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퀴나스의 비의도적인 삽질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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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6:33
아퀴나스의 비의도적인 삽질
작성일: 2002/03/25
작성자: 몰러
‘철학자적 신학자’, ‘천사 같은 학자’로 불리워지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끄회 수도사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문하에서 공부한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영향을 존중할 만한 것으로 만들었고, 궁극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방인이면서도 성인과 동등하게 추앙 받고 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 때문에 연옥이라는 개념이 생겨나지 않았나 싶다. 하여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아퀴나스는 모든 분야의 지식을 하나의 완벽한 체제로 구성하려고 하였다.
아퀴나스의 중요한 두 개의 저술은 “이교도를 논박하는 대전”과 “신학대전”인데, 여기에서 그는 충분한 체계에 손을 대었고 그것은 나중에 교회의 공인된 철학이 되었다. 그의 체계의 핵심에는 “자연신학”과 “계시신학”간의 구분이 있었다. 자연신학은 이성의 활동과 감각 경험으로부터 나오며, 후자는 신앙과 신적인 우아함과 성경으로부터 온다. 스타일이 다른 두 신학은 “신에 대한 이해”라는 동일한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퀴나스가 분리된 영역이라고 본 것이 지닌 중복성 때문에 나중에는 그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문제가 발생했고 이것은 그의 후배들(스콜라주의자)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가 되고 말았다. 아퀴나스는 무의식중에 그의 체계주의로써 신과 세계, 지식과 실재, 신앙과 이성의 확립된 동일성이라는 바위에 균열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윌리엄 오브 오캄은 이 균열에 쐐기를 박았고,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은 물을 부었으며, 결국 이후의 철학자들이 서로 논박을 하는 도중에 몇 사람이 해머로 내려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퀴나스의 철학사적 의의와 영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는 동일성에서 시작하였으나, 아퀴나스가 이성으로도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한 다음, 스콜라파들이 장황하게 이를 논증하기 시작했고, 결국 결론이 나지 않는 가운데 오캄에 의해 완전히 분리되고 말았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아퀴나스가 시도한 신의 존재증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그 전에 아퀴나스가 허접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깨버린 것도 기억하자. 이 존재론적 증명은 아직도 개독먹사들에 의해서 제기되는 아주 웃기는 논리이다.
안셀무스의 증명
“신은 가장 위대한 사유의 대상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것과 아주 똑같은 그 밖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보다 위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보다 위대한 어떤 것, 즉 ‘존재하는’ 하나의 신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보다 위대한 신에 대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까닭에, 신 자체는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경을 경우에는 더욱 위대한 것을 우리가 상상하게 될 터이므로, 그러니까 신은 존재한다.”
아퀴나스의 반박
“일단 더 이상 위대한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생각을 일반화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의 본질에 대한 지식은 인간 이성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는 것이며, 그 대신에 감각경험에 의존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증명은 개념에서 존재로, 관념에서 사실로 비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퀴나스의 반박을 조금 더 쉽게 표현하면 우리가 유니콘이나 청룡과 여의주를 상상하지만 그것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란 말과 같다.
작금의 개독들은 아퀴나스의 반박의 배경도 모르고 목적도 모른 체 악용한다. 신의 본질은 이성보다 감각 경험에 의존한다는 말을 완전히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꾸었거나 환각/환청을 감각경험이라고 우기면서 하나님을 영접했다고 씨부리고 있는 것이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사기꾼들의 수금잔치인 각종 부흥회장에서 개지랄하는 약장수와 무면허 의사들의 대갈통에 벼락이 내리기를 신께 기도한다. 쓰바.
아퀴나스는 논리와 이성으로써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삽질과 되삽질을 함께 적는다.
1. 변화로부터의 증명 : 변화는 어디에서나 이루어진다. 누군가가 그런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Unmoved Mover와 같은 신이 존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먼저 부동의 동자(절대적 기준/원점을 가진 존재로서 법칙부여자인 셈인데, 실은 여기부터 문제가 생긴다.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이 괜히 나왔나? 세상은 가만히 있고 신이 뺑이치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어찌되었든 일단은 인정하고 넘어가자)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라는 것은 질료(예를 들어 대리석)와 형상(설계도, 회화 따위)이 합쳐진 것(대리석으로 된 다비드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변화는 실체의 현실태와 잠세태의 차이라고 하며, 실체는 그 안에 현실적인 것이 될 성질들을 잠재적으로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예를 들어 휘발유는 가연성을 지녔다고 할 때, 휘발유가 탈 수 있는 잠재성이 휘발유에 내재하고 있지만 그 잠재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성냥이 필요하다는 것처럼... 정리하면, 변화(휘발유가 불에 탐)를 일으키는 요인(성냥에 불을 붙여 휘발유에 던진 사람)이 바로 인과관계 부여자이다.
이 인과성 이론을 확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네 가지의 원인을 들고 있다. 예를 들어 절벽 위에 있다가 떨어지는 돌로써 설명하면, 돌 자체(→질료인), 돌이 있는 땅과 절벽의 형세(→형상인), 돌을 미는 것(→운동인), 돌이 낮은 곳으로 가려는 성질(중력과는 다른 개념이다) 또는 돌을 밀려는 욕망(→목적인)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목적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갈릴레이가 등장할 때까지 물리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상이었다.
현대의 인과관계 해석은 운동인만 고려되고 있다. 목적인은 목적이라는 개념 속에 그리고 궁극적인 목적이나 목적론과 관련된 해석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는 궁극적인 목적인은 부동의 동자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부동의 동자를 신 또는 하나님이라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아직도 몰러가 뭔소리를 하려는지 파악이 안 되는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아퀴나스는 먼저, 부동의 동자 이외의 인과관계 부여자(또는 변화 유발자)를 무시하고 있으며, 변화는 인과관계 부여자의 행동에 따라 생긴 것이지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님을 잊은 것이다. 결국 아퀴나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와 같은 신은 다음에 다룰 제1원인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다. 아퀴나스의 부동의 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부동의 동자와는 그 성격이 분명히 다르다.
한편, 다른 방법으로 반박해 보자. 원자 내에서 일어나는 개별 양자들의 변화는 누가(또는 무엇이) 어떻게 일으키는가? 확정되지 않는 양자들의 변화(움직임)에 의해 어떻게 원자/분자가 형성되고 생물이 형성되고 우주선이 형성되는가? 즉 누가 어떻게 질서 있도록 변화시켰느냐는 말이다. 여기에서 기독교인들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그랬다고 답변할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양자론을 이해하지 못하니 저런 대답만 나올 수밖에 없다.
정리하자. “변화요인이 없어도 변화하는 것이 있다. 이런 변화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는 구경꾼일 뿐이며 아무 것도 행사하지 못한다. 즉 Unmover가 되어버린다.”
2. 인과관계로부터의 증명 : 누가 원인을 일으키는가? 스스로는 인과에 얽매이지 않는 “제1원인”이 있는가? 나는 있다고 본다.
위 말은 이 세상 만물과 모든 현상에는 모두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계속 캐어 들어가면 최초의 원인에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최초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신이라는 주장이다.
우선 쉽게 반박하자면 버트런드 러셀이 말한 대로 모든 것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에게도 원인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하나님)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다른 것도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최초원인 또는 시초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필연성이 없다.
반대로 절대 있을 수는 없지만 최초원인이 있다고 치자. 그 최초원인은 이 세상 안에 있는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차원, 우주, 시공간 등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최초원인이 존재하는 곳은 표현할 수가 없으므로 편의상 “세상”이라고 하였다.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세상을 공유하거나 같은 세상에 존재한다는 뜻이고 바깥은 우리와 다른 세상에 있으면서 우리 세상의 원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또 최초원인은 형상인가? 움직임인가? 의지인가? 존재인가? 존재라고 한다면 actor 또는 controller인가? 아니면 bystander인가?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답할 수 없다. 어떻게 답을 하더라도 “최초원인”은 그 이전 다른 원인의 내포를 부정하지 못하므로 모순이 되고 만다.
반박 같지 않은 반박 같지만 더 간단하고 가장 유용한 것은 이것이다.
“그 최초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증거 있어?”
3. 우연성으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자연에 있어서 우연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짐작한다. 우연성을 뛰어 넘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라고...
먼저 언급해야될 것이 있다. 이 세상은 예정된 수순에 따라 흘러가는가? 아니면 우연의 종합인가? 아퀴나스는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을 이끌어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자체에 지닌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있는 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자연 또는 세상의 우연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우연을 조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고 해 버리면, “조정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우연이 아니게 되며, 곧 필연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아퀴나스의 논증은 우연성이란 것 자체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수정이 되어야 한다.
“자연은 우연성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은 절대적 존재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뉴턴, 라이프니쯔, 데카르트가 등장하면서 자연법칙론으로 발전한다. 태양계만 하더라도 일정한 중력의 법칙 등에 따라 행성들이 운행하고 있음을 볼 때, 이 세상은 모두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확장하면 절대적 존재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으며 과학이 발전하면 세세한 모든 운동에 대하여 설명이 가능해지고 종국에는 절대적 존재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였다. 뉴턴이 호언장담했던 예정설을 기독교는 이렇게 잘도 우려먹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게 우겨대다가도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증거가 나오면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인간의 대체적인 속성이다. 기독교는 그러한 인간속성의 전형을 보여준다. 절대적 진리라고? 천동설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한 것은 인간이 저지른 한 때의 실수였다고?
200년 넘게 세상을 지배한 칼테지안-뉴터니안(데카르트적이고 뉴턴적인) 패러다임은 원자의 구조와 운동을 설명하는 단계에 이르러 붕괴하게 된다. 불확정성의 원리, 양자론 등은 최초발견자가 의도하지 않은 가운데 발견된 것이다(양자론의 기초 개념을 발견한 플랑크는 자신의 발견을 거부했다). 세상은 절대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 종합되어 그 결과가 통계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이 혁신적 개념은 활활 타오르던 예정설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파악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는 명제에서 파생된 불확정성의 원리는 뉴턴을 박물관으로 보낼뻔 했다. 하지만 뉴턴의 바탕 없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론도 설 수 없기에, 그리고 실생활에서는 훨씬 유용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뉴턴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뉴턴의 법칙들은 v가 C에 비해 턱없이 작고, 또 우리가 임의로 기준을 잡을 수 있을 때만 유용하다는 점을 명심하자.
잠시 옆으로 샜다. 하여간 이 세상은 총체적으로는 여전히 우연하게 움직이고 있다. 총체적 우연을 뛰어 넘는 절대적 존재, 즉 The Controller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여전히 자연법칙이란 것은 존재한다. 하지만 법칙이 존재한다고 해서 법칙부여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법칙은 자연이 움직이는 방법을 표현한 것이지 자연이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결국 법칙부여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오류되겠다.
아래 제 5항과 중복되는 반박이지만 우연성을 넘는 존재란 법칙부여자라고 우기는 종자들 때문에 여기서도 언급할 수밖에 없다.
4. 우월성의 정도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자연에 우월성의 정도가 있음을 안다. 이런 생각은 완전성의 개념을 함축하는데, 이 개념은 차례로 우리가 완전한 존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스스로 뭉개버렸던 존재론적 증명과 제1원인론의 방법을 짬뽕하여 답습한 것이다. 자연 자체는 우월하다거나 열등함을 따질 대상이 아니므로 자연에 우월성이 있다는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되지만 일단 그렇다고 쳐도 여기에서 완전성의 개념을 도출하는 것은 억지되겠다. 그냥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라고 우기는 것이 차라리 귀엽기나 하다.
또 완전한 존재가 있다고 쳐주자. 그래도 하나님(야훼)이 그 완전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5. 조화로부터의 증명 : 우리는 어디에서나 적응과 일치가 있음을 보게 된다. 물고기는 헤엄을 쳐야 하기 때문에 지느러미와 꼬리가 있으며, 개는 뼈다귀를 갉아먹어야 하기 때문에 억센 이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순전한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계획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지지한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창조주의를 주장할 때의 바탕이 되기도 하는 증명법이다. 목적론과 의장론이 믹싱된 이 주장은 당시의 과학적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한번쯤 생각해 봄직한 것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저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콧구멍이 아래쪽을 향한 이유는 비가 들이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진술이 이 사람들에게는 개그가 아닌 모양이다. 코의 모양은 안경을 걸치기 좋게, 귀의 모양은 헤드폰 끼기에 좋게 만들어졌다고 주장할 인간들이다.
적응과 일치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쩌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적응이라는 것은 우연이나 계획을 따질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또 양보해서 적응이 목적(계획)의 증거라 치자.
그럼 계획자가 하나님이란 증거는 없다는 유치한 반박부터 시작하자.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불안하다. 적응과 일치보다는 결함이 더 많은 세상이다.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 않는가? 죄 많은 세상에서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독교인들이여, 하나님이 계획자가 아니라고 인정하겠는가? 아니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인정하겠는가? 둘 다 인정할 수 없다면 기독교인들은 나찌를 인정하는 것이며,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며, 골수 KKK단 단원이 될 소질이 있는 것이다.
(방금 몰러는 덤으로 도덕론까지 까댔다. 헐~)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자. 적응이 계획의 결과라면, 그럼 부적응은 계획의 실패인가? 아니면 부적응 자체가 계획이었는가?
말장난으로 들리는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라.
이 조화로부터의 증명은 바로 다른 증명들을 부정하는 것이란 말이다. 위에서처럼 몰러가 뺑이치는 일이 없이 이 항목에 대한 반박과 부정만으로도 아퀴나스의 다른 증명들을 부정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다. Unmoved Mover는 없었고, 제1원인은 이후에 삑싸리만 거듭했으며, 절대적 존재는 우연성을 뛰어넘지 못했으며, 절대 우월한 완전한 존재도 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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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아퀴나스는 이교도(그리고 무신론자)들을 잠시 논박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잠재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체계주의는 믿음과 이성의 동일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만듦으로써 그가 이룩하고자 했던 신학과 철학의 결합(실재로는 철학이 신학에 종속)을 오히려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을 직시한다면 교황청은 아퀴나스에게 부여한 성인의 지위를 박탈하여야 할 것이다.
개독들은 아퀴나스를 곧잘 인용하면서도, 이런 류의 반박이 제기되면 “아퀴나스는 가톨릭의 개”라고 하며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모른체 한다. 씨방새들~
그럼에도 몰러가 불가지론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퀴나스의 증명을 부정했다고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몰러에게는 여전히 신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야훼가 신인지 신이 아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야훼는 창조주가 아니며, 절대적 기준으로서의 존재도 아니고, 전지전능하지도 않으며, 절대선이나 절대악도 아니다. 그냥 유대인들이 원했던 신의 모습일 뿐이며, 시행착오를 당연하다는 듯이 일삼는(그가 창조주라면 피조물을 엄청 조뺑이치게 만드는) 아주 허접스런 존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