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아니라도 중세는 어지러웠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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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기독교 아니라도 중세는 어지러웠을 것이라고?

몰러 0 1,745 2005.06.20 14:57
기독교 아니라도 중세는 어지러웠을 것이라고?    
  
 
 
작성일: 2001/11/27
작성자: 몰러




기독교의 서양지배사(The Dark Ages)


예전에 올린 철학(사)적 관점의 '기독교 약사'에서 건너뛰었던 암흑시대를 정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사적 관점으로서 주요 철학자(철학자로 부르기 싫은 사람도 있지만)들의 사상을 요약하는 형태로 진행합니다.

* 철학이라면 머리를 싸매는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프랑스 고교 철학사 한글판입니다.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주문으로 구할 수 있고 동네서점에는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 출처 : 프랑스 고교철학, 리처드 오즈번의 철학 입문, 그외 철학입문서들에서 짬뽕합니다.

* 색깔범례 : 본문, 인용문, 중요구절, 명언 등, 주석(몰러 맘대로 해석 포함)

* 걍고고씨의 질문같지도 않은 질문에 대한 답이 중간중간에 나오니 잘 읽어볼 것. 우선 전언해 둘 것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것이 중세를 지배했다고 할 때 과연 세상이 평화로웠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것인데,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것을 묻는 것은 멍청한 짓임을 알기 바란다. 기독교의 지배가 문제가 되는 부분은 거의 모든 분야의 기초를 닦아 놓았던 그리스적인 학문이 로마멸망후 얼마나 왜곡되고, 또 얼마나 폭이 좁아졌는가 하는 것이다. 이걸 안다면 그딴 질문을 할 수 있는가? 또, 뒷걸음친 인류발전사는 둘째로 치고, 작금의 서구사상이 가진 정복적 패러다임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를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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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몰락

과학적인 자유로운 사상의 종말, 기독교적 도그마의 등장, 그리스적 로마문명의 마지막 쇠퇴는 히파티아(Hypatia, 370∼415,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임을 천명하기 위해 페미니스트, 예술/연예인(에로/포르노 배우까지) 중에 이 이름으로 개명하거나 예명으로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의 삶과 죽음에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다.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 박물관의 어떤 수학자 겸 천문학자의 딸이었다. 종교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신플라톤주의자로서 한 도시의 철학회장직을 맡고 있었던 듯하다. 알렉산드리아 도시 자체는 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기독교국이 되었을 때 기독교도, 유대인, 기타 이교도들간의 싸움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이교도이고,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면서 여자인 히파티아는 편협스런 기독교 광신자들에게 그리 인기가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였던 시릴(앞으로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Saint 호칭 생략, 역겨워서)의 명령에 의한 것인 듯한데, 그녀는 자신의 마차에 질질 끌려가서 발가벗겨진 다음에 산채로 사지를 절단 당하고(조개껍질로 절단했으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통도 배가되었다) 마지막에는 불태워졌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형제애이고 사랑이었다. 여기서부터 철학과 과학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52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남아있던 철학학교들을 폐쇄하였으며, 이른바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니체는 이것을 '디오니소스의 몰락'이라고 표현했다.

☞ 신플라톤주의
필론, 오리겐(오리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에 의해 플라톤의 사상과 철학이 종교화되었다. 신플라톤주의는 철학과 종교적 이상을 포괄하는 종합을 이룩하려는 시도를 기술하기 위해 나중에 고안된 것이다. 플로티노스에게는 선(善)이 유출되는 으뜸가는 그 무엇인 일자의 핵심에 복합적인 체계가 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의 사상, 피타고라스 사상의 일부, 신비주의 사상, 육체는 나쁜 것이며 정신적인 것은 선이라는 모든 사상의 플라톤적 재구성, 그리고, 약간의 신화, 이 모두를 통일시켰다. 만일 이런 주장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 까닭은 기독교적 종합이 이와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멸망원인은 기독교인들의 주장대로 분명히 시민의 사상적 타락이 원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원인의 일부일 뿐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원인들이 복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ㅇ 거대 야만족의 이동(훈족, 고트족, 반달족 등)
ㅇ 철학, 사상, 과학 등의 일편률화, 철학의 종교화(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라는 세포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증식하고 결국 세포가 사망한 것과 같다)
ㅇ 진보와 변화에 대한 부적응, 즉 패러다임의 정체로 로마인의 시민의식 희석과 사상적 혼돈 야기, 결국 야만족의 침입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함.
ㅇ 교회(기독교)의 등장(이런 주장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억지가 아니다. 당시 세계사를 살펴보면 말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기독교 등장의 이유를 제시한 것은 이미 언급했으니 생략



신앙의 통일과 초기 교부들

교회의 가장 큰 과제는 신앙을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통일시키는 일(하나님의 영광과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패러다임의 흐름이 그렇게 흘렀을 뿐이다)이었다. 이것은 성직자가 지배한 조직화된 의식과 엄격히 강요된 도덕성을 뜻했다. 기독교에 관한 여러 가지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325년에 니케아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서 니케아 강령이 채택되었는데, 그 내용은 삼위일체의 일부로서 성부와 성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삼위일체를 부정한 아리우스파는 최초로 공식적인 이단이 되었다. 이 강령으로 인하여 기독교계에는 제국의 양쪽 진영에 바탕을 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커다란 분열이 생겼다. 로마 카톨릭과 그리스 정교회간의 분열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고 있다. 379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새로운 정통성을 인정함으로써 카톨릭의 승리는 완성되었다.

초기 네 사람의 교부는 암브로시우스, 제롬, 아우구스티누스, 그레고리우스였다.(다시 말하지만 성saint 호칭은 생략) 이중 그레고리우스를 제외한 세 사람은 유목민족들이 침입해 오기 전, 로마제국의 임종기에 생존했었다.

로마의 법률가였고 잠시 동안 리구리아의 총독이었던 그는 밀라노의 주교가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정신적 최고성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말했던 것을 충분히 뛰어넘는 급진적인 견해였다. 그는 교회의 위상을 국가 위에 두었으며, 이런 견해로 인하여 길고 치열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지금도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족속들이 많다. 몰러는 기독교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좋든 싫든 간에 이미 오랜기간 역사와 학문에 영향을 끼쳤고, 우리는 많든 적든 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전면부정은 어렵다. 하지만 그 도그마는 반대하며, 절대성과 영속성은 부정한다. 안티들을 일편률적이라고 씨부린 인간들은 이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제롬 역시 문필가였는데, 그는 어떻게 하면 동정(Virginity)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많은 글을 남겼다(안티 중에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금욕주의가 불교에서 표절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 부분은 독립적임을 알아야 한다. 제롬이 만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5년 동안 은둔자로서 사막에서 생활한 다음에 그는 교황을 위해 일하였는데, 교황은 그에게 성경을 번역하도록 권장하였다. 제롬이 아직도 기억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위대한 저작, 불가타 성경(The Vulgate)으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최초의 라틴어 번역은 교회의 표준 번역이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가르침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표준이 되는 경전이 필요하였기에 불가타가 탄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딴죽걸기 : 라틴어 졸라 어렵다. 위대한 정치가, 사상가 중에 학교에서 라틴어과목을 낙제한 사람이 꽤 많다. 뭔 야그를 하고잡냐고? 함 보시라.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홅배 이셔서 마참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못하게 하고, 또한 성직자들이 지조때로 해석하여 혹세무민하기에는 라틴어만한 것이 있을까? 울 나라에서는 개역판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제롬 역시 수도원의 설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수도원은 교회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중요한 힘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글의 일관성을 위해 리바이벌 하기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좀 떫긴 하지만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교부였다. 북아프리카에서 기독교도인 어머니와 이교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카르타고의 주교로서 살았다. 어렸을 때 배를 훔친 것을 비롯해서 많은 죄를 짓고 청년이었을 때 카르타고의 매음굴을 드나든 후, 마침내 일생을 독신생활에 바치고 유명한 정신적 자서전인 고백을 저술하였다.

나는 나 자신이 정욕의 쉭쉭거리는 가마솥 한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우정의 물결을 음탕함이라는 더러움으로 혼탁하게 만들고 말았다.


위대한 성인이 되려면 큰 죄인이 되어봐야 한다고 했던가. 그런데, 요즘 목사들 중에는 이것을 흉내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최소한 어거스틴은 개종하기 이전, 즉 성직자가 되기 이전에 타락해봤지만, 목사들은 성직자의 신분을 유지한 체 타락해보려 한다는 점이다. 어슬픈 흉내는 감옥행 아니면 비난밖에 없다.

자신의 생생한 죄의식으로 인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기원을 상세히 논의하게 되었다. 그는 원죄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웨일즈의 성직자 펠라기우스에 맹렬히 반대하면서 원죄론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어머니 가슴에 안겨 울던 어린애로서의 자신의 죄에 대해서도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구분을 지었다. 즉, 인간 개개인은 죄를 지을 수 있지만, 신의 제도인 진정한 교회는 죄를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교회가 문제를 다루어야 할 때, 그리고 이교도들을 처리해야 할 때,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주장은 매우 편리한 것임을 후배들은 알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사상과 그리고 그 자신과 투쟁하였다. 이 점이 그를 다른 성직자들과 구분 짓고 있다.

내 내부에 있는 이런 두 의지, 즉 낡은 의지와 새로운 의지, 육신이라는 종의 의지와 정신이라는 의지, 이런 것들이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는 그 당시 고전적 학문의 여러 분야에 대해서 탐욕적으로 알고 싶어했다. 그는 스토아주의자들을 이렇게 찬양하였다.

성경은 키케로의 당당한 산문과 비교할 가치가 전혀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나는 너무도 자만한 나머지 성경의 단순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좀 배웠다는 개독들이 신앙간증이란 것을 할 때 자주 인용하는 말이다.

그는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자들을 취미 삼아 다루어 보았으나 후기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 가장 매료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을 읽었다. 그는 지성인들 사이에 유행한 마니교파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지적 오만을 낮추고 자신의 의지를 신의 의지 속에 용해시킴으로써 그는 마침내 개종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나약해서 이성만으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꼴통개독들은 이 말을 즐겨 인용하고, 진보개독들은 '당시의 상황과 지식으로는 저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 그가 위대한 철학자임은 변함이 없다'며 어거스틴을 변호한다. 하지만, 인류사를 이끌어갈 천재가 저런 식으로 하였기에 진리에의 접근은 그만큼(그것도 아주 많이) 지체되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

그런 다음 그의 문제는 자신의 낡은 지식과 새로운 믿음을 조화시키고 그런 것들이 상호 연관된 것임을 증명하는 일(역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성경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시간과 창조에 대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창세기에 의하면 신은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에서는 무로부터 어떤 것이 창조되는 것에 대한 강한 반대가 있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만들기 전에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비로운 일을 파고드는 사람에게는 지옥이 마련되어 있다'(우주영이란 넘이 이딴 소릴 잘 했지. 진짜 수준 낮은 넘...)는 경구를 이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신은 영원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시간은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 시작되었다. 왜냐하면 신은 영원히 지속되는 현재 속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만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으로서만 존재하며, 미래는 현재의 기대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 훨씬 나중에 데카르트가 논지를 전개할 방식을 암시하고 있다.
위의 말로서 창조과학회에서는 우주탄생이론인 '빅뱅'이론에 대해 잘 짜집어서 제시한다. 과학자들도 창조를 인정한 것이 아니냐면서... 하지만 굳이 오캄의 면도날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빅뱅에 신이 관여할 이유나 여유가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도 빅뱅과 함께 탄생했다고 우기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그리고, 시간도 절대적이지 않음은 창조주의자들도 잘 알지 않는가? 만약 질량(속도가 증가할수록 커지고, 광속이 되면 무한대가 된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불가능하리라고 말했던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된다면 '과거'는 더 이상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텐데, 그때는 어떻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것인가? 시간여행은 상대성이론에서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양자역학으로는 가능하다. 다만 구현이 어려울 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저작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국론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과거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를 발전시켰으며, 우리가 역사철학(역사는 식별 가능한 유형을 가지고 있다는 개념)이라고 부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비유로서 창조에 대한 철학적 해석 다음에 그는 신의 도시와 악마의 도시를 논의하였다. 전자는 인간의 덕성으로 되어 있으며, 후자는 인간의 악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의 도시는 교회의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권위'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다. 만일 국가가 그 도시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면 국가는 교회에 복종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교황제의 등장에 강력한 신학적 무기가 될 수 있었음이 판명되었다. 그것은 신이 모든 인간을 선택받은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로 나누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가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개독들이 자기모순을 범한다. 즉, 자유의지 문제 말이다. 개독들은 원죄의 당위성을 말할 때는 자유의지를 들먹이다가 신의 절대성과 계획과 구원에 대해 말할 때는 위의 어거스틴의 견해를 제시한다.
한편 웃기는 것은 말보회다. 어거스틴을 못 잡아먹어서 환장한 그들이 가끔 어거스틴의 저작에서 인용된 말을 많이 한다. 아마 어거스틴이 했던 말인 줄을 모르고 그랬겠지만...공부 좀 해라. 개독들아.



철학적 반동

이러한 기독교적 논증과 종교적 열정의 와중에서 보에티우스는 침팬지의 다과회에 참석한 스토아철학자처럼 두드러진 존재였다. 보에티우스는 플라톤의 철인왕이 되기를 바랐던 데오도리쿠스 황제에게서 사형을 선고받아 투옥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저 유명한 '철학의 위안'을 저술하였다. 그 안에서 그는 어떤 기독교의 믿음에서도 위안을 찾지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의 수호자인 철학이 그의 감방에 나타나서 그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것임을 약속하고 있다.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의식이라고는 별로 없었던 것 같으며, '악덕은 반드시 벌을 받으며, 덕행이 보답 받지 않는 일 역시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플라톤의 상기설을 상당히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철학이라는 자신의 수호자로 하여금 자신에게서 자주적인 인내심을 일깨우게 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 번역을 계획하는 서양의 교사로 보았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학자였다. 그는 시골 사람들에게 그리스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보에티우스는 미신과 신비주의의 시대에 그리스 사상의 초연한 합리주의를 사용함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빛나는 존재 -참된 애지자(愛智者)- 가 되었다.


본격적인 암흑시대

유럽에서 모든 것이 부서져나가는 동안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체계적으로 스스로를 지배적인 기구로 조직하였다고 대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전쟁과 전염병이 난무하던 시대에 교황제는 로마제국의 붕괴가 가져온 정치적 공백상태를 메워주었다. 그리스 황제들, 이탈리아 왕자들, 기습하는 반달족, 전쟁을 하는 롬바르디아인들과 프랑크인들, 그리고, 유럽을 조금씩 분할시키는 무리들과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고 협상하기도 하면서 교황권은 서서히 그 세력을 넓혀갔다.
프랑크인 페핀과의 거래에서 교황은 페핀에게 왕위를 주는 대가로 라벤나시와 이탈리아 교회땅을 751년에 얻었다. 비잔틴 제국은 이에 불복하였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에 또 한번의 분열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거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라는 문서가 날조되었다. 그 문서에 의하면, 312년에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양위할 때 로마와 그 영토를 교황에게 준다고 되어 있었다.
바티칸이 협잡으로 세워진 곳임을 소사(소주 4병) 신부가 가르쳐 주더군요. 하긴 뭐, 다른 곳도 같은 수법으로 착복한 땅이 많죠. 대표적인 곳이 미국

이런 모든 무질서의 와중에서 페핀의 아들인 샤를마뉴 대제(카알 대제라고도 하며 '롤랑의 노래 등의 주인공격인 인물, 그는 문맹이었다고 알려져 있음)는 짤막한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그는 롬바르디아인을 채찍질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로마를 인수하였으며, 독일 대부분을 정벌하고 무력과 불로 기독교를 작센지방까지 전파하였고, 교황에 힘입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날(참 외우기 좋다. 학교 다닐때 외운 것인데 아직도 안 까먹고 있다)에 거행된 그의 대관식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시작되었다.
샤를마뉴의 거창한 계획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꿈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즉, 시저의 황제적 통치를 재창조하는 것,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를 지상에 건설하는 일... 한동안 세속적 권력과 교황권 사이에는 새로운 협력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는 교회와 가짜 시저 황제들간에 전쟁과 싸움이 재현되었다.

볼테르의 일갈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았고 로마도 아니었으며 제국도 아니었다"

카롤링거왕조의 르네상스는 곧 야만의 시대로 이어졌는데, 그것은 더욱 심한 전쟁과 역병의 와중에서 봉건적인 노예상태, 빈곤, 그리고 무지가 지배하는 시기였다. 교황 니콜라우스 1세는 모든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교황권을 강화시켰으나, 그런 다음에는 로마 지방귀족의 노리개로 전락해 버렸다. 최악의 사태는 요한 11세와 요한 12세 때 나타났다. 16세의 나이에 교황이 된 요한 12세는 라테란 궁전을 무대로 한 방만한 생활과 떠들썩한 술잔치로 인하여 교황권을 완전히 타락시켜 버렸다. 아무도 카톨릭주의만으로는 살 수 없었으며, 교황의 사치, 전쟁, 교회건축과 수도원의 유지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그런 일을 한 것은 대체로 농부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 냉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부들은 땅에서 일했으며, 그밖의 어떤 사람들은 대체로 농부들이 생산한 것을 가로채 갔다. 이것이 봉건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며, 농업에 기초를 둔 경제체제인데,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노와 영주, 가신과 영주, 신도와 성직자가 모두 의존적인 관계임을 발견한다.

노예제도는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서유럽에서는 사라졌으며, 토지의 지배는 권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봉건주의는 일반적으로 프랑크의 메로빙 왕조에서 출발하여 카롤링거 왕조 르네상스기에 가속화되고, 10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동안 '고전적인 기간'을 맞이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봉건이란 말은 땅(봉토)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봉사/충성/생산의 대가로 수여되었던 땅 한 조각을 가리킨다. 그런데 거래는 이중으로이루어졌으며, 영주 또는 교회는 농노, 가신, 농부 또는 소작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정된 체제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법률, 이념, 종교와 관습, 이 모든 복합적인 제도가 발달하였다.
이때보다 사상과 믿음이 사회적.정치적 상황과 더 밀접하게 결합된 적은 결코 없었다.
도그마의 지배를 참으로 점잖게 표현했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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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은 안셀무스, 아퀴나스 등으로 이어집니다. 이미 글이 올라와 있으니 검색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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