분 동안 존재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나는 무신론자이다.
나는 기독교의 신의 존재가 올림푸스의 신들이나 발할라의 신들의 존재보다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즉 어느 누구도 지구와 화성 사이에 타원의 궤도를 그리며 돌고 있는 도자기 주전자가 없다는 것을 (사변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실제 생활에서 이것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의 신이 이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 버트란드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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