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헛품일 뿐인데...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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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6:48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헛품일 뿐인데...
작성일: 2002/04/30
작성자: 몰러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 구체적으로 십자가 보혈, 속죄양으로서의 예수론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인간은 죄인이다. 이 죄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며,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을 속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의로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영원 전부터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즉 정해진 계획에 따라 독생자를 버리시고(죽게 하시고) 다시 그를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서(부활) 살리셨다. 그 독생자는 원죄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혈통이나 육정 같은 사람의 일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어야 했으며, 예수님은 그렇게 탄생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서 천국에 들 수 있다.”
메시아인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아야 한다는 교리는 뒤에 하나하나 까대기로 하고 우선은 십자가 보혈이라는 구원의 방법론부터 문제를 제기하기로 한다. 엄밀하게 따져서 예수는 말 그대로 제물이다. ‘예수는 속죄양’이라고 기독교는 성경을 들어 증거 했으니 기독교인들은 ‘예수=제물’이라는 말에 하등의 반론을 제기치 않을 것으로 믿는다. 물론 여타 제물과는 성격이 다르고 의미나 효과에 있어서 다른 제물과는 차별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은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말하고 있으니 의미나 효과는 언급하지 않겠다.
ㅇ 십자가 보혈은 인신제물이나 식인풍습에 다름 아니다.
방법론적인 비판의 요지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과거(불과 50여년 전까지도) 아프리카나 오세아니아 토인들의 관습인 인신제물, 식인풍습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구약시대에 죄를 저질러 그 화(저주)가 3, 4대가 아닌 영원히 자손에까지 이어진다고 인정해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고대 유대인들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나님의 노여움을 달래고 용서를 빌기 위해 양을 잡아 제사지낸 것, 자기 자식을 불태워서 하나님께 바친 일 같은 것이 집대성 또는 연장된 것이 십자가 보혈의 방법이 아닌가? 그리고, 토인들이 사람을 화산에 밀어 떨어뜨리거나, 사람을 죽이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음으로써 신의 은혜와 용서를 자기 몸에 각인 시키는 행위와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겠다. 굳이 차이점을 말하자면 후자가 좀더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뿐...
방법론적인 비평이 기독교인들에게 그리 어필하지 못할 것이기에 이쯤하고, 앞에 인용한 십자가 보혈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말하겠다.
ㅇ 인간은 죄를 범한다. 그러나 그 죄가 원죄일까?
먼저 인간은 죄인이라는 전제는 구약의 주인인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와 형제격인 이슬람이 인정하지 않는 것이므로, 기독교 혼자서 원죄를 주장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한다. 원죄는 성경을 아무리 뒤져봐도 근거가 없다. 원죄론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이다. 십자가 보혈이라는 사상에 권위와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된 교리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불합리를 변명하기 위해 동원한 또 다른 불합리가 바로 원죄란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원죄에 대하여 흔히 증거랍시고 인용하는 로마서 3장에 인용된 시편 구절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일 뿐 원죄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한껏 낮추고, 신 앞에서 겸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또한 바울은 이것들을 가지고 유대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으며,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할례와 관련하여 그러한 율법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예수의 대속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바울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교묘하게 자극한 것이다. 법이나 도덕, 양심으로도 어쩌지 못하는 문제들을 예수의 대속에 대한 믿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하다가 결국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기형아를 출산하고 만 것이다. 결국 바울의 말대로 믿음이 율법을 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율법을 굳게 세우지도 못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서를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 바울은 문자적으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은 항상 죄를 범하는 작은 존재임을 각인 시키고자한 것뿐이다. 이러한 상대적 원죄를 절대적 원죄로, 문자 그대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임을 명심하라.
ㅇ 하나님은 과연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였다는 하나님... 그러나, 창세기부터 그 뒤로 보여지는 하나님의 행적들은 우리 인간을 사랑했다고 하기보다는 우리 인간의 복종을 강요하려고만 한 것 같다.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인간의 타락을 미리 보셨다는 것은 사실 인간이 타락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다. 영원 전부터의 계획으로 인간이 타락하게끔 많은 부비트랩(선악과, 차별, 조종 등)을 만들어 두신 분이 하나님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을 예정하지 않았다면 예수의 대속도 필요가 없었을 터이지만, 계획에 있는(?) 독생자의 희생을 위해서는 원죄의 굴레를 인간에게 씌울 필요가 있었던 셈인데, 이것을 과연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해진 계획이라는 것은 사실 아무런 증거가 없다. 조금 세부적으로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인자가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의 손으로 넘어가 조롱 당하고, 채찍질 당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나 사흘만에 살아난다”는 예수의 예언 말이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이어야 하며, ‘나 스스로를 두고 증언을 한다면 나의 증언은 참되지 못하다’는 예수의 말대로 ‘예언자로 말씀하여 기록된 바’인 구약에 그 예언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구약에는 그런 예언이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올 수가 없다. 십자가란 것 자체가 구약시대보다 훨씬 이후에 나온 것으로, 그것도 유대가 아닌 로마의 사형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언급하지는 않더라도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것은 구약에 언급되어야 하지 않을까? 구약에서 이것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개독이 아닌 최소한 “성경공부 좀 한 기독교인”으로 예우를 해주겠다. 성경이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담을 수는 없다는 말로 변명하지 말라. 그렇게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담아두어야 하는 게 성경 아닌가? 저렇게 중요한 구세주의 부활에 대한 예언을 빠뜨린 경전이 어찌 권위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예수의 예언(하나님이 천명하신 계획이 아닌)은 공관복음서에만 각각 세 번씩 나오는 내용이다. 필자가 비교적 사실적이라고 인정하는 요한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비슷한 것이 나오기는 한다. 2장 19절에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같은 장 21절에서 ‘성전’을 ‘예수의 몸’으로 바꿔놓았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증거로 요한복음도 부활의 예언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게 어찌하여 예언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훗날 부활 후에나 알았다고 하지 않는가?(이사야서나 다니엘서의 예언들도 모두 이런 식이다) 결국 공관복음에 나오는 죽은지 사흘 후 부활하는 것은 성서적으로 보아도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ㅇ 왜 예수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야 하는가?
동정녀 탄생설은 마태와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공관복음서들의 원본격인 마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가장 사실적인 요한복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중요한 성령잉태를 언급하지 않은 복음서는 제대로 된 복음서일까? 아닐까?
결혼 후에 예수가 태어났든 약혼상태에서 예수가 태어났든, 박해를 피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을 갔든 율법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의식을 치르고 나자렛으로 갔든 그런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또 두 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족보가 차이 나는 문제도 여기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정녀 탄생이 과연 하나님의 계획인가, 그리고 예언이 되어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성경에 모두 밝히지 않았으므로 논외로 치고, 예언은 그럼 어떠한가? 이사야 7장 14절? 그것은 그냥 젊은 여자로 되어 있는 것을 마태(?)가 동정녀로 둔갑시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아람(시리아쯤 된다)의 동맹군이 유대를 침공해온 것에 대한 대비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사야가 유대왕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비유로 말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예수는 예수였지 임마누엘이 아니다. 만약 그 구절이 예수탄생의 예언이라고 한다면, 예수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3세에서 5세쯤) 황무지로 변한 원수의 땅은 어디이며, 망해버린 두 왕은 누구인가? 아직까지 이것에 대한 반박을 한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믿는 것도 정도껏 할 일이다. 기독교인들이 머리, 가슴 운운할 때는 말문이 막히거나 입장이 곤란할 때이며, 결국 신앙의 지표가 되어야 할 말을 전형적인 변명의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ㅇ그럼 예수의 의의는?
원죄를 대속할 번제양인 예수의 순결성을 위해 동정녀 탄생이라는 억지를 쓰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의 대속사상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으로 인간의 원죄가 필요했던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것처럼 아리송하기는 하지만, 하여간에 예수는 예언된 메시아가 아닌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더라도(근데, 뭘 회개해?) 예수를 믿거나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있지도 않는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우리를 별로 사랑하지도 않은 하나님이 예정에도 없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세상에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알 수 없다. 독생자이며 속죄양이라고 자처하는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됨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갖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든 비유로 해석하든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 문서비평, 양식비평 등등 갖가지 성서비평 방법들은 고대 중동의 역사, 문화, 정치, 외교, 경제 등에 대한 것과 그들의 패러다임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될 지 모르나, 하나님의 존재나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증거하는 데에는 전혀 무용지물이다. 예수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좋은 말을 많이 했던 성현 중의 성현이며, 개혁가이고 학자이며, 당시의 불합리한 권위와 전통에 대한 안티였을지라도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신앙의 이유나 기반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자신을 포장(위장이 더 적절한 표현이지만)하여 인류를 괴롭혀 왔고 지금도 괴롭히고 있다. 그리고 성경을 왜곡하여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다. 여러 차례 인용된 토인비의 말을 보자.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해석하는 방식을 살펴본 유대인이라면, 기독교인들이 구약을 기독교의 예언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무모하게 구약의 명백한 원뜻을 변형시켰는가를 알고서 놀라움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