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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벌 도배] 교회와 기독교인은 잘못할 수 있어도 성경과 기독교는 잘못할 수 없다고?
몰러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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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6:14
[리바이벌 도배] 교회와 기독교인은 잘못할 수 있어도 성경과 기독교는 잘못할 수 없다고?
작성일: 2002/02/20
작성자: 몰러
기독교 비평 FAQ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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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안티들은 왜 성경을 비판하죠? 잘못을 저지르는 기독교인만을 비판해야지 기독교 전체가 나쁜 것인 양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 아닙니까?
A5. 기독교인과 안티의 문제인식이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보실까요?
*안티들의 문제인식*
1) 기독교는 역사와 우리나라의 작금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이기적 독단성과 배타성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 바이블은 그 내용이 애매모호할 뿐더러 절대진리로서 여겨져 얼마든지 이기적, 배타적, 독단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쓰일 수 있다. 이는 배타적 전도 행위, 전통 문화 부정, 타종교 비방 등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3) 개신교 일부 진보 교단과 천주교가 독단성과 배타성을 접고 적극적으로 띄지는 않으니 이는 지도급 인사들의 바른 의식과 나름대로의 통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4) 그러나 개신교단은 목회자의 파워가 강력하여 이들의 행동을 통제할 시스템이 없다.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절대진리 바이블로 정당화된 행위이니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애매모호한 바이블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여 이를 얼마든지 정당화 시킬 수 있고 이러한 사태를 견제할 시스템이 없으므로 집단 이기주의와 배타적 행위가 나타나는 것이다.
5) 기독교 내부의 자체정화를 믿을 수 없다. 개신교단의 주류가 돈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세한 진보 교단이나 완전히 다른 길을 가는 천주교가 이들을 견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자를 비롯한 온건한 안티들의 해결책*
1) 기독교의 온갖 문제들의 가장 큰 원흉은 바이블을 절대성이므로 이를 무너뜨리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2) 바이블의 절대성을 깨뜨리고자 함은 결코 기독교의 신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이블에 대한 기존의 폐쇄적 입장을 버리게 하고 열린 해석적 지평을 수립하기 위함일 뿐이다.
예를 들어, 도올 김용옥씨가 도덕경과 논어를 해석하여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풀이해 주는 것에 대해 학문적인 비판은 열려 있어야 한다. 도올의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올도 자기의 해석이 옳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의 해석이라고 할 뿐이다. ( 이런 의미에서 도올의 해석이 틀렸다고 비판하는 사람은 바보다. )
유가, 도가의 경전에 여러 사람들의 주석과 해석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을 그 경전을 통해 다각도로 바라볼 수 있게 할 수 있다. 하나의 주석, 해석만을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것을 참고하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바이블의 경우는 다르다. 자신이 해석한 것은 "옳은", "바른" 해석이고 남이 해석한 것은 "그릇된" 또는 "변질된" 해석이다.(남의 해석은 사탄의 계략이라고 몰아 붙이거나 신앙심이 부족하다는 말도 거침없이 한다.) 바이블의 해석에 따라 교단이 분열하고 같은 교단 내에서는 목회자의 해석이 하나의 도그마로서 자리매김한다. 이와 같은 폐쇄되고 경직된 바이블의 해석과 비평은 기독교의 총체적인 모순을 자초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인터넷 등을 통해 반기독교 운동을 확산시키고 거대화된 교회 권력과 대항할 수 있는 힘을 키운다.
4) 배타성, 독단성과 연결될 수 있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그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한다.
5)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만행, 망언 사례를 네티즌들에게 적극 홍보하고 이에 대한 심각성을 부각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좋은 분들도 있다는 것은 안티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기독교인들의 행위와 생각은 기독교의 교리와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좋은 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제까지의 기독교인들의 만행을 감출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들고 어이가 없는 짓을 하게 만드는 기독교만의 교리와 체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바로“예수천당 불신지옥”과 “원죄론”, “예수의 대속사상", 바이블의 절대성 등이 그것들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잘 생각해 봅시다. 이것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의 주류인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은 이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은 당연히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전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릴 입장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는 일보다 더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공장소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목적이 너무 크면 잘못된 수단도 종종 인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배를 훔치는 일을 생각해 보면 잘 이해가 갈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공공장소에서의 에티켓보다는 타인이 지옥에 가는 것을 막는 커다란 목적이 중시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타인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막는 일은 당연히 가난한 자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병든 자를 돌보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어떠한 수단을 쓰건 정당화될 수 있을 만큼 큰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믿는 사람들이 남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사실 잘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은 그들의 신념에 있지, 그들에 있지 않습니다. 단군상의 목을 자른 목사는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개신교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막기 위해 그들은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바이블의 절대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이제까지 바이블의 해석차이는 많은 이단과 분열을 낳아 왔습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에게 착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에게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한 쪽도 맞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신이 옳음을 증명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사람은 공존이 가능할까요? 과연 공존이 가능한지를 단순하게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서로의 머리 속에 자기 의견을 집어 넣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이 떠오릅니다.
공존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단의 분열은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분열과 배타 이외에 다른 결과를 예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분열과 배타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바이블의 절대진리성입니다. 바이블을 근거로 이단을 규정하는 개신교단들, 바른 복음을 믿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단 판정을 받은 이단 종파들 모두의 공통점은 바이블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술되었으므로 일점 일획의 오류도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바른 복음과 옳은 교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생각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잘못될 수는 있다고 생각해도 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옳은 교리”와 “바른 복음”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틀렸다”라고 하거나 “이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모든 배타와 독선은 바이블에 절대성을 두고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 받았다는 오만함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보겠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하겠습니까?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기독교인들의 신념이 되어야 합니까?
안티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아니라 바이블의 절대성과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원인을 도외시하고 결과만을 비판하는 것은 미봉책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