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요약. 그리고...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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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실존주의 요약. 그리고... 쩝

몰러 0 1,822 2005.06.20 15:14
실존주의 요약. 그리고... 쩝    
  
 
 
작성일: 2001/12/19
작성자: 몰러



현상학, 실존주의, 그리고 본격적인 여성해방론의 등장

들어가기 전에...

오래 계셨던 분은 아시지만 최근에 오셨던 분에게 말씀드려야 할 것...

이제껏 제가 요약한 철학들은 제가 일일이 그 많은 철학서적을 다 읽어본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철학 입문서를 가지고 요약한 것입니다.

출처 : "프랑스 고교철학", 리차드 오즈번의 "철학입문", 두산 대백과 사전, 기타 등등
범례 : 본문, 강조 또는 "저작물 이름", 핵심주제를 파악할 수 있는 인용, 금언 등, 주석, 몰러의 지조때로 해석, 딴죽거리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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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바라보는 이와 같은 상호 연관된 방법은 주관성 및 그런 주관성의 기술과 관계되어 있다. 현상학은 "경험에 대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철학"이라고 불려왔다. 프란츠 브렌타노(의류회사 창시자와 동명이인이다)는 그의 기술 심리학과 함께 현상학파의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과정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한다. 원인과 결과에 관한 모든 가정은 제거되거나 괄호 속에 넣어버려야 한다.

에드문트 후설은 그의 "논리적 탐구"에서 현상학의 기본적 방법을 정립하였다.

1인칭에 집착해야만 한다. 당신 자신의 의식에 관한 지식이야말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신적 과정에 본질적인 것인가를 정확히 알아내고 그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 자신에게서 전제를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방법이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그 방법은 실제적인 대상을 초월하는데 목적이 있다. 즉 경험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도대체 뭔 소리여?

생생하고 분명한 것으로 "환원"하는 과정에 의해서 우리는 경험의 본질에 도달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와 같은 본질로 이끈 논리적 구조인 정신의 객관적 기능들을 관찰하게 된다.

너무 제1인칭에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후설은 "선험적 주관성"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극복하였다. 선험적 주관성은 나의 본질과 의미가 상대방과 유사하다고 유추에 의해 증명될 수 있음을 뜻한다.

후설은 의식의 "지향적" 대상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반드시 실제적이나 물질적이지는 않은 대상으로서 사고가 "목표"로 삼는 것이다.

지향성은 모든 의식의 뚜렷한 징표다.

사회학자들은 특히 현상학적 방법을 받아들였다. 후설이 그의 사상을 발전시킴에 따라 당초 후설의 사상이 점점 더 불분명해졌다. 결국 그는 "나"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회의주의는 현상학으로서는 사실 문제거리다. 만일 우리가 "나"를 알 수 없다면, 누구를 알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이라면 틀림없이, 현상학은 너무 멀리까지 끌어간 언어 게임이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무튼, 만일 후설이 그처럼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말한다면, 하이데거는 확실히 멀리까지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현상학자, 실존주의자, 나치, 수다쟁이, 또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되고 있다. 그는 분명히 히틀러의 권력이 상승하는 것을 환영했으며, 후설과도 그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결별하였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현상학자라고 말했지만, 그 이외는 누구나 하이데거를 최초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대단히 난해한 철학자이며, 그의 사상을 요약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미친 듯이 사변적인 사람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의 철학방법은 분석철학의 엄격한 논리로부터는 엄청나게 떨어져 있다.

"존재와 시간"에서 나는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대답에 대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사명은 모든 사람들이 질문하도록 만드는 것이니까.

철학으로서가 아니라 소외된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하이데거의 저술은 현대의 불안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다. 현존재는 "내던져짐"을 경험한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혼돈된 존재의 발견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불확실성 또는 부조리로 전락해 버리게 된다. 불안과 무의미성이 시작되면서 현존재는 그 자체를 이런 불안을 통해 알 뿐이다. 훌륭한 철학이 늘 그렇듯이 여기에도 해결책은 있다. 현존재가 세계를 향한 관심을 기울이는 노력을 할 때 문제는 해결된다.

금세기의 가장 저명한 철학자인 쟝 폴 사르트르는 후설과 하이데거 사상을 실존주의라고 알려진 일관된 사상형태로 발전시켰다. 소설, 희곡, 정치활동을 통하여 사르트르는 결단의 철학, 자유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철학을 거리로 끌어내고 싶어했다. 그의 사상은 세계 내의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철학은 모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국민윤리 시간에 우리는 기껏 "사르트르, 실존주의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정도만 암기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 뭔 말인지, 어떻게 그렇다는 건지는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야만 알 수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이 구토를 유발할지도 모르는 명제는 당신을 벽으로 끌고갈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존재가 있고 그 다음엔 무(無)가 있는데, 무는 존재의 심연에 마치 벌레처럼 똘똘 감겨 있다.
신이라든가 절대정신 같이 존재를 결정하는 그런 것은 없다. 그래서 본질은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인생의 본질이 뭔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는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를 꿰뚫고 있는 무(無)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불확실성이라고 하였다) 자유에 이르려면 불안을 느껴야 하듯 진실은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감옥 안에서의 자유더라"는 것과 같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생인 자유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인간은 하이데거처럼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끝을 잡을 수는 없다.

나쁜 믿음을 지닌 인생을 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자유를 거부하고, 자신으로부터 진리를 은폐하고, 부르주아의 생을 사는 사람들은 나쁜 믿음을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과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도적 현실은 사르트르로 하여금 레지스탕스에 가담하게 만들었지만, 또한 마르크시즘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결단을 부인하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항상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는 항상 실존주의적인 자유와 마르크스의 집단적 투쟁 사상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피투성이의 막다른 골목"에서 휴머니즘적인 실존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존재와 결단간의 변증법을 이용한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하고자 하였는데,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자유는 자유롭게 되려고 투쟁하기 위한 자유로운 선택일 뿐이다. 그건 바로 우리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는 철학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며,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간의 논쟁은 구조주의가 도래할 때까지 프랑스의 지성계를 지배하였다.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봐르, 메를로 퐁티는 "현대"를 편집했는데, 이는 좌익 잡지로서 이런 논쟁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사르트르는 나이가 들면서 정치적으로 더욱 적극성을 띠어 갔으며, 반제국주의와 혁명적 투쟁을 지지하였다. 그는 프란츠 파농이 식민정책을 공격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그의 "대지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의 서문을 썼다. 그의 오랜 동료인 드 보봐르와의 계속된 논쟁을 통하여 그는 보다 구체적인 정치 사상을 발전시켰고 여성해방론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르트르가 쓴 "존재와 무"의 문제점은 존재가 사회계약에 의해 어떻게 제약을 받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특히 나에게 영향을 끼친다. 자유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교묘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이 문제를 소설로 쓰기도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았다. 그것은 실존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철학적 문제이고, 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드 보봐르는 사르트르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실존주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봐르가 여성해방론에 끼친 영향 때문에 이것이 더 강조되고 기억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독창적인 책 "제2의 성"(1949)은 여성해방론의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으며, 또한 여성 억압의 역사적 성격, 특성에 관하여 철학이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의문을 제기하였다.(이 책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페미니즘을 논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독단에 빠질 수가 있다. 게다가 이 책은 20세기 초반의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니 이를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나도 다시 읽어봐야지) 소크라테스로부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철학에 있어서는 문제로서 부각되지도 않았다. 여성이 인류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된 것은 이상하기조차 한 일이다.

"여자란 무엇인가"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철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형이상학적인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사르트르는, 결단을 내리고 미지의 것에로 실존적인 '비약'을 하는 그런 자유를 믿고 있었다. "제2의 성"에서 드 보봐르의 요지는, 만일 누구나 이런 자유를 지녔다면 여성에게 가해진 끝없는 억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그렇게 선택했는가? 아니면 이러한 잠재적 자유는 특별히 여성에게는 일종의 환상과 같은 것인가?
철학은 모든 문제에 대답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런 의문은 제기해 본 적도 없었다. 이 문제는 참으로 사라지지 않는 중대한 문제였다. 만일 철학이 여성을 남성과 관련된 '다른 한쪽'이라고 가정하고 따라서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라고 본다면, 철학 자체는 철학이 다룬 조건들을 개념화하는데 실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플라톤이 말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맹목적인 것이었다.

* 동굴인 : 현상과 실재의 차이를 설명하려고 플라톤이 내세운 비유
모든 사람들이 동굴 속의 사슬에 매어 있다. 죄수들은 그림자밖에 볼 수 없는데 그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생각한다. 그중 어떤 사람이 탈출하여 동굴을 떠나 실재세계를 본다. 그 사람은 되돌아오지만 햇빛에 눈이 부셔서 그 전보다 더욱 어리석게 되고 만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기독교적 도그마에 의한 이교도 처단의 하나일 뿐이었지만 이는 자유사상과 철학의 몰락이며, 반쪽성장의 빌미일 수도 있다. 그녀의 생 이전과 이후의 철학을 보았을 때 그녀가 여성해방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라도 여성억압과 여성역할무시의 희생자로 상징될 수는 있다. 기독교적 도그마는 철학에 대한 여성의 위치를 깡그리 뭉개버렸다는 것이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도 루소가 역설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교육은 남성 중심적이었고, 여성이 형이상학적인 고찰을 할 기회가 없었다. 기껏해야 "정신에는 성별이 없다"고 말한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의 짧은 반동과, 죠르주 상드 정도의 낭만적 도피(불쌍한 쇼팽...)와 반항이 고작이었다.

여자는 농담의 차원에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 키에르케고르
여자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큰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음을 알려면 여자가 생겨먹은 모습을 그저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 쇼펜하우어
남자는 전쟁을 위해, 여자는 전사의 재창조를 위해 훈련되어야 한다. 그 밖의 것은 다 어리석은 짓이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에서

남성적인 가치로 얼룩진 철학이 걸치고 있는 마쵸맨적인 가면을 벗김에 있어서 여성해방론은 철학이 종종 추구해 온 확실성을 분쇄하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철학의 웅장한 구상과 절대적인 진리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붕괴되어 왔다. 초기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절대적 '진리'라는 사상 자체가 여러 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인공지능, 탈구조주의, 해체주의, 그리고 계몽주의와 이성론적 사상에 대한 비판이 모든 것에 해답을 제시하려는 철학의 야망을 모두 갉아먹고 있다. 철학 전체를 반성해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언어, 여성 언어가 고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해방론자들도 있다.

여성해방론을 뺄려구 하다가 마눌이 째려보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실존주의와 여성해방론을 묶어서 올리게 된 공처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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