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벌] 예수는 개죽음 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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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리바이벌] 예수는 개죽음 했을 수도 있다.

몰러 0 2,569 2005.06.20 16:23
[리바이벌] 예수는 개죽음 했을 수도 있다.     
  
 
 
작성일: 2002/03/11
작성자: 몰러
 




예수의 죽음에 엄청 의미를 두고, 있지만 따져보면 별것 아닐수도 있습니다.

박계돈님.
저의 해석에 반론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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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왜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나?


오늘날 기독교에는 수없이 많은 교파가 있다. 엄격하고 도그마적이며 보수적인 신앙으로부터 급진적이고 광신적인 신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기독교는 그 특성을 꼬집어 정의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요건, 즉 천차만별한 기독교의 독트린들을 묶어주는 요인은 예수와 십자가와 부활일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사건들이 4복음서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아 실제적 또는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건들의 상징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기독교인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부활의 의미 또는 상징성은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예수가 죽은 이유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항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예정(창조에서부터 종말과 구원까지 모든 것은 예정된 것이다)
속죄양(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대속할 제물이 필요하다)
순결함(대속제물은 원죄가 없는 존재여야 하며, 완벽한 인격을 갖추고 있고, 무엇보다 육체적으로 순결해야 한다)

위의 주장을 일단 수용하고 이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상 위 세 가지 전제는 한가지이다. 하지만 고찰을 위해서 별개의 논제로 분리하였음을 일러둔다.



하나님의 예정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개신교가 채택한 경전을 기준으로)을 살펴보면 지난 번 글에서 언급하였듯 모든 하나님의 예정은 종말에 대한 기다림으로 귀착된다. 몇몇 순진한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가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사랑”은 사실 기독교에서는 곁가지일 뿐이다. 고린도전서를 위시한 주요 서신에서 언급되는 사랑은 보편적이거나 아니면 위대한 사랑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 단지 교회와 성도의 분열을 막기 위한 충고와 경고와 교시였을 뿐이다. 각설하고...

왜 뜬금없이 종말을 언급하느냐 하면 예수의 죽음은 부활, 그리고 재림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고, 재림은 심판과 종말과 영원한 구원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주장이니 뭐라고 토달지 마시라.
극단적인 종말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나중에 받을 상위”를 위해 열심히 믿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바치도록 가르치고 또 따르고 있다. 나중에 받을 상위란 예수 재림후 다가올 천년왕국에서 왕위를 받아 지상을 다스리게 되는 것처럼 내세(?)에 보장된 보상을 말한다. 성경에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쓰여 있으니 일단 각 예언서들이 맞다고 간주하자. 하지만 시작부터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그 “때”는 언제인가? 현재까지 종말은 오지 않았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유명한 구절로 변명한다. 인간은 그 때를 알 수 없으며, 도둑같이 오리라면서...(마태 24:36-44, 마가13:32-37)...
하지만 예수와 제자들은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에게 말한다. 이 일의 책임은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마태23:36)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제자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있다.(누가9:27)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나기 전 이 모든 일이 다 일어날 것이다.(마가13:30, 누가21:32)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워졌습니다.(로마서13:11)
여러분께서도 오래 참고 마음을 굳게 하십시오. 주께서 오실 때가 가깝습니다.(야고보서5:8)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베드로전서4:7)
자녀 여러분, 지금은 마지막 때입니다. 여러분이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말을 들은 것과 같이, 지금 적그리스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요한1서2:18)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종말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예수와 동 세대, 문자적으로 보자면 적어도 예수의 제자가 단 1명이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올 것임을 예수는 천명했다. 하지만 어떠한 상징과 비유로써 살펴보더라도 종말을 맞은 것은 유대나라와 로마제국(그것도 수백년 후) 뿐이었다. 예수의 재림과 심판과 구원은 오지 않았던 것이다. 시쳇말로 예수는 뻥을 친 것이다. 결국 예수는 예정되지 않은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제자들의 진술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떠나, 아예 삼위일체까지도 인정을 해주어 예수가 하나님의 자식 또는 하나님 자체라 하더라도 예정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사흘만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말하고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리 알리지 말라고 한 적이 있으니 이것이 예언(예정)의 성취가 아니냐고 기독교인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서학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 생존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전에 쓰여졌다면 모르지만, 죽은 이후의 서술은 누구나, 그리고 얼마든지 조작/가필할 수 있다. 게다가 예수의 예정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보아야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포기 못하는 것인가?

답변이 궁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지 말고 상징과 비유로 이해해보라고 기독교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가 직접 말한 것에 무슨 상징과 비유가 있다는 말인가? 상징과 비유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하게 정의하기 바란다. 그래도 백번 양보하여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상징과 비유를 포함하여 논하기로 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고, 인간적인 죽음을 맞게 하고, 그의 영혼과 육체를 거둬들임(부활)으로써 인간에게 믿음(추종)의 구심점을 부여(기회제공)하기 위하여 일련의 과정을 예비했다는 것은 그 방법이 너무나 짜잘하다. 전능자는 더 기가 막히게 좋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또한 창세기 시절에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이적과 처벌을 써먹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철들어서(교인들의 변명으로는 ‘인간을 사랑하사’) 그렇다고 치고, 왜 자신의 대행인인 예수도 받아들이기 힘든 방법을 동원하였을까?
십자가에서 매달린 예수가 말한 것을 다시 살펴보자. 복음서들간에 일치하지 않는 점은 일단 따지지 말자. 어차피 여기서는 상징성과 의미를 논하기로 한 것이니까.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주여,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인가? 죽음에 대한 공포라든지 문자그대로 버림받음에 대한 원망은 물론 아니다. 숭고한 자신의 사명과 운명을 알진대 어찌 공포감이나 원망을 가졌겠는가... 그럼, 왜 자신을 버리느냐고 예수는 절규했는가? 내 생각에는 하나님과 예수는 “이면계약”을 하였던 듯하다. 인류를 구원할 또 다른 방책 말이다. 그럼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우리가 모르는 다른 방책 중 어느 것이 원래의 예정이었을까?
한편 어느 기독 신학자의 주장을 빌리면 예수는 끝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현실의 고난(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구해주실 것으로 믿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예정대로 진행하려 했고, 마지막에 가서 결국 예수도 (포기하고) 뜻에 따르기로 했다고 한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등을 보면 일견 타당하며,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또한 신적인 예수이다. 요한 복음에 나온 “다 이루었다”라는 말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십자가 보혈은 그 중에 하나였을 뿐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약간의 비약을 해보자. 재명(파문과 같은) 당한 어느 목사가 한 말이다.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겠다.

우리에겐 어떠한 숙명도 없다. 재림, 심판, 천년왕국, 들림, 보좌의 우편 등, 이 모든 것이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실 다른 고대 사본에는 없는 구절이지만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자신을 핍박한 유대인들을 용서하는 예수의 위대한 덕성을 강조하는데 이용하고 있다. 가필된 것이 아니라고 일단 인정하자. 그런데 이상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하나님의 뜻(예정)인가? 유대인들의 뜻인가?
만약 하나님의 예정이라면 유대인들에게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보라. 과연 그러했는가? 아인슈타인이 김나지움에 다닐 때 교사가 못을 하나 가지고 나와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 때 사용했던 못이라고 하면서 아인슈타인에게 할말 있느냐고 물었다. 알버트의 대답은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습니다”였는데, 각설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런 식으로 따 당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와 보혈은 개소리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십자가가 유대인의 뜻이었다고 할 수는 절대 없을 것이다.


속죄양

예수가 대속 제물로서의 의미가 있으려면 반드시 인간의 죄가 필요하다. 이 죄의 성격부터 규정해보자. 그것은 과연 현실적인 죄일까? 살인, 강도, 도적질, 간음, 사기 같은 인간의 법으로도 다스릴 수 있는 죄(Crime)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반하는 비도덕적인 행위의 죄(Vice)도 아닐 것이다. 인간이 피하지 못하는 죄, 인간이 벗어나지 못하는 죄, 인간이 다스리지 못하는 죄일 것이다. 그럼 과연 무엇인가? 기독교인이나 반기독교인이나 무종교인이나 제시할 수 있는 답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원죄(Origin & Ultimate Sin)다.
그럼 원죄는 어디에서 유래되었나?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대표되는 불순종의 죄인가? 에덴이 생기기 전에 이미 여러 곳에서 인간들은 살고 있었다. 이 인간들의 후손은 아담의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창조론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잠시 벗어나 지극히 좁디 좁은 기독교적 세계로 들어가서, 정말로 최초의 인간이 아담이라고 하고 우리가 그 후손이라고 치더라도 문제는 그대로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창조하고, 인간이 죄를 짓게 하고(또는 방조하고), 그리고 심판하기로 예정했다는 말이 된다. 이때 인간의 자유의지는 여기서 논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의 자유의지이며 이것은 진정한 자유의지가 아니므로 그로 인한 처벌은 불공정하다.
자신의 피조물을 벌하기로 예정했다는 것은 창조주로서는 대단한 핸디캡이 된다. 절대적인 신으로서, 또 자존자이자 창조주로서의 위상과 자격에 심히 손상을 주는 짓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이미 엎지른 물인 처벌을 없던 일로 하지는 못하니 결국 사하여 줘야 하고, 그래서 대속물을 세상의 인간들에게 제공한다고? 이 무슨 황당한 땜빵이란 말인가...

당구할 때 삑사리가 나서 득점하지 못하면 상대 선수에게 기회를 넘겨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권한을 다른 신에게 넘겨야 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유일신임을 강조하는지도 모르겠다.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하며 선하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원죄 따위는 규정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이 신의 위상에 걸맞는 것이다. 이 위상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원죄 따위는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예수는 속죄양이 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속죄양을 자처하거나 착각한 것일 뿐 그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딜레머를 기독교인들은 인식하려 들지 않는다. 아무리 진보적이고 유연하며 깨어있다고 자처하는 기독교인일지라도 결국 원죄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가 없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결국 이러한 논의가 나오면 모른 체 하거나 다른 성경구절로 변명할 뿐이다. 다른 성경구절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곧바로 딜레머가 되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해결방법은 단 하나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선악과에 의한 일련의 것들은 저주였지 원죄는 아니라고 하면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은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것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나는 둘 다 인정하지 않는다.


순결함

우리가 흔히 사람에 대해 순결하다고 할 때는 그가 도덕적으로 고결하고 완전한 품성을 갖추고 있고, 세속적인 협잡과 요령에 물들지 않는 등 즉, 순수하고 정결한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육체적인 관계(성관계)가 없어야 한다(물론 육체적 관계에 대한 현대적인 순결개념은 이것과 차이가 있다). 종교적 관점의 순결은 이 모두를 갖춘 것을 일컫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을 순결의 적으로 간주했다. 사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순결한 분으로 보고 있으며, 더 나아가 가톨릭교도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까지 영원한 처녀로 규정했다.

문자적인 해석으로써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예언(구약)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은 서술들이 모두 가짜이거나 예수와 상관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러한 논법을 잠시 접어두기로 다시 한 번 일러둔다.

일단 예수의 순결함은 성령잉태, 즉 동정녀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마리아도 개신교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원죄를 가진 죄인의 몸이다. 그런 죄인 중의 한 사람인, 평범한 인간인 마리아에게서 난 예수가 완전한 순결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점을 가지고 봐도 원죄는 무효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가톨릭은 1500여 년 전부터 마리아를 영원한 처녀로 규정하고 마리아 숭배를 시작했다. 게다가 1950년엔 마리아도 승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개신교가 가톨릭을 공격할 때 단골메뉴로 내세우는 마리아 숭배... 하지만 마리아에게 원죄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부터 해결하지 않고서는 개신교가 마리아 숭배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가?

여자는 성적인 순결만 있으면 되므로 결국 예수님은 순결한 존재라고 주장하거나, 단지 예수는 단지 여자의 몸을 빌려서 태어났을 뿐 마리아의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바보 있나? 그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족보의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하려는 것인가?


그럼 예수가 죽은 진짜 이유는?

먼저 예수 당시 유대의 현실을 살펴보자. AD 6년 이후 유대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다. 4복음서에 나온 것 같은 “자치”라든지 유대인에 대한 공정한 법집행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야만적이고 독재적인 로마총독의 통치방법은 본디오 빌라도에 이르러 절정이었다. 저항자와 그 가족들은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고문과 협박이 빈번하였다. 본디오 빌라도는 성경에 나온 내용을 제외한 다른 기록들을 살펴보면 잔인하고 부패하였으며, 유대에 대한 학대를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복음 저술자들이 본디오 빌라도를 예수 처형에 대해 고뇌에 빠진 인물로 만들고 유대인들을 실질적인 예수 살해자로 묘사했을까 하는 것은 뒤에 따로 설명하기로 한다.

당시 유대에는 사두개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적은 수지만 부유한 지주계급으로 로마에 협조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성경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유대교에 많은 개혁을 도입하였고, 로마에 강하게 저항하였던 진보적인 사람들이었다. 한편 에세네파는 엄격하고 신비주의적인 성격을 띤 종파로서 예수가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들이다. 이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사람들이 두루 포함된 열심당(열성당으로도 번역)은 로마에 강하고 끈질기게 저항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마사다 요새의 항전을 마지막으로 유대는 근대에 와서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제 빌라도의 재판 때 예수 대신 바라바(이 사람에 대한 기록이나 분석도 천차만별이다)를 선택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다음 성경구절들을 보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 눈먼 인도자들아!......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태23:23-36)
율법학자들은 조심하여라. ......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마가12:38-40)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이자 율법개혁자인 바리새파 사람들을 이토록 매도하였으니 그 미움이 얼마나 뼈저렸겠는가? 설사 그들이 위선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하면 더더욱 예수를 살려둘 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서 예수를 사형하기로 결정하고 로마 총독에게 재판 및 집행을 의뢰했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빌라도는 예수가 로마법을 위반하지 않았고, 예수가 왕을 사칭했다는 것도 무고에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를 살려주려고 유대의 유월절의 관례에 따라 군중이 선택하는 죄수 하나를 석방시키는 방법을 제안했다고 말이다. 결국 유대인들은 도적(실은 레지스탕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바라바를 선택했다고 말이다. 바라바는 절대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럼 아까 잠시 유보했던 의혹, 빌라도는 과연 공의로운 재판관이었나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빌라도가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열심당원인 바라바를 풀어주어서는 안되었다. 바라바는 명백하게 로마법 중에서도 최고의 형벌을 받아야할 반역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반면 예수는 빌라도에게 있어서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다. 정말 그를 사형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권한으로 예수를 무죄로 하고, 바라바를 사형시켜야 옳았다. 그런데 왜 있지도 않은 유월절 관례를 들먹여가며 유대인들에게 선택권을 주었을까?
아까도 말했지만 빌라도는 분명 잔인하고 부패한 관리였다. 그에게는 예수든 바라바든 살려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 빌라도가 예수를 살리기 위해 유월절 관례를 제안하고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의도에 어긋난 선택을 했을까? 빌라도처럼 잔인한 총독이 유대 폭도들에게 굴복했을까?

이 모두 조작이며, 조작의 이유는 명백하다. 4복음서가 쓰여진 시기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또한 일부 목사들이 4복음서의 저자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라고 우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4복음서는 예수 사후 최소 40년에서 100년 사이, 어쩌면 더 뒤에 저술되었다. 이때는 유대가 마사다에서의 옥쇄 후 사회적, 정치적, 군사적 조직이 거의 부재한 시대였으며, 로마의 통치가 극악한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를 정치적으로 묘사하거나, 선동가/혁명가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자살행위였을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메시아이긴 했지만 유대인에게 배척된 예수가 나았을 것이고, 나아가 유대의 것만이 아닌 범민족적인 메시아의 메시지를 전파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재판과 처형에 있어서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의 역할은 미화되어야 했고, 유대인들은 폭도가 되어야 했다. 결국 로마인들을 무죄로 하고,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로마의 청중들(사실 노예나 평민들부터였지만)이 예수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정리를 해보자. 역사적으로 본 예수의 죽음과 이에 대한 왜곡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예수는 유대의 독립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였기에 동족의 미움을 샀고, 그래서 반역죄로 고발(기독교인의 관점으로는 무고)당하여 잔인한 빌라도에게 사형당하였다. 그럼에도 빌라도가 예수의 재판을 공정하게, 그리고 고뇌에 차서 진행하였다고 묘사하고,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버렸다고 한 까닭은 기독교의 생존과 전도, 그리고 더욱 창대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모쉐이가 요구했던 예수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해보았다. 고맙다. 덕분에 당시의 중근동 역사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네가 하지 말라고 한 짜잘한 문자적 해석은 가급적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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