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혼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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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예수 혼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몰러 0 1,646 2005.06.20 15:19
예수 혼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작성일: 2002/01/02
작성자: 몰러 




"예수의 사상은 사실 별로 대단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진술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지난 2000여 년간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예수의 영향은 엄청났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에 의해, 그리고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변질된 신의 정의(형상과 의미)는 기독교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4복음서에서 예수의 행적(정확하게 말해서 행적만이)이 일치되는 부분은 사실이라고 간주하고 이야기를 전개해야 할 것이다. 전개도중 나오는 자가당착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무조건적인 부정보다 이러한 귀납적 반증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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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사상과 이를 발전시킨 사람들

2000년 전 그 당시의 철학에는 직접 기록되지 않았으나 오히려 분명한 여파를 미친 중요한 사건은 기독교의 등장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던 목사(목자), 동정녀, 그리고 당나귀가 최초의 구성요소였다. 시대적으로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이집트 노예시대나 바빌론 유수처럼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존재(구세주)가 필요했으며, 구체적인 시기가 언급되지 않기는 했지만 그 존재의 출현은 그들의 경전에 예언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을 설파하였다. 분명히 기독교는 유대신화, 모세, 우화, 율법의 개정 또는 완성, 죽음과 부활 등 유대 경전에 예언된 요소를 두루 갖추긴 했지만, 이러한 신화적 철학의 면면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바라던 방식이 구현된 것은 아니었다. 이분법적인 시각을 벗어나서 보면 예수의 사상은 당시에 발현되었던 수많은 교파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철학과는 달리 대체로 유대사상의 지류(기독교 포함)들은 그 본류인 하느님이라는 해답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독교는 유대교 외에도 많은 경쟁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시스의 숭배, 미트라교(Mithraism), 관제 하느님, 오르페우스의 신비, 탐무즈/발드르/오시리스 숭배 등등이 그런 것이었다. 이 다양한 신앙과 신화적 철학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혼합되고, 흡수하는 등 도무지 독립적인 것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각각의 민족/국가에 맞는 형식과 주안점이 각각의 전면에서 그러한 혼합을 덮어 보이지 않게 하였다. 결국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많은 종교적 숭배들은 없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편 기독교는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계속해서 뻗어나갔다. 기독교가 없어지거나 그저 하나의 유대적 종파에 머물지 않도록 구출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그리스 철학과 결합시켰으며, 매력이 있는 공식을 갖고 등장하였다.

사도 바울과 예수의 제자(11제자)들 사이는 그리 평탄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상대를 깎아 내리기도 하였다. 로마 시민권자이며, 율법학자(?)이며, 그리스 철학에 정통(?)하여 엘리트 의식이 팽배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제자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았다.(사람을 낚는 어부 운운하지 말라. 그래봐야 베드로 형제의 무식이 만회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바울과 비교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없는 것을 제자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직접 모셨고,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며, 직접 예수의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반면 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던 중에 겪은 조우(오랜 사막여행에서 겪을 수 있는 환상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함) 이외에는 예수와 하등의 연관이 없었다. 예수와의 조우는 사실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의 해석이 베드로를 수장으로 하는 제자들과는 약간 다른 공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의 골은 메워지지 않았다. 현재까지도...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예수의 사상을 주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예수의 사상이 바리사이파의 형식적인 경건함, 위선, 타락을 깨기 위한 것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자위적 해석을 걷어내고, 또 유대민족만이 아닌 범민족적 사랑과 은혜를 주창했다는 다소 억지 섞인 단편적인 주장을 보류하고서 살펴보면, 간단하게 말해서 예수가 메시아냐 아니냐의 문제로 귀착이 될 것이다. 일부 유대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현인으로 인정하고는 있지만 하여간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ㅇ 유대율법과 관련한 것을 제외하면 예수의 사상들은 유대보다 오히려 동양(특히 인도)의 그것과 닮아 있다. 특히 산상수훈은 법화경에서 부처가 말한 자비와 너무나 유사하다.
ㅇ 예수 행적의 상당부분은 부처와 닮아있다. 1달 이상의 단식후 악마의 시험을 받았다든지, 12명의 제자를 둔 것이라든지, 물을 걸어서 건너는 기적과 제자의 실족 및 다시 걸음, 몇개의 음식을 가지고 수백, 수천 명을 먹인 기적 등... 물론 알려지지 않은 예수의 생애인 13세에서 30세까지 17년간 인도지역에서 수학을 했을 수도 있고, 당시 이집트까지 퍼져있던 불교 및 힌두교의 교의를 예수가 배웠을 수도 있지만, 둘의 몇가지 유사성은 부인할 수 없다.
ㅇ 당시의 유대 레지스탕스들의 노선과는 확연하게 다른 길을 걸은 예수 대신에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했다.(나중에 바라바가 로마군에게 다시 붙잡혀 사형당했을 때 회개하여 예수에게 귀의하였다는 주장은 조작이다. 안소니 퀸이 주연한 무슨 영화더라? 하여간 조작이다.). 이 선택은 유대인들이 예수에게서 어떠한 메시아적 요소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 생전에 그의 탄생설화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대부분 예수 사후에 제자들에 의해서 경전이 왜곡 인용된 것일 뿐이다. (마태복음의 어떠한 예언성취 주장도 예언에 해당하는 사항이 전혀 없다.)
ㅇ 간혹 기독교인들이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였다고 주장하며 인용하는 Scene들은 사실 그러하지가 않다. 그들이 말문이 막힌 것은 예수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주장을 반박증명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반증을 못한다는 것이 바로 긍정/인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들조차도 예수의 실존이나 신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바울의 서신들을 잘 분석해보면 그는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전혀 다른 예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예수는 당시 널리 퍼져있던 다른 수많은 예수들과 그리스 철학의 조합이었고, 형식과 내용이 수많은 예수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바울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논문과, 예수의 실존에 회의를 표명한 “예수를 찾아서”라는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의 신성, 메시아적 요소는 부정되었고, 그의 실존은 의심을 받고 있지만 이러한 회의를 잠시 접어두고, 그의 사상 자체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일부의 석학들과 위인들이 인정/인식하는 예수의 중심사상은 인간에 대한 애정과 절대적인 사랑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보는 예수사상의 중심은 결국 유대적인 것이다. 심판과 구원, 그리고 하느님 나라(또는 하늘 나라)의 구현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성경을 잘 읽어보시라. 산상수훈과 여러 이적들은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예수에게 부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을 뿐이며. 궁극적으로 예수가 주장한 것은 재차 강조하지만 자신의 재림과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었다. 신약 27편중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사랑보다는 재림과 종말이 더 자주 언급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과 자비는커녕 예수와 세례요한이 줄곧 주장하였고, 또한 바울까지도 언급하였으며, 백 수십년 또는 200년 이후에 작성된 요한계시록에서 강조되었던 종말과 하느님 나라는 결국 성취되지 않았다.

일부 다원주의적 신학자와 교인들은 예수가 종말론적이지 않으며, 또한 르네상스보다 1500년 빠르게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의 전환을 꾀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의적 또는 자위적인 해석이다. 즉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예수를 보려는 것일 뿐이다. 예수는 스스로, 그리고 추종자들에 의해 신성을 부여받았고 심지어 사후에는 신 자체가 되었다. 원죄의 대속과 또한 종말의 시기에 행해질 인류구원이 인본주의일 수 없느냐고 강변하고 있지만, 사실 둘 다 신의 의지와 예정일 뿐 인본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한계이다.

한편 겟세마니 동산에 기도하러 가기 전 제자들에게 한 말과 동산에서의 기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죽기 직전에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친 것은 자신의 신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증거일 뿐 아니라 인류구원자/대속자로서의 위상에 맞지 않는 말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과 숭고한 생의 목적을 알면서도 잠깐이나마 회피하기를 기도했던 예수에게서 인간적인 번민을 느꼈다면 예수의 신성은 당연히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둘 다 취하려고 하니 이 얼마나 넌센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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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기독교 사상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어떤 역사적 찬스를 잡아서 로마의 국교가 되었는지, 그리고 중세까지 이어져온 과정은 생략하기로 한다. 여러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기독교를 발전시킨(바꿔서 말하면 기독교를 그럴듯하게 만들어준) 철학적 추가요소들을 언급하겠다. 사실 이것도 전에 언급한 적이 있다.

먼저 바울부터 아우구스티누스까지 이어진 플라톤주의적 요소를 살펴보자.
아무래도 그 시작은 알렉산드리아 사람 필론에서부터일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시대(25BC - 50AD)의 사람이었으며 정통적인 유대교인이었다. 그는 철학이 어떻게 보다 높은 존재인 하느님을 위한 정신을 준비해왔는지 보여준다. 그는 기본적으로 플라톤주의자로서, 플라톤의 추상적 보편자를 신으로 전환시켰다. 이것은 하나의 전례가 되어, 철학은 점차 형이상학적으로 되어갔으며, 과학이나 정치, 심지어 윤리학보다는 영혼의 구조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종교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로마제국의 분열과 뭔가 관계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의 합리주의와 유대적 기독교의 사상을 결합하는 일은 대유행이 되었고, 순수철학은 점점 더 희석되었다. 영원한 이데아들의 세계에 하느님의 영원한 말씀이 삽입된 것은 인류정신사에 있어서 분명 불행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약간 삐딱해 보이는 오리게네스이다. 그는, 히브리 사람들이 출애굽 당시에 이집트인들에게서 보물들을 빼앗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철학을 남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보다 높은 지성적 세계의 단순한 반영으로서의 감각계라는 플라톤의 개념은 기독교 사상과 일치한다고 보았다. 다른 기독교적 플라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상징주의자들의 비유라고 해석하였다(이 점이 말보회나 다른 꼴통 근본주의자들이 오리겐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사람으로 확정짓는 이유다). 그가 이해하기 곤란했던 점은 경전이 문자그대로의 뜻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혼문제를 언급한 마태복음 19장에서 예수의 이혼관과 모세의 이혼관이 일치하지 않아서 혼란이 생긴 제자들이 예수에게 “편법으로서” 독신생활은 어떤지 묻자, 예수는 모태로부터 또는 타인에 의해서 고자가 된 사람도 있고, 천국의 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였는데, 오리게네스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점은 정말 아리송한 일이다.

플로티누스는 진기하기 이를데 없는 플라톤주의자였다. 가장 내세적인 철학자였던 그는 플라톤의 사회적, 정치적 사상을 무시하고 철학 그 자체를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계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성삼위일체(남자, 여자, 침대가 아니다. ㅋㅋㅋㅋ)의 개념이었다. 성삼위일체란 다음과 같다.
ㅇ 일자(一者) : 신을 말하며, 태양이 빛을 발하듯이 힘을 유출하는 추상적인 신적 존재를 말한다.
ㅇ 누스(정신) : 위로는 자신의 영생의 원형인 일자를 쳐다보고, 아래로는 다른 모든 사물을 내려다본다.
ㅇ 영혼 : 누스와 누스를 통하여 신의 이데아를 명상하기 위해 위를 쳐다보는 인간의 영혼이다. 영혼은 신체를 내려다본다.

영혼 밑에는 물질과 자연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일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무정형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들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최고의 지성적 업적은 스스로 배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 기독교는 암브로시우스(교회의 위상 강화), 제롬(벌게이트 성경 번역, 수도원 설립 주장), 아우구스티누스(원죄론 강화, 교회무류설, 신의 영원성 및 자존성 주장), 그레고리우스 이렇게 네 사람의 교부들에 의해서 교리의 권위가 아닌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었다.
(예전에 이 교부들에 대해서 올린 글이 있으니 검색하시어 참조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말씀보존학회를 언급해야겠습니다. 펜사콜라 성경신학원을 위시한 KJV채택자들은 일찌기 이러한 기독교의 신학적/철학적 헛점을 피하기 위하여 중세적인 것들을 모두 거부할 수 있는 방편을 찾게 되었고, 그 결과는 헨리 8세의 부부싸움과 이혼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국제적 마찰과 교황권에 대한신학적 독립을 의도로 시작하여 영국이 완전한 사상적 독립을 위해 편찬한 것으로 추정되는 킹 제임스 버전을 채택하고, 교부(특히 어거스틴)/스콜라 철학/라틴어성경 등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과는 늑대 피하다 호랑이 만난 것처럼 더 큰 오류에 빠져들게 되었구요...)

한편 그 이후에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교의가 기독교에 채택되고, 이에 따라 스콜라 철학이 발전하고, 안셀무스가 신의 존재론적 증명을 주장하였으며, 아퀴나스에 이르러 집대성되기에 이른다.
그 후, 스콜라적인 것들은 13세기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 로저 베이컨,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브 오캄 등에 의해서 난도질당하기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검색하시면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편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에는 플라톤적인 기독교와 아리스틀적인 기독교의 갈등, 그리고 웃기지도 않는 경건/엄숙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습니다. 션 코너리가 주연한 영화는 제발 보지 마시길...)

여러번 언급했지만 기독교의 등장과 발전의 이유는 예수의 사상이 특출나다거나, 바울을 위시한 후계자들의 보강이 이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유대주의에서 물려받은 완고하고 편협한 기독교인들의 열정
2. “사후의 생”이라는 보장(미래의 보상)
3. 원시교회에 속하는 기적적인 힘(재앙과 미신에 대한 반동에 의해 도움을 받음)
4. 초기 기독교도들의 순수하고 엄격한 도덕(당시로서는 대단히 특이하였음)
5. 기독교적 공화국 발전에 대한 통일성(니케아 강령 등)과 훈련, 이로 인하여 그것은 로마제국이라는 국가 안에서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됨.
- from 에드워드 기번

이 중에서도 마지막 5번, 정치적 요소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훈족, 고트족, 반달족 등 소위 야만족들의 거대한 집단 이동과 로마의 도덕적, 정치적 부패가 제국의 붕괴를 가져오는 등 주위의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는 동안 교회는 일관된 정책(아리우스파 처단 등)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영화 “글라디에이터”는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비록 상업적인 영화이기는 하지만, 종교적으로 포장된 벤허나 쿼봐디스보다 훨씬 정확한 역사성을 띠고 있다.

P.S : 두어 달 전에 안티들에게 시대적 상황, 역사적 상황을 감안하여 기독교를 비판하라고 하고선, 얼마전에는 신약을 달랑 한번(실재로는 여러 번 읽었을 것으로 판단됨) 읽어보고는 예수(신약)의 중심사상이 “인간”이라고 씨부리는 딸따리스트에게 이 글을 바칩니다. 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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