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러님의 칼럼입니다. |
해방신학에 대한 인식
작성일: 2002/07/06
작성자: 몰러
왜 갑자기 케케묵은 해방신학을 들고 나왔느냐 하면, 근래 들어 케케묵은 개신교계가 케케묵은 교리를 가지고 케케묵은 해방신학을 케케묵은 방법으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식의 비유는 맞지 않다. 정확한 비유를 하자면 팽팽 놀다가 과식하고, 또 음식물을 뒤집어 써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 강아지가,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다 실수를 저질러서 도둑은 못 잡고 피투성이가 된 강아지를 나무라는 격이기 때문이다.
개신교계는 작금의 난항을 타계하기 위해서 약간 삐딱선(개신교의 기준으로)을 탄 조류에 대해 책임을 전가하고 씹어대고 있다. (가끔은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업적인양 호도하기도 한다. 문익환 목사에 대하여 비판의 기조를 유지하던 개신교계가 올들어 갑자기 한통속으로 엮어 넣으려는 움직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가톨릭에 대한 공격이 증가하였는데, 주무기는 성모숭배, 교황권에 대한 비아냥, 성채와 성물에 대한 이단성, 연옥 개념에 대한 기조 공격, 에큐메니컬(그리스어 오이쿠메네,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살고 있는 세계라는 말에서 유래)한 움직임에 대한 반동으로 근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것, 그리고 해방신학 씹어대기이다.
성모숭배나 교황권에 대한 담론에 대해 안티의 입장에서는 五十步笑百步라는 말 이외에 아무런 논평도 할 것이 없다. 성채와 성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개신교계는 공식적인 성물을 인정하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대물강박증과 명품수집 욕구는 가톨릭의 그것 이상으로 폐해가 심하다. 연옥 개념은 근본주의자들의 모(천국) 아니면 도(지옥) 식의 심판개념보다는 합리적이다. 단지 성서에 나와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신교계는 상대적 합리를 부정하고 명백한 불합리를 고집하고 있는데, 몰러가 늘 강조했듯이 심판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며, 따라서 천국과 지옥의 개념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판단되겠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원래 다양한 교파를 아우르기 위한 범교회적 움직임이었으나 스탈린의 공작과 KGB의 침투(세계교회협의회, 즉 WCC의 공산권 카운트 파트너인 평화연맹의 회장 니콜라이 대주교는 KGB의장 출신이고, 나중에 WCC회장이 된 니코딤 대주교도 KGB의 프락치였다)로 세속적 혁명신학으로 변질되었다가 80년대 말에 이르러 다양한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인정하고 융합하려는 초교리 다원주의적 움직임으로 개편되었다. 개신교계는 처음에 YMCA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동참을 하다가 5, 60년대에는 용공성을 트집잡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운동이 개신교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원주의적 움직임이다. 정리하자면 에큐메니칼 운동은 크게 보아 초교파운동 → 세속적 교회운동(용공성까지 띠고서) → 다원주의적 초교리운동으로 변천하였다. 현재 개신교는 아직도 60년대의 논리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비판하고 있으나 실상은 통합교리적인 움직임에 위기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기감의 근원이 신에 대한 매력이 줄어든 것에 있음을 모르고 말이다.
그럼 다른 분야는 이쯤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해방신학을 살펴보고, 이에 대한 개신교계의 삽질을 조금 알아보자.
그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은 해방신학은 분명히 실수를 저질렀고, 그 이전에 시작부터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해방신학 비판의 논점은 개신교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아울러 염두에 두기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몇 년 전에 꼴통 같은 운동권 학생(한총련 멤버로 짐작됨)과의 Online논쟁 후에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썼던 것을 약간 각색한 것임을 밝혀둔다.
비판을 할 때는 먼저 비판 대상의 태생배경부터 이해하여야 한다. 해방신학은 60년대의 급격한 사상적 혼란과 열강의 경제식민 정책에 대한 비판의식이 주가 되어 남미의 성직자들과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이 주창한 것이다. 남미의 경우 선진산업국으로의 도약이 좌절되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유럽에 종속되었다. 또한 살인적인 인플레가 장기간 지속되었고, 소수의 백인이 다수인 메스티조, 뮬래토, 인디오들 위에서 소득을 독점하여 빈부격차의 심화와 인종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급격한 도시화를 불러왔고, 이는 실업, 빈민, 주택문제를 가중시켰으며,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야 할 정치권은 쿠데타와 분쟁으로 점철되어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민중의 90% 이상이 가톨릭 교도였기에 교회와 성직자에 대한 존경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종교는 가진 자의 이데올로기 역할만 했으며, 결국 뜻 있는 성직자들에 의해 해방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해방신학의 탄생배경이 되는 상황을 쉽게 느끼고 싶으면 존 뒤간 감독의 “로메로”를 볼 것을 권한다. 물론 감독의 자의적 해석과 편향성이 조금 포함되어 있음을 고려하여야 함은 불문가지다.
해방신학은 그 사상의 원류를 히틀러 암살기도 실패로 결국 사형 당한 디트리히 본회퍼에 두고 있으며, 기독교 재건투쟁을 위해 정치/경제의 억압을 타파하려고 했던 몰트만의 정치신학이 가미되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신학/사상적으로 반대의 입장에 있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용(물론 유물론 같은 기조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경제학적인 방법론과 투쟁의 방법론을 수용한 것이다)하여 이른 바 ‘적과의 동침’을 시도하면서 서구 열강, 특히 미국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 물론 해방신학은 종속이론의 틀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지원이 있었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지는 의문이다. 해방신학의 사상적인 틀은 2차 남미 주교회의(일명 메델린 회의라고 불린다. 1968)에서 완성된다. 자국내 지배층의 정치/경제적 수탈을 뜻하는 ‘내적 식민주의’와, 외국의 경제적 지배에 의한 수탈을 뜻하는 ‘외적 식민주의’를 타파하자는 기조가 형성된 것이다.
해방신학은 또한 성서에서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교계의 이해와 지지를 받아야 하고, 현세적 구원대상인 민중의 90%가 신자였기 때문이다. 성서는 기독교도들의 주장대로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에 해방신학자들이 성서적 근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다른 성서적 근거도 있지만, 이사야서 61장과 누가서 4장에 나오는 이 구절은 노사투쟁, 구속자 석방, 민중의식 고취, 민권운동 등 해방신학이 추구하는 요소가 골고루 들어 있다. 하지만 나중에 해방신학은 예수가 고향에서 배척 당하듯 남미에서 외면 당하는 운명을 가지고 만다.
한편 아모스서에서는 혁명을 종용하는 구절이 인용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오라고 조르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그리고, 야고보서에서는 평등과 부의 균등분배를 주장하는 구절이 인용되었다.
비천한 신도는 자신의 처지가 높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부자는 자기의 처지가 낮아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부자는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요, 여러분은 율법을 따라 범법자로 판정을 받게 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부자들은 들으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부르짖으십시오. 여러분의 재물은 썩었고, 여러분의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그 녹은 장차 여러분을 고발하는 증거가 될 것이요, 불과 같이 여러분의 살을 먹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날에도 재물을 쌓았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여러분은 이 땅 위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상 해방신학의 태생배경과 사상적, 성서적 근거를 알아보았다.
이제 개신교계가 무엇 때문에 해방신학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교리 해석상의 차이점을 들 수 있다.
전통적(?) 신학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논하고, 원죄로 더럽혀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와 속죄를 강조하며, 예수의 재림과 종말, 사후의 천국을 강조한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주체로서 인간과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조정된다.
반면 해방신학은 야고보서를 주로 인용하면서 믿음만이 아닌 실천을 강조하는 신학을 기조로 하여, 가난과 억압의 구조적 모순, 인간에 의한 인간착취, 인종차별과 계급구조 등 구체적인 현실의 모순을 악으로 간주하고 사회구원을 주장하면서 개인에게는 죄가 없다고 해석한다. 종말에 대한 인식도 현세에서 실현되는 종말을 다루어 역사와 종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의 주인공은 여전히 하나님이지만, 역사의 주체자는 인간이며 인간이 관여하지 않은 구체적 사건 이외에는 어떤 진리도 거부한다.
그리하여, 과거의 교회는 체제나 경제적 유력집단을 옹호하는 세력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 즉,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해방신학에 공산주의가 침투한 것이다.
종교를 아편으로 간주하고 기독교(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하던 소련은 공산주의의 세계화가 종교탄압에 의한 서구의 반발로 벽에 부딪히자 헌법을 수정하여 발표한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국가 이념과 교회의 양립가능을 골자로 한 수정안을 발표한 후 스탈린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침투한다. 전재한 대로 KGB요원을 WCC에 침투시키고, 나중에는 WCC를 장악한다. 미국을 월남전의 침략자로 규정(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나, 이 주장의 저의가 정의보다는 공산주의 전파 및 미국견제에 목적을 둔 것이므로 가치가 없다. 즉 그놈이 그놈이란 말씀)하고, 3세계의 폭력혁명을 부추겼으며, WCC에서의 활동을 광고용으로 활용하면서 내부적으로는 더욱 교묘하고 지속적인 종교탄압 활동을 벌였다. 당시 냉전체제 하에서 이러한 해방신학의 기류는 자본주의 진영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원래의 목적인 민주주의 구현과 민중해방에 역행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것은 가톨릭과 개신교로 하여금 각각의 나라에서 교권장악과 수구적 활동영역 확장, 그리고 권력자에 빌붙어 종교적으로 권력자(독재자)를 면죄하는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사실 해방신학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불씨가 꺼져버렸다.
첫째, 신학적인 문제로서, 보편적인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할 종교를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하는 개념으로 축소하여 스스로 신학적인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존재하지도 않는 원죄의 개념을 억지로 사회의 구조악으로 치환하여 표현하려 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지성으로부터 사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둘째, 윤리적인 문제로서, 폭력혁명을 정당화한 점이다. 압제자의 폭력은 죄악이고 피압제자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지하드의 개념은 기독교의 보편논리에도 부합하지 않았으며, 계속되는 전쟁과 쿠데타는 민중을 지치게 하여 지지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린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것이 남미와 한국의 차이점이다.
세째, 이데올로기의 문제로서, 당시의 냉전체제 하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채용한 것은 그들의 적인 자본주의 세력을 단합하게 만들고, 이슬람권의 지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결과를 야기하여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네째, 종속이론과 신식민주의에 대한 반대가 지나쳐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부흥 시도를 오히려 방해한 점이다. 자체 자본이 없는 상태에서 외부자본 투자가 뒷받침되지 않은 경제계획이 성공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해방신학에 대한 당시 한국 개신교계의 대응은 한편의 코미디에 가깝다. 일단 해방신학의 주류는 가톨릭계였다. 단지 이 이유만으로도 개신교계는 해방신학을 반대할 근거가 충분했다. 그리고, 해방신학이 견지하고 있던 입장, 구체적으로 말해서 교리에 대한 상황적이고 자의적인 해석 자체에 딴지를 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간과하고서 말이다.
개신교적 사고방식이 꽉 잡고 있던 미국을 위시한 열강들에게 남미의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배려는 처음부터 끝까지 없었다. 남미의 현실사회에서 만연한 부정부패와 부조리에 대해 각종 선언과 비판을 하긴 했지만, 남미인들과 해방신학자들이 경계했던 제국주의적 성향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자본과 자원을 독점하여 그 국가를 종속시키려는 의도하에 진행된 국제적 고리대금업 ‘남미 경제개발 프로그램’... 그곳에는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국민적 단합을 이루어 근면과 발전의지를 가지고 낙후된 조국을 부국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소프트웨어적인 내용은 거의 들어 있지 않았다. 해방신학자들은 이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태동한 해방신학을 신학적으로 깨는 역할을 한 것이 개신교였고, 해방신학에 함유된 ‘빨간 것’을 과장함으로써 서구 열강이 투자와 지원을 꺼리게 만든 것도 개신교였다. 비록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일견 이해가 가지만 말이다.
요즘도 한국의 개신교계는 남미의 낙후성에 대해 가톨릭과 해방신학에 책임을 돌린다. 물론 당시 권력에 빌붙어 있던 종교계나, 이를 타파하려던 해방신학 모두 인민들에게 실질적인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지만, 남미의 낙후성에 대한 분석은 신학적인 논리가 아니라 경제논리로 접근해야 한다. 해방신학은 여기에서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 한계를 지적하지 않고, 해방신학의 동기와 기조를 비판하는 개신교계의 태도는 독재자와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실재로 서슬 퍼런 유신시대나 5공 시대에 개신교가 한 일은 독재자에 대한 신학적 첨병역할이었다.
비판의 잣대를 잘못 들이대면 스스로 파시스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론은 개신교계가 해방신학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리고 사회현상에 어떤 형태든지 간에 신학이 관여했을 때는 좋은 꼴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루터가 왜 야고보서를 그냥 놔뒀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