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인비의 신관

mol.gif ar.gif


몰러님의 칼럼입니다.

토인비의 신관

몰러 0 2,608 2005.06.20 15:18
토인비의 신관    
  
 
 
작성일: 2001/12/29
작성자: 몰러



아놀드 토인비의 신관(神觀)

정말로 오랜만에, 6년 가까이 묵혀둔 책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전에 소사신부와 대화 후에 “토인비와의 대화 - 미래에의 좌표”가 불현듯 읽고 싶어졌습니다. 이 책은 일본 교토 산업대학 와까이즈미 교수와의 대화를 1971년에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대화에서 토인비는 우리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동의를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이 현인의 이야기는 미래의 좌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광범위한 분야였지만 그 중에서 신관, 종교관에 대한 부분을 발췌·요약해서 올립니다.

저는 수천년 동안 수십명의 사람들이 썼다는 성경보다 이 한 권의 책이 더 권위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으므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면, 또 그 속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토인비는 기독 신학자들보다 더 성경의 의미를 잘 알고, 어쩌면 하나님이라는 존재보다 더 지고한 사고를 하였던 분이다. 당신들이야말로 제 1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마시라.

--------------------------------------------------

문)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교수님의 정신적 및 사상적인 편력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수님께서는 특히 청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무엇이 교수님의 인격 형성에 제일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

나는 중류층의 가정에서 중도 성공회파 신교도로 성장했다. 전체 국민 대다수와 비교하면 넉넉한 편에 속하지만 청소년 시절에 가난한 편이라고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종교문제로 돌아가기로 한다.
내가 사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자 제일 먼저 느끼게 된 것은, 내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하나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대 여섯살 때 어머니가 나에게, 그리스도에게 어머니가 있었지만, 인간의 아버지는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을 때, 나는 곧 그 이야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물론 섹스에 대해서 전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인간에게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한테도 아버지가 계셨으니까...
나는 성관계라든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지만, 자연의 획일성에 대해서는 어떤 막연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려면 누구나 다 아버지가 다 필요한데,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으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이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일곱 살쯤 되어서부터, 나는 기독교 이전의 라틴어로 철저히 교육을 받고, 이어서 희랍어와 희랍문학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그리하여 인생에 대한 희랍인들의 태도가 기독교의 전통보다 훨씬 더 강한 영향을 주었다.

그후 대학을 다닐 때에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졌다. 아버지는 자신이 독실한 신자라고 스스로 믿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되자, 그에게 신앙이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고 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일시적이나마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종교는 거짓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나는 한때 반종교적인 인간이 되었다. 대학 시절에 희랍철학과 근대 유럽철학을 배우기 시작하자,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고 종교는 쓸모 없는 환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약 60년 동안 살아오면서 얻은 체험, 특히 고뇌의 최후 - 인간은 오래 살수록 더욱 많은 고뇌를 겪게 마련이다 - 를 통하여 종교가 인생에서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나 유대교, 블교, 힌두교, 회교 등, 다른 조직적인 종교에서 본다면, 나는 1908년과 마찬가지로 1970년에도 여전히 불가지론자이다.. 그 밖의 어느 종교단체에 속하기보다는 퀘이커 교도였더라면 좋았을지는 모르나, 나는 아직도 사실상 어느 종파에도 속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젊은 시절 - 어렸을 때 배운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부는 아니라도 거의 대부분을 씹지 않고 삼켜야 했던 - 보다는 훨씬 참된 의미에서 믿음이 두터워졌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나는 현재 내가 갖고 있는 신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는 우주에서 인간이 정신적인 최고의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주와 그 배후에는 “보다 높은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방금 “보다 높은 존재”라는 애매한 말을 쓰고, “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보다 높은 존재에 대하여는, 많은 견해와 개념들이 있으며, 기독교도와 회교도 및 유대교도가 믿고 있는 ‘인격신’과 같은, 어느 편인가 하면 소박한 신인동형 동성설(神人同型同性說)과는 맞지 않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보다 높은 존재”에 대한 동아시아나 인도적인 견해이다.
내가 이러한 중립적인 말을 쓰는 것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견해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나 인도적인 견해까지도 포함시키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 ‘존재’와 교류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고 살고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이 ‘존재’를 한 사람의 인간이나 또는 복수의 인간, 신이신 그나 신이신 그녀, 또는 한떼의 신들이라고 하는 신인동형 동성적인 형태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내가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이 궁극적이고 정신적인 실재는, 기독교도들의 아버지이신 신, 그 아들이신 신이 아니라, 기독교도의 성령의 비전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불교도의 열반이나 힌두교도의 초인격적인 브라흐마 - 최고의 인격신 브라흐마가 아니라 - 의 비전과 흡사하다.

나는 어떤 인격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직접적인 경험에서 알고 있는 신의 정신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우리는 같은 인간 속에 그리고 인간 이외의 생물 속에, 또한 우리들 자신 속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가 사랑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자기가 올바른 정신적인 방향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거나 죽은 사람이거나 간에 남에게 어떤 적의를 품게 될 때에는 간디를 생각하곤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뉘우치고는,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행동하거나 느끼거나 하기 전에 이 고약한 감정부터 빨리 씻어 내도록 노력한다. 무엇보다도 남에 대한 증오심이나 원한 따위의 그런 감정은 갖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인격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특별한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고약한 어머니를 가졌을 경우에는 물론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어머니는 악하지 않다.
어머니 다음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사귄 사람들 중에서는 나의 첫번째 아내와 두번째 아내, 그리고 첫번째 아내의 부친 길버트 마리(영국의 고전학자)였다. 그리고 직접 내가 만나 본 일은 없으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분의 영향도 받았다. 내가 1969년 봄에 관상동맥 혈전증에 걸렸을 때, 나는 전에 몇 번 읽은 일이 있는 성 프란체스코에 대한 책을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그때 병세가 위독하여 죽느냐 사느냐 하는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때 읽고 싶어했던 책이 곧 무엇이 나에게 영향을 주었나를 입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나에게 아마도 그리스도 이상으로 성 프란체스코의 영향이 더욱 컸음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리스도를 본받았으나, 그리스도 자신은 반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마호멧의 경우처럼 분명한 역사적인 설명이 없다. 성 프란체스코는 마호멧과 매우 다른 인물이다. 나는 마호멧에게도 탄복했지만, 그것은 프란체스코의 경우와는 또 다른 방법과 이유에서였다. 마호멧과 성 프란체스코와의 공통된 점은, 이 두 위대한 정신이 역사를 빛내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기록도 갖고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7세기 하반기 이전에 죽었으나, 그에 대해 쓴 책이나, 좀더 욕심을 부리자면 그 자신이 쓴 책 - 그가 세운 수도원의 규칙과 동포를 위해 신을 찬양한 찬미가(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시)를 통하여 우리는 그와 진실한 개인적인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

------------------------------------------------
------------------------------------------------
다음은 15세된 아들을 잃은 어느 독자의 물음에 답한 것이다.

문) 교수님은 인간이 죽으면 ‘우주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인 존재에 다시 흡수된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각자의 개성은 이런 초인격적인 실재에서 떨어지는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비싼 ‘대가’란 무엇인가?
======================

(전략) 독자의 아들에 대한 애도, 많은 업적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 자신의 행운(장수)에 대한 감사, 이에 대한 보은으로 많은 일을 하겠다. 등등...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인간이건 인간 이외의 생물이건 모두 우주의 일부이며 임시로 자기 이외의 우주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하여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 이외의 우주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대가는 자기 중심이다. 그리고 이 자기 중심성은 욕구와 탐심·경쟁·허욕 그리고 자기 몫을 최대한으로 탈취하려는 사나운 싸움을 낳게 한다. 이 탈취는 분쟁을 일으키고, 분쟁은 범죄적인 폭력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 예로서 내가 체험하게 된 것은 두 번에 걸친 세계의 전쟁과, 저마다 사회의 케이크에서 가장 큰 조각을 빼앗기 위해 아우성치는 오늘의 투쟁이다. 이 투쟁이 오늘날 인플레의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인플레의 압박이 원인이 되어 투쟁을 더욱 심하게 하는 이런 악순환에 빠져 있다. 두 차례의 세계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들이 삶의 대가로 들 수 있는 보기이다.

내가 말하는 ‘우주의 배후에 있는 초인격적인 존재’의 뜻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정공법이 아니라 배후로부터 해명하는 것이 좋겠다.
첫째로 나는 유대교와 기독교·회교 등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은 전능하고 절대적인 선이지만, 한편 인간과 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나로서는 이런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나는 기독교도로서 성장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그러니까 내가 아직 대학생으로 있을 무렵에도 설사 하나님이 존재하였다 치더라도, 그 하나님이 전능하고 또한 절대적인 선일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사악한 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질없이 짐짓 악과 고뇌를 지어내었기 때문에 모든 생물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부도덕이나, 15세라는 젊은 나이의 아드님의 죽음으로써 당신과 아드님이 당하는 괴로움 등 이 모든 것이 그 실례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참으로 절대적인 선이라면 전능한 존재일 수는 없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사악과 고뇌의 원흉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 우리와 같은 무리로서 피해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선이라면 살아 있는 중생들이 당하는 고뇌에 상심한 나머지 이 괴로움을 함께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이 부분은 안티들이 개독들에게 늘상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먹사들은 절때루 신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라는 인물이 되어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믿고 있다. 나는 예수를 존경한다. 그는 그때 도망쳐서 유대나 로마의 권력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일으키는 등 다른 방도를 택할 수 있었는데도, 짐짓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 고민에 충만한 정신적인 노력 끝에 다른 방도를 거부한 것은 숭고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화신이었다는 기독교의 믿음은 갖고 있지 않다. 전능하지만 사악한 하나님이나 전능하지 않지만 선한 하나님의 어느 쪽도 존재한다고 믿지 않고 있다. 나는 도대체 하나님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을 수가 없다. 예수는 석가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간디와 마찬가지로 숭고한 정신을 가진 고귀한 인간이었다고 믿고 있다. 예수는 정통한 유대 율법의 박사였다. 그가 죽음을 당한 것은, 자유롭고 독자적인 견해를 가진 도덕사상가이자 교사이고, 더구나 간디처럼 비폭력을 도덕적인 의무로 믿는 독특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자기의 신조에 대한 성실성을 입증했다.

하나님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 내가, 정말 있다고 믿고 있는 ‘초인간적인 정신적 존재’란 대체 무엇일까? 초인격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서이다. 신이나 또는 신들이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인격적인 것이다. 석가는 어떤 하나님의 존재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초인격적인 정신적인 실재 - 열반의 존재를 믿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개성을 소명시키고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신약 성서에는 예수의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되어 있는 편지가 들어 있다. 그것을 보면 저자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되풀이해서 썼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내가 한 번도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초인간적인 인격은 아니다. 하나님이란 내가 직접 체험한 적이 있는 정신적인 충동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 중에서나 또는 인간 이외의 동물 그리고 일부 새들 중에서, 사랑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 가운데 연약하기는 하지만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껴보았다. 사랑은 생물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하여 그것을 자기의 바깥 저쪽 위로 운반한다는 의미에서 ‘우주에 있어서의 초인격적인 정신적 존재’인 것이다. 사랑은 만일 필요하다면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분명히 전능한 것이 아니다. 만일 전능하다면 우주는 순수한 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우주가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최고의 존재임을 믿을 수 있나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어리석은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실례를 통하여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부끄러울 정도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비참한 자기 자신과는 달리 더 나아지려고 한다.. 이 ‘더욱 나아지려는 것’이 내가 믿고 있는 초인격적인 실재이다.

더 나아지려는 노력 대신 자신의 신을 잡신 수준으로 끌어내리고는 그 신에게 귀의했다고 자랑하면서, 제정신인 사람들을 불쌍하게 보고 우월감에 만취한 인간들이 누구지? 야훼를 개잡신으로 취급한다고 해서 우리한테 뭐라고 하지 마라. 야훼가 개잡신이 된 것은 니네들 때문이니까...



토인비의 주기도문

구세주 탐무즈, 구세주 아도니스, 구세주 오시리스, 구세주 발드르여.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택하신 당신을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Author

Lv.1 지발돈쫌  프렌드
0 (0%)

등록된 서명이 없습니다.

Comment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93 영화 레지던트 이블을 보고 (반말이라고 불만갖지 마셔) 몰러 2005.06.20 2581
192 일부론, 완전한 진리, 후회, 사랑, 기타 뻔한 레파토리. 몰러 2005.06.20 2580
191 개독 3총사가 떳구낭~ 몰러 2005.06.17 2579
190 유명인사의 임종과 기독교 몰러 2005.06.17 2575
189 가축이 병고침을 받아서 뭐하겠니? 몰러 2005.06.20 2575
188 진화론자의 딜레머(창조론자의 억지에 대응할 수가 없다?) 몰러 2005.06.17 2571
187 뉴턴의 운명론과 불확정성의 원리 몰러 2005.06.17 2571
186 끝까지 야훼가 전지전능하다고 개긴다면... 몰러 2005.06.20 2571
185 기도... 잘 합시다. 몰러 2005.06.20 2571
184 Re: 교인의 관점으로 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몰러 2005.06.17 2569
183 창세기를 삐딱하게 보기 몰러 2005.06.20 2569
182 헌법 제20조에 대한 소고 몰러 2005.06.20 2568
181 [펌] 군대 간 사람은 어둠의 자식들 몰러 2005.06.20 2567
180 어이~ 곱... 읽어 봐. 그리고 대답해 봐 몰러 2005.06.20 2566
179 기독교 약사(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동일시 하는 바보들에게) 몰러 2005.06.17 2564
178 국경일 기념식에 임석하지 않는 대통령 몰러 2005.06.20 2559
177 고통과 신의 의도에 대한 허접한 생각(존칭 생략) 몰러 2005.06.20 2558
176 Re: 웃기는 뉴스로군요 몰러 2005.06.20 2558
175 Re: 몰러의 생각 몰러 2005.06.20 2556
174 사영리 디비기 몰러 2005.06.20 2556
Category
글이 없습니다.
글이 없습니다.
State
  • 현재 접속자 150 명
  • 오늘 방문자 4,200 명
  • 어제 방문자 4,469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465,883 명
  • 전체 게시물 14,414 개
  • 전체 댓글수 38,036 개
  • 전체 회원수 1,663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