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Re: 답변과 고찰에 대한 재답변...
몰러
일반
0
2,778
2005.06.20 15:25
Re: 답변과 고찰에 대한 재답변...
작성일: 2002/01/11
작성자: 몰러
다른 복음서들보다 마태복음은 구약을 철저히 인용하여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증거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무리도 있었구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는 만들어진 그리스도일 가능성은 다분해집니다. 하지만 지니도사님과의 대화에서는 그러한 조작의 개연성을 잠시 덮어두고자 합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에서는 인간적인 예수(철저히 신성을 부정한)를 강조했기에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혹시 다른 길은 없는가 하는 것... 마시지 않고 잔이 지나가길 바라는...(저도 회식때 잔돌리기를 무척 싫어하고 잔이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ㅋㅋㅋ 농담이구요.)
하지만 자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어쩌면 책임전가성의) 기도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고 또 따를 의도가 있음을 우린 알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이를 피할 수 없음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님도 알고 계시구요
물론 여기에서 의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인정한 그가 왜 그런 탄식을 했을까...
혹시 그는 십자가상에 있게 되면 무엇인가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신적 현상이 나타나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닐까..
단순히 신학적 작업이 나타나기 이전의 의문스런 단편은 아닐까..
지니도사님은 전에 제가 올렸던 글에서의 물음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답변(님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고 하신)을 전개하셨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을 양식 비평적으로 읽어 보면..
그의 죽음은 그의 부활을 더욱 극적이게 보이도록..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는 다이루었다.. 라는 구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처참한 실패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오는 부활의 사건이 더욱 강조가 되고 아마 신자라면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구절은 요한복음서에만 나오지 않습니까? "마태"와 "마가"에는 저술상의 차이(엘리와 엘로이)뿐 같은 말이었고, "누가"에서는 영혼을 아버지에게 의탁한다는 말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이 따랐음을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요한"에서는 "다 이루었다"는 말로 우리를 더욱 헷갈리게 합니다. 주어가 생략된 이 말은 많은 의문과 논쟁을 낳게 합니다. 기독교인들로서야 하나님의 예정이 이루어졌으면 그만이지 뭐가 문제냐고 하겠지만, 만약 주어가 "아버지"가 아닌 "나"라면? 목적어, "이루었다는 것"이 시편 69장 21절에 대한 것만이라면? 무엇보다도 왜 다른 복음서와는 확연히 다르게 마지막 언사를 하였을까?(또는 저술되었을까?)
누가복음에서 영혼(또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맡긴다고 한 것과, 요한복음에서 버림받음에 대한 절규가 빠지고 대신 다 이루었다고 한 이유는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처참한 실패자의 모습으로써 부활을 강조한다는 님의 전언,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님의 결론은... 글쎄요. 실제의 사건이 아닌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였다 해도 의문이 드는군요. 그렇게 할 필요, 이유가 뭘까요? 실패인 줄 알았는데 "아 ~ 정녕 예정이 이루어졌구나"하는 유치한 깜짝쇼를 할 이유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초대교회의 초기 신앙전승인 성만찬 언급에서 나오는 살과, 피에 대한 인식들의 도움을 받아서 해석해 본다면....
"엘리엘리.."라는 말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고..
그가 부활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라는 "대속"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것은 바울의 서신에서 신학적으로 완성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독교가 바울의 서신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는 점엔 저도 어느 정도 수긍하지만, 마태복음의 저자는 바울이 아니므로 바울의 해석을 따라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각설하고...
버려졌음에 대한 원망과 절규를 부활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대속"으로 연결하는 것을 전에 목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지만, 저의 안티로서의 한계인지 치사한 궤변으로만 들리는군요. 궤변이라는 말까지 했으니 이 부분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또 님께서도 이어지는 말씀에서 다르게 해석(?)하셨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엘리..."구절은 구약의 탄식시에서 그 근원이 있기에..
그 말이 입시시마 복스(원 말씀)인지 아닌지는 차지하고. 그 의미는 분명..
인간의 죄로 인해 버려짐을 당하는 인간의 실존을 대신 진(제사적 의미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지요..) 예수의 모습을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네. 저도 시편과 비교하였을때는 턱도 없는 짜맞추기라고만 하겠습니다. 다른 구약인용들 처럼요.
의미로 본다면, 정확하게 말해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이라는 상황을 배제"하고 본다면 님의 말씀처럼 버려진 인간의 실존을 비유하는 것이겠지요.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버려짐은 제가 강하게 부정하는 것임은 말씀 안드려도 잘 아시겠지만, 논의진행의 원활을 위해서 버려진 인간의 실존을 비견한다고 보겠습니다. 하지만, 사망직전, 그러니까 인간으로서의 생이 꺼져가는 시점에서 한 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때는 인간 전체가 아닌 예수 개인의 문제(즉 "아버지"와 예수 자신과의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긴 했지만 결국 예수는 끝까지 잔을 피하려고 했다는 문제제기 시점으로 돌아가는군요.
------------ --------------- --------------
님의 결론... "나름대로" 철저하고자 하는 신학적 고민
그것이 저러한 인용을 하게 했다고 보시는지요?
결국 안티들이 말하는 "짜집기"를 님이 조금 다르게 표현(고백)했을 뿐인 결과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지만...
님의 글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아무런 직관이 오지 않았지만 두번째 읽었을때는 "결국은..."이라는 직관이 왔습니다. 답변글을 쓰면서 분석해보니 저의 직관이 맞았다는 느낌 또는 확신이 오는군요.
기독교는 웅장한 조합이다
안티적으로 표현하면 "필사의 짜집기"가 되겠죠. ㅋㅋㅋ
하지만 지니도사님에게 "당신도 어쩔수 없는 개독이구나"하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음을 말씀드리며, 또한 그 점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님을 어쩔 수 없는 개독으로 간주할 안티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저는 이렇게 고민하는 기독교인이 한국 기독교계에 일부나마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는 다소 건방진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