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선을 까발기고 양심을 찌르는 비수... 토마스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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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미국의 위선을 까발기고 양심을 찌르는 비수... 토마스 페인

몰러 0 2,401 2005.06.20 16:55

미국의 위선을 까발기고 양심을 찌르는 비수... 토마스 페인    
  
 
 
작성일: 2002/05/20
작성자: 몰러
  
 
토마스 페인.

“당신을 배신한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었소. 당신은 너무 앞서 나갔으며, 또 너무나 과격했소이다. 당신의 시대에는 범신론이 무신론과 같다는 것을 왜 몰랐소이까?”


토마스 페인은 1737년(혹은 1739년) 영국의 어느 퀘이커 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그는 민간무장선을 탔던 것 말고는 특별한 활동을 한 바 없다. 20살에 결혼했다가 몇 달만에 부인이 사망했고, 세금징수원이 되었으나 근무태만(그는 현장시찰을 핑계대고 집에서 공부하곤 했음)으로 해고되었다. 나중에 복직하고 또 재혼도 했지만 1774년에 이혼을 하고난 얼마 후 징수원의 봉급인상운동을 주동하였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세금징수원 노조(사실 당시에는 노조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그냥 집단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의 진정서를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런던에 갔던 페인은 밴자민 프랭클린을 알게 되었다. 프랭클린이 써준 추천서를 들고 미국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어느 신문사의 주필이 되었다. 그는 직선적이고, 간결하며, 촌티가 줄줄 흐르는 문체로 글을 썼는데, 이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소위 ‘교양 있는 글’들보다는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것이 그의 강력한 장점이자 무기가 되었다.

이듬해 3월 페인은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를 비판한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너무나 강경했으며, 미국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시로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노예제를 반대한 것이다. 그는 1780년 노예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의한 펜실바니아 주가 입안한 법령의 전문을 쓰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미국에서의 입지를 점점 좁게 만드는 것이었으며, 너무나 강경한 그의 주장에 질린 친구들도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여 그는 곤궁에 처했다. 하지만 곧 미국독립운동과 관련한 활동으로 그는 금방 재기한다.

이 시점에서 미국독립운동에 참가한 페인이 가진 정치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일단 에드먼드 버크의 이야기부터 하자.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자유주의적이기는 하였지만 급진주의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에 보수적인 저술을 많이 했다.(좃선이 가장 좋아할 타입의 철학자다) 버크는 프랑스의 혁명가들을 “새로 나타난 장사꾼”이라고 칭했으며, 영국의 건전한 상식과 자유주의를 선전하고 옹호했다. 이러한 버크의 보수주의에 대하여 페인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페인은 영국식 민주주의의 허울과 위선을 배격했으며 실재로는 서민을 억압하고 부를 독점하고 있던 귀족들만의 의회를 반대했다. 대신 그는 공화제에 의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인간의 권리”를 저술했다. 그는 군주제도, 귀족주의, 노예제도 등 모든 종류의 폭압을 반대하는 문자 그대로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미국 독립운동 당시 페인은 “상식론”을 통하여 큰 명성을 얻게 되는데, 이 선동적인 저서는 독립군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된다. 여기에서 페인은 미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제시하며, 바람직한 정부의 형태도 규정했다. 그가 지지한 정부는 국민에 대해 엄격하게 책임을 지는 정부, 즉 국민에게 생명, 자유, 행복의 추구를 허용할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는 정부였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정부는 폐기해야 하며, 만일 꼭 필요한 경우라면 무력에 의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글로 해서 그는 무장봉기에 의한 독립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상식론은 독립군의 필독서가 되었다.

조지 워싱턴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는 상식론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상식”이란 소책자에 담긴 탄탄한 신조와 빈틈없는 이론, 팔모스와 노퍽에서 보여진 것처럼 불꽃튀는 주장이 몇 차례 더 보태진다면 수많은 대중이 하등의 망설임 없이 분리(독립)가 정당하다는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상식론”, “위기” 등 페인의 저서는 독립군 지휘부의 지시에 의해 군인들에게 읽혀졌으며,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페인은 미국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몇몇 주 의회는 그에게 돈과 부동산을 주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글쓰는 대가로 돈 받는 것을 꺼려서 항상 가난하기만 했던 페인이었지만 이제는 성공한 혁명가의 위상을 가졌으므로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술분야로 관심을 돌려서 대형철교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그는 자신이 구상한 철교모형을 전파하여 큰 호응을 이끌어냈으며, 이에 그가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발명가로서 여생을 보낼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타고난 혁명가인 그는 후대에 그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는 체 게바라처럼 다른 곳에서 그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앞서 말한대로 버크의 영국식 의회민주주의 옹호에 반대하여 “인간의 권리”를 저술한 페인은 사제(미신)에 의한 통치와 정복자(권력)에 의한 통치를 반대했으며, 이성에 의한, 즉 사회의 공동이익과 인간의 공동권리에 의한 통치를 주장했다. 그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온건한 필치로, 그리고 반대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욕설을 사용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논의점의 치명성으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당시 영국 수상이던 피트의 재정정책을 비판하면서 세습제도(권력과 부의 세습)를 반대하여, 결국 피트는 페인을 기소하고 “인간의 권리”를 발매금지시킨다. 피트도 페인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페인을 저지하지 않으면 영국에서 유혈혁명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에 기소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페인은 더욱 도전적이고 선동적인 독설로써 영국정부를 비난했으며, 결국 본격적인 체포작전이 시작되고 교수형의 위협이 다가왔다. 결국 ‘9월의 학살’이 시작되자 시인 블레이크의 권유로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도주하게 된다.

프랑스에 도착한 페인은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그는 예전에 이미 칼레시의 대의원 신분을 갖고 있었으며, 군과 시민들로부터 최고의 영접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당시 혁명 후의 프랑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미국과 같은 온건한 혁명을 원했고, 미국 독립을 원조했던 루이 16세의 처형을 끝까지 반대했다. 이 때문에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미움을 샀고, 대의원 신분 박탈과 함께 수감되고 말았다. 게다가 독립의 영웅인 그를 도와주어야 할 미국측 공사가 하필이면 페인에 대해 사적감정까지 갖고 있었던 모리스였기 때문에 그의 수감기간은 연장되었고, 단두대에 올라갈 뻔하기도 했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모리스의 친구가 부정행위를 했는데, 이것을 페인이 들춰내어서 모리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또한 모리스는 친영반불주의자였다(프랑스를 적대시하는 사람이 프랑스에 공사로 파견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모리스는 페인이 미국인이 아니므로 아무런 조치를 취할 의사가 없다고 쟈코벵당원들에게 말했다. 페인은 워싱턴이 자신을 구명해 줄 것으로 믿었으나 당시 워싱턴은 영국과 비밀협약을 맺었던 상태였고 페인과 영국정부의 관계를 잘 아는 워싱턴은 결국 페인에 대해 모로쇠로 일관했다.

모리스의 후임인 먼로에 의해 구명되고 또 치료까지 받은 페인은 회복하자마자 워싱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페인은 모리스가 자신에게 했던 짓들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지만 워싱턴의 치명적인 무관심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퍼슨과 애덤즈가 대권을 놓고 다툴 때 군주제와 귀족주의를 신봉하는 애덤즈를 지지한 워싱턴은 결국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민주주의의 원칙을 거부하고, 프랑스를 적대시하며 영국을 지지하였는데, 이러한 워싱턴의 변절을 들은 페인은 워싱턴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귀하는 본인이 위험에 처했을 때 도와주지 않고 외면함으로써 개인적인 우정을 배신하였습니다. 개인적인 것은 그렇다고 치고, 귀하의 공적인 생활은 너무나 위선적이었고, 귀하는 변절자에다 협잡배이며, 훌륭한 (민주적) 원칙들을 포기한 것 같습니다. 아니 귀하가 그런 원칙을 가진 적이나 있었는지 세상은 판단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나폴레옹 시대가 되어 프랑스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나폴레옹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된 페인은 젊은 날 그가 열정을 바쳤던 미국에 돌아가서 제퍼슨을 돕고 싶어했다. 1802년 미국에 도착한 그는 결국 자신이 생각했던 만큼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정중한 예우를 받기는 했지만 그는 정치적 활동이 사실상 금지당했고, 친구들로부터도 예전의 그런 우정이나 동지애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시당했다. 세월이 갈수록 그의 입지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투표권마저 박탈당했으며, 마차승차라든지 은행의 대출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급기야는 밤에 길을 걷다가 습격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든 지원이 끊겨서 여러 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부도덕과 무절제한 생활을 하지 말라는 핀잔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의 말년은 이렇게 고독과 빈곤에 시달리는 삶이었는데, 1809년 그의 임종 순간에 두 명의 목사가 그의 방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회개할 것을 강권했다. 페인이 생애동안 어떤 짓을 해왔든 간에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그러나 페인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을 거부하고 단지 두 마디만 말했다.
“날 가만히 내버려 두시오. 안녕히 가시오.”
그런데, 두 목사는 페인이 죽음에 임박하여 회개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한동안 이것이 널리 믿어졌다.(“한쪽 뺨 맞고 성질내신 예수님”에서 발췌) 나중에 결국 거짓이 드러나서 두 목사는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한 목사가 변명 삼아 한 말은 페인이 그 동안 끝없이 배신당한 진짜 이유를 암시한다.

“토마스 페인씨는 그 동안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아왔소. 물론 그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은 사실 비난받아 마땅하오. 하지만 우리는 페인씨가 더 이상 비난당하거나 탄압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오.”

물론 이 말도 거짓이다. 그들은 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선전에 이용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사실 목사의 이러한 변명은 근거가 없어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반기독교 세력이 퍼뜨린 역조작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유명인사, 그것도 지독한 반기독교주의자의 회심처럼 유용한 선전도구가 어딨으랴... 이 외에도 페인은 다른 방법으로 종교선전에 이용당했다. 페인이 왕성하게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종교를 비판하며 활동하던 곳에 미국의 성서협회가 들어섰다. 그리고는 기독교는 ‘반종교주의자가 활동하던 곳을 점령함으로써 승리의 기치를 드높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요즘 몇몇 기독교인들이 기독교가 반기독교에 승리하였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대목이다.(장사가 안되어 문닫은 교회를 역술인이 사서 동양철학관으로 개조했다면 일개 점쟁이가 기독교에 승리한 셈인지 묻고 싶다)

이제 토마스 페인이 혁명의 동지인 워싱턴, 애덤즈, 제퍼슨으로부터 버림받고, 영국정부로부터 그렇게 심한 탄압을 받은 진짜 이유를 설명해야겠다.

그의 실질적인 마지막 저서인 “이성의 시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지독한 반기독교주의자였다. 타고난 민주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인 그에게 기독교의 교의는 참을 수 없는 억압이자 탄압이었다. 처음 그에게 반기독 성향을 형성케 한 것은 아마도 노예제도가 아니었나 싶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던 제퍼슨도 처음에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내용을 포함했다가 나중에 슬그머니 빼버렸는데, 그것은 노예제를 신이 인정한 제도라고 주장하는 후원자들의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두 사람의 사이는 냉랭하지 않았다. 독립전쟁 중일 때부터 워싱턴과 애덤즈가 부담을 가질 만큼 페인은 종교비판을 해왔지만, 몇몇 사람들에게 말로만 표현했을 뿐 문자로 옮기지는 않았기에, 즉 널리 주장을 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독립전쟁의 영웅으로서 대접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

페인이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구르기 시작한 것은 영국에서 “인간의 권리”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책에서 그는 종교와 권력(세부적으로는 재무성)의 결탁과 협잡을 비판했고, 이것을 확장하여 왕권 그 자체와 세습을 부정했다. 작위를 받은 자는 자동으로 의원이 되었던 허울 좋은 의회민주주의가 서민은 외면한 체 아성만 보호/증축하려는 협잡이라고 비판했으며, 이를 영국국교회가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위에서 말한 대로 상당히 온건하지만 직설적인 그의 표현은 결국 피트가 그를 기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즈음 그는 종교에 대한 비판을 구체적으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프랑스로 도망간 뒤 그는 “이성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저술한다. 체포되기 몇 시간 전에 초고가 완성된 “이성의 시대”에서 그는 기독교를 공격했는데, 그것은 무신론적인 관점보다는 범신론에 가까웠다. 자연종교, 자연신론을 주장한 그의 저서 제 1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나는 한 분의 신 이외에는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이 세상 너머에서의 행복(아마 기독교적인 행복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듯 하다)을 바란다. 나는 인간의 평등을 믿는다. 그리고 정의를 구현하고, 관용을 사랑하고, 우리 같은 인간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종교의 의무라고 믿는다.’

그는 구약에 나온 신과 이스라엘 민족의 타민족 대학살 사건을 두고 비판했는데, 당시는 비록 신약 이후의 유대인을 차별하고 억압했지만 구약의 유대인을 비판하는 것은 금기시했던 시대여서 그는 어딜가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페인으로서는 중요하고 위험했던 그 시기에 워싱턴은 노예제도와 종교에 대한 이견을 가진 페인을 외면하고야 말았다. 워싱턴도 “이성의 시대”를 읽어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페인이 버림받은 이유가 확연해진다. 그가 제퍼슨을 비롯한 미국의 친구들로부터 거부당한 것은 그의 기독교비판 경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대선에 도전했던 제퍼슨에게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던 것은 그와 페인의 친교 때문이었다. 그의 정적들, 심지어 동료들까지도 제퍼슨을 반기독교주의자로 몰았고, 이것이 첫 도전에서 애덤즈에게 패했던 원인이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제퍼슨을 곤경에 빠뜨린 것이다. 제퍼슨을 반기독교주의자로 공격한 종교계에 대해 제퍼슨은 매우 민감하게 이를 부정하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그 이후 페인이 겪은 부당한 대우나 테러도 모두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이성의 시대”가 페인을 고난에 빠뜨린 것이다.

워싱턴, 애덤즈, 제퍼슨은 미국의 건국신적인 인물들이지만 진정한 민주주의와 신의, 정직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단지 권력을 위해 동지를 저버렸고, 권력을 위해 종교에 굴복한 인물들이다. 혹자는 제퍼슨이 신교자유법(버지니아 종교자유령)을 제정하여 정교분리를 시도했으니 비판대상에서 제외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것이 그가 종교에 굴복하였다는 사실을 만회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신교 자유법의 내용이 그다지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며 효과도 미미했다. 다만 미국인들이 그들의 특기인 부풀리기로 엄청난 광고를 해댔을 뿐이다. 지폐에 얼굴이 새겨지고,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그들의 소위 민주정신이 가르쳐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위선에 대해 무지하거나, 외면하고 무시하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1900년대 초까지도 배후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종교를 극복하지 못한 그들을 어찌 진정한 민주주의자라 할 것인가?

토마스 페인과 체 게바라는 유사한 점이 많다. 둘 다 생각한 바에 따라 행동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그렇고, 자신의 가치관에 대해 너무나 순수하고 과격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현실에 만족하거나 타협하지 않았으며,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사상을 견지하고 이를 선동하였기에 동지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또 말로가 비참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추구했던 억압에 대한 도전정신, 용기, 일관된 인간사랑은 이제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들이 자신의 철학을 구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너무나 요령이 없었다는 점이 우리 범인들로서는 부담이 가긴 하지만 말이다.

체 게바라는 이미 재평가되고 있지만, 토마스 페인은?

아직도 미국의 학생들은 자기나라의 독립에 끼친 토마스 페인의 영향을 별로 모르고, 대학에 가서야 이름을 아는 경우도 많다. 미국이란 나라가 원래부터 과대포장된 가치를 우려먹으며 유지되어 왔기에 미국인들은 진실을 접해도 그것을 수용할 역량이나 양심은 대체로 없는 편이다. 존 웨인에 물들은 미국인들이 초기 마카로니 웨스턴에 대해 행했던 짓거리들을 보라. 개봉관을 불지르고 제작사와 제작진에 협박전화를 한 그들, 무식한 서부총잡이들을 유럽의 기사처럼 변모시켜 놓고서 자위해왔던 그들에게 프랑코 네로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달가울 리 없었다. 베트남전으로 인한 가치관의 변화만 아니었으면 이스트우드가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아마 벌써 테러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토마스 페인은 영국에서 높게 평가되었다. 사후에 수많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페인의 저서는 몰래, 그러나 널리 돌려지고 읽혀졌다. 지금도 군주제를 반대하는 영국인들에게 페인은 민주주의의 지표로 받들어지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인들이 나폴레옹을 높게 떠받드는 것은 옛날의 영화에 대한 향수일 뿐이지 나폴레옹의 인간성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나폴레옹이 사심을 가진 것에 비하여 페인은 아무런 이해타산도 가지지 않은 순수한 혁명가로 추앙되고 있다.
하지만 초강대국 미국에게는 아직도 토마스 페인의 사상이 위험하다. 미국적 가치의 표상인 러쉬모어 산정의 주인공들을 깎아내려야 하고 이것은 큰 혼란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팀 버튼이 ‘화성침공’을 제작하고 난 뒤에 가진 인터뷰에서 ‘당신이 만약 화성인이라면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광선총으로 러쉬모어를 분해해버리고 싶다고 했다든가? 기자는 대통령(잭 니콜슨 분)을 분해하고 싶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1, 2, 3대 대통령과 링컨, 루즈벨트가 위대한 민주주의의 구현자이자 수호자인 줄로만 알고 있다가 그들이 여느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이 권력추구를 위해 협잡과 배신을 저지른 것을 미국인들이 똑똑히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여간 토마스 페인은 빨리 재평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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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기억을 짜내어 글 완성하고 보니, 버트런드 러셀이 쓴 토마스 페인의 전기에 판박이가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원하는 분은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중에서 ‘토마스 페인의 운명’을 참조하시길...

P.S 부시가 그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911테러를 막지 못했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음모론적으로는 오히려 911사건을 방치 내지는 조장했다는 설이 사건 발생직후부터 대두되었습니다. 막연한 정보만 가지고 어떤 액션을 취함으로써 미국의 항공망을 마비시킬 수는 없었다고 변명하였지만 민주당 진영은 ‘그럼 그렇게 막연한 정보로 빈라덴을 어떻게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고 응수했군요.

이렇듯 만사를 아전인수식으로 해결하는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현실이 웃깁니다. 깡패국가일 뿐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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