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과 원죄의 모순점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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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8:49
영혼과 원죄의 모순점
작성일: 2002/11/12
작성자: 몰러
인간과 동물, 그리고 영혼과 원죄
ㅇ 인간창조의 의미
기독교를 비롯한 많은 종교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영혼의 유무로 판정한다. 이때 기독교의 교리가 얼마나 독단적이고 자만에 가득한지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관념이다. 이는 인간창조에 대한 것이나, 이들이 자연보호나 동물보호 활동을 하면서 보였던 한계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연에 동화되려는 노력보다는 지배와 제왕적인 보호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항상 실패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대로 자연을 환원시키자'는 캐치프레이즈로는 자연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인간창조의 의의를 살펴보자.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과정과 방법을 통해 창조되었다. 먼저 인간의 창조는 삼위의 엄숙하고 특별한 계획에 따른 것으로 인간 창조의 중대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으로써 그 고유의 모델이 하나님이며, 따라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또한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나, 인간만은 친히 당신이 직접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써' 창조하셨다.
다른 동물은 단순한 육체적 생명만이 있으나, 인간만은 육체와 영혼의 생명을 아울러 가지면서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심으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셨다.
필자는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이 관념들이 심각한 자위적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현실을 잘 관찰해 보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창세기의 구절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창세기의 인간창조에 나타난 관념과 영혼과의 관계가 가지는 문제점을 논의해 보자. 논의의 편의성을 위해 일단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이때 삼분설(인간이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설)이냐, 이분설(인간이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었다는 설)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특별한 계획에 의한 인간창조는 창1:26의 “우리가”, “∼하자”라는 말에 근거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라는 말에서 신성의 유일성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신의 삼위로 간주한 모양인데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사후 수 백년이 지나서 불공정한 투표에 의해 결정되었으므로, 삼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신들(엘로힘)의 합의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삼위가 되었든 엘로힘이 되었든 간에 “∼하자”는 식으로 의도를 밝혔으므로 어떤 계획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계획이라는 것은 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짓는 것과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짐승을 다스리게 하는 권한을 갖게 하려는 의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무슨 전자회로처럼 공진주파수를 맞추는, 즉 임피던스 매칭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인간만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교리는 인간만이 영혼을 지닌다는 교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과 영혼의 존재여부는 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껍데기를 지었을 뿐이지 영혼까지 지어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니까... 물론 기독교인들은 모든 짐승을 다스리려면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하고, 또한 코에 불어넣어진 생명의 기운이 영혼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나온다면 달리 반박할 길이 없다. 또 아까 영혼이 있는 것으로 하자고 잠정적으로 합의했으니까...
한때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이 기독교인들에게 각광받은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생각한다는 것이 하나의 존재(자아)를 입증한다는 것... 이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표현하는 말이 어디 있겠는가?
ㅇ 동물들의 행동 - 감성/이성과 영혼과의 관계
그러나 멀리 볼 것도 없이 필자가 주변에서 듣고 보거나 생활에서 겪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들은 간단히 부정된다. 동물에게 영혼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것부터 살펴보자.
필자는 집에서 요크셔 테리어 한 마리를 젖먹이 적부터 키워오고 있다. 배변훈련, 짖는 것을 자제하는 것(애견가들이 가장 곤란을 느끼는 것이 강아지 소음으로 인해 이웃으로부터 원성을 듣는 것이다), 사람의 밥상에 덤비지 않는 훈련 등을 시키면서 느끼는 것은 강아지가 단순히 조건반사에 의해서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훈련과정에서 필자는 주로 악역(잘못 했을 때 약간의 체벌과 함께 혼내는 일)을 맡았고 어부인은 주로 밥을 주고, 상으로 간식을 주고 또 스킨쉽을 하는 등 좋은 역만 맡았다. 그럼 강아지는 주로 어부인에게만 꼬리치고 안기고, 필자에 대해서는 두려움만 가지고 슬슬 피해야 할텐데 뜻밖에도 필자에게 안겨서 낮잠을 청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 절반 정도는 되었다. 물론 필자가 소리를 지르면 귀를 눕히고 꼬리를 가랑이 사이로 넣기는 하지만 조금만 다정하게 불러도 금방 기가 살아서 마구 기어오른다.
또 어떨 때 보면 3살 박이 어린이보다 더 현명하게 행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어 인형 같은 것을 물어뜯다가도 사람이 보이거나 목소리가 들리면 인형을 감추고 화장실 변기 뒤에 숨어서 눈치를 본다. 이때 인형을 물어뜯는 것은 본능에 의한 것이겠지만, 아직 실행의 예고도 없는 처벌을 미리 두려워하며 숨는 것은 본능 이상의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간식을 냉장고에서 꺼내자마자 이 녀석은 제 밥그릇을 물고 냉장고 앞으로 달려온다(이것은 딱 세 번, 그것도 냉장고 문을 열면 밥그릇을 가져오도록 훈련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난 후부터 필자가 냉장고에서 다른 음식을 꺼냈을 때는 본체만체하였다.
만약 이런 것들까지도 본능에 의한 행동이라고 한다면, 유아기의 인간도 본능에 의한 행동밖에 하지 않는 셈인데 그럼 유아들에게는 아직 영혼이 없다는 말인가?
재작년 월간 과학잡지에서 본 것인데 코코라는 고릴라에게 수화를 가르친 학자가 있다. 이런 시도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종교계는 비아냥만 했었더랬다. 앵무새에게 숫자카드를 물고 오게 하는 조건반사적 반복훈련 이상의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동물에게 무슨 감성이 있는가, 동물에게 본능적인 것 빼고 무슨 의사표현 능력이 있겠는가... 그런데, 코코는 40여 가지의 단어를 조합해서 두 단어 이상의 문장을 만들어 내고 또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이런 문장 조합 중에는 가르친 적이 없는 것도 있었다. 이 보다 앞서서 주목할 점은 코코가 추상적인 관념(배고프다, 춥다, 기분 좋다. 슬프다 등)도 적절히 사용했다는 것이다. “코코 배고프다 바나나(줘)”, “코코 슬프다 안아줘” 이런 조합이 과연 본능에만 의존해 가지고 가능한 것일까?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영혼의 존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등적인 사고능력으로 판가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자유의지나 종교성이라든지 철학하는 두뇌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는 강아지나 고릴라가 보여 준 것은 영혼을 가졌다고 보기엔 수준미달이라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영혼의 존재는 부정되고 만다. 왜냐하면 영혼의 존재가 대뇌의 용량에 좌우된다는 결론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또한 뇌사자의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하는 것에 반대해 왔던 기독교계의 도덕적 근거도 훼손되고 만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 수 있다는 예수의 말은 무효가 될 소지도 안게 된다.
결국 영혼의 존재여부는 사고능력이나 감성의 유무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ㅇ 영혼과 원죄와의 관계
인간의 영혼과 원죄와의 관계는 어떨까? 일단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하므로 따라서 원죄도 없으며 단지 인간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동물들도 휩쓸렸다고 하자.
영혼에 기원에 관한 설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이 설들과 원죄와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자.
먼저, 영혼선재설은 오리게네스가 주장한 것으로 이미 천상에 창조되어 존재하고 있는 각인의 영혼이 인간의 출생 또는 수태시 육체에 스며든다는 견해이다. 물론 출생보다는 수태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낙태를 반대하는 것이니까... 이 설의 문제점은 많다. 기독교계의 반론을 인용하자면, 영혼선재설은 영혼만으로 존재할 때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육체가 영혼의 귀찮은 부가물로 보고 있으나, 인간은 육체가 있을 때 인간일 수 있고, 그러기에 기독교인의 최대 소망인 부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영혼의 선재는,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며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죄책을 지니고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모순된다. 또한 인간은 자기의 영혼이 선재했었다는 하등의 기억이 없으며,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유기적 관계를 느낄 뿐만 아니라 영육의 분리를 공포로 받아들인다. 결국 영혼선재설은 원죄를 부정하므로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잘못된 것이다.
다음으로 영혼유전설이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주장이다. 어거스틴에 의해 제기된 이 설은 아담 창조시에만 하나님에 의해 영혼이 불어넣어졌으며, 그 이후에 인간은 조상의 허리(히 7:9,10), 즉 성교에 의해 영혼과 육체가 번식된다는 상식적인 견해를 내린 것이다. 개신교인들의 반박은 다음과 같다.
이 설의 문제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하는 것이며,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영혼을 유전 받았다면, 그의 무죄성은 파괴되어 성육신 교리를 부정하게 된다. 또 영혼은 비물질적이므로 분할될 수 없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혼 중 누구의 것을 유전 받는지에 대하여 명확하지 못하다. 영혼이 부모의 유전으로 말미암는다면, 자식들은 모든 조상의 축적된 죄악도 물려받는 셈이 된다. 그러나 인간은 최초 조상 아담에 의한 원죄만을 물려받을 뿐이다. 즉, 원죄 이외에는 연좌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일전에 말씀보존학회 떨거지는 정액이란 말이 고상하지 않다고 생각(그때 필자는 좃물이라고 썼음)했는지 몰라도 피에 의해 영혼이 전해진다고 주장하였다. '피를 나눈 형제', '한 핏줄' 같은 개념이 바로 이것을 뜻한다면서, 원죄를 범하기 이전엔 피의 색깔이 흰색이었거나 투명하였다나? 관념적인 표현을 물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셈인데, 많이 양보해서 유전자에 대한 학문을 고려했을 때는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영혼유전설의 헛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가톨릭에서는 영혼유전설을 따르되 마리아의 경우 수태고지를 받을 때 축복도 함께 받으면서 원죄에서 벗어났다는 무염시태설을 주장함으로써 약점을 벌충하려 한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예언을 부정하는 약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지만 세 가지 영혼기원설 중에서 가장 그럴 듯 하다. 하지만 개신교인들로서는 이제까지 마리아의 순결성을 씹어왔던 행적 때문만으로도 이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혼창조설이 있다. 교부 제롬과 아퀴나스가 주장한 것으로 영혼은 정액 또는 피가 아니라 사람마다 새롭게 창조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지만 그것의 기원의 시기가 각각 다르다고 하는 성경의 언급(창 2:7; 전 12:7; 사 42:5; 슥 12:1; 히12:9)과 일치한다. 대부분의 기독교파가 이 설을 수용하는 이유는 영혼선재설이나 영혼유전설의 약점을 훌륭하게 보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원죄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면 이것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안게 된다. 도대체 원죄가 전달되지를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을 창조할 때마다 원죄를 주입하고 계신 것인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원죄의 굴레를 씌울 때보다 더 극심한 비도덕성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죄는 육체, 즉 정액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영혼유전을 부정하다 보니 원죄가 육체로 전달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도대체 원죄는 어떻게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이 영혼을 부정할지, 원죄를 부정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원죄를 부정하면 예수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므로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거나 무종교인이 되어야 할 판이다. 그리고 영혼을 부정하면 기독교는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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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신학대 1학년 교재를 들춰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디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