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 논리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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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분석철학, 논리철학

몰러 0 2,816 2005.06.20 15:13
분석철학, 논리철학    
  
 
 
작성일: 2001/12/18
작성자: 몰러
 




분석철학 또는 논리철학

이제 가장 형이상학과 거리가 먼 철학이며, 가장 실증적이며, 가장 과학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명료성을 우선시 하는 이 철학의 유파에 속한 자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였습니다. 어제 "창세기 삐딱하게 보기"를 통해 이 철학적 방법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아주 허접스런 그 글에 대하여 지니도사님의 불평(?)이 있었는데... 안티들이 저수준의 교인을 대할 때는 지니도사님의 지적대로 조롱 이상의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진지하게 대하려고 시도해 봤지만 벽보고 외치는 격이니까요. 그럼, 그런 교인들을 가르치고, 충고하고, 꾸짖을 자격과 의무는 누구에게 있을까요? 지니도사님의 불평대로 하자면 안티들은 자격도 의무도 없을 것입니다. e-안드레아님이나 요한 마리아 비안네님의 경우도 개독들에게는 이단시되는 가톨릭 교인이라 그 분들의 말씀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구요.

사랑더하기(NEW), 호이(오가형님, 사이코, 김대중 등등 무수한 아이디), 여눈꼽(여 야곱, 접근금지 당하자 무수한 아이디로 접근을 시도한 꼴통... 오죽하면 지 홈피의 공동운영자(?)한테까지 면박을 먹을까...), 이성희(반드시 다음 단어중 하나 이상이 포함되어야만 그녀의 글임이 인증됩니다. 쥐뿔, 개뿔, 빨X이, 공산당), 우주영(수많은 안티들로 하여금 인간과 인간의식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했던 말씀보존학회의 망나니로 대표 아이디는 hufsanr, 무수한 아이디를 사용했었으며 요즘은 오지 않습니다) 등등 안티들에게 꼴통으로 일컬어지는 일그러진 신앙, 독단에 빠진 신앙을 가진 자들을 교화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아! 우주영만은 혹시 만나게 되더라도 엉기지 마세요. 지니도사님도 이 넘에게는 변개된 성경으로 혹세무민하는 사탄의 종자일 뿐이니까요) 이런 사람들의 사례는 다른 교인들에게도 교훈이 되어야 합니다. 눈팅만 하지 마시구요 ^^

쓸데없이 서론이 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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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와 프래그마티즘(pragmatism)으로부터 니체와 허무주의에 이르기까지 19세기의 철학은 철학이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하여 의견이 다양하게 분리되었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복합성과 변화와 발전의 급격한 속도 때문에 사회사상과 철학이 좀더 복잡해졌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는가 하면, 니체는 철학을 분리시켰고, 베르그송(개인적으로 몰러가 젤 싫어하는 철학자)은 철학을 재건하였다.
19세기 말기는 철학의 대혼란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으나 그런 인물이 프리드리히 루드비히 고틀로프 프레게(1848∼1925)임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프레게가 현대 논리학, 수리 물리학 그리고 지금 분석철학이라고 부르는 분야의 기초를 세운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인식되었다. 프레게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버트란드 러셀이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프레게에 대해 러셀은 프레게의 이론으로써 순수수학은 논리학의 일부임을 증명하려고 했다.

프레게는 수학을 새롭고도 보다 확고한 기초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수학으로부터 엉성한 추론과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제거했다.
그는 숫자에 대한 새롭고 엄격한 정의를 내렸다.
그는 수학적 명제가 선험적 종합명제라는 칸트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보였다.


프레게는 논리학의 혁명을 이룬 사람이었다. 나중에 많은 오해(수학이 철학에 귀속되었다는 것에 대한 찬반양론)를 낳은 그의 말을 인용해 본다.

수학은 신비스러운, 분리된 실체가 아니다. 수학은 단지 명쾌하게 사고하기 위해 우리가 고안해 낸 것에 불과하며, 논리학의 한 분야일 뿐이다.

그의 이 주장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수리논리학을 언어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수학의 공리처럼 논증이 어떻게 일상언어와 흐리멍덩함에서 벗어나 엄격하게 제시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의미의 구성에 관해 결정적인 구분을 하였는데, 즉 의미와 지시체간의 차이점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한 문장의 의미는 바로 하나의 명제이고, 동일한 문장이 언급하고 있는 것이 그 문장의 진리값인 것이다.(이것이 철학자가 성경을 부정하게 한다. 만가지로 해석되는 성경은 일단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두산"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한민족에게는 민족의 영산이지만, 과거 만주인들에게는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고, 중화족에게는 꽤 높은 산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다양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지시체인 백두산은 칼데라를 가진 2700여 미터의 높이를 가진 하나의 산일 뿐이다.
정리하자면 두 가지 중요한 논제가 이러한 의미와 지시대상의 구분으로부터 도출된다.

1. 주어진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의 부분들의 의미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
2. 어떤 낱말이든지 오로지 문장 전체의 맥락 속에서만 한정된 의미를 갖는다.


추론의 사고과정을 체계화하려는 프레게의 시도, 사고 행위를 정리하려는 그의 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철학과 수학의 연결 관계 역시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런 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과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함께 오래 전에 시작된 것이다. 19세기 부울이나 드 모르간 같은 논리학자들과 칸토르(집합론)나 페아노(기호논리학 창시자)와 같은 새로운 유파의 수학자들은 프레게의 사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프레게의 뒤를 이어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을 결정적으로 정리하려고 했는데, 집합의 용어로 수의 논리적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대부분의 집합들은 자기 자신을 원소로서 포함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모든 해마의 집합은 해마가 아니다. 어떤 것은 그렇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의 집합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런 집합은 그 자체의 원소인가 아닌가? 만일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이 되고 만다.
즉, 만일 그것이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이고, 만일 그것이 그것이라면 그것이 아니다.

이 고약한 러셀의 역설을 우리가 수학시간이나 퀴즈대회 때 들어본 역설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자기자신의 머리를 깎지 않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머리만 깎아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할 때 이 이발사는 자기자신의 머리를 깎을 수 있는가 없는가?

가련하고 늙은 프레게는 이 지점에서 포기하였지만, 그 반면에 러셀은 그의 유형이론을 가지고 다시 시도하였는데, 이 이론은 자기 언급에서 발생하는 이와 같은 이상한 함정을 추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에 쿠르트 괴델이 그의 유명한 "불완전성의 공리"를 가지고 나왔는데, 이 공리는 이전까지의 전체의 구상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산술을 포함한 그 어떤 체계에도, 체계내에서는 증명될 수 없는 참인 진술들이 있다.

하지만 별로 해결책을 찾았다고 보기 어렵다. 이후 프레게의 분석철학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다시 정의되고 다듬어진다.

여기에서 고약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철학인 분석철학의 학파의 계보(?)를 잠시 훑어보자.

ㅇ 논리적 실증주의 : 비엔나 써클, 슐릭, 카르납
ㅇ 논리적 원자론 : 러셀, 비트겐슈타인
ㅇ 논리주의 : 러셀, 화이트헤드(진짜 머리가 하얗다. 주변머리가 조금만 남아있는 아저씨), 괴델
ㅇ 일상언어철학 : 비트겐슈타인


프레게에 의해 시작된 논리적 분석은 분석철학이라고 부르는 사상의 학파를 형성했는데, 이 학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학파는 많은 작은 줄기를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작은 줄기들은 새로운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프레게, 러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나온 분석적 접근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위의 모든 유파에게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는 철학의 모든 문제들을 풀었다고 주장하였다.(글쎄...)

내 꿈은 극도의 정확성을 지니고서 모든 것을 진술할 수 있는 완벽한 논리적 언어를 창안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로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신이라는 개념처럼 뭔가에 대해 아무것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은 사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철학은 명료성입니다.

비트겐슈타인으로 인해 많은 철학이 구문론으로 환원될 수 있음이 분명해졌지만, 사실 언어구조를 분석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것이었다. 카르납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실제로는 구문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말의 구문을 추려낼 수 있다면,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은 해결되거나 또는 해결될 수 없음이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치, 만일 우리가 분명하다면 철학은 추려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철학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처음에는, 세계가 단순한 사실들(원자들처럼-그래서 논리적 원자론이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도 많은 단순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언어는 사실을 그려내거나 논리적 진술을 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의 언어 이론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은 언어에 있어서 어떻게 추상적인 관계가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바꿔 말하면, 완벽하고 형식을 갖춘 언어를 창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여러분이 비트겐슈타인을 이해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철학을 포기할 것이다.

나의 논증은 일종의 사다리와 같은 것인데, 일단 올라가면 던져버려야 할 사다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논리실증주의는 힘을 얻게 되었고, 비엔나 써클은 논리실증주의를 대표한다. 여기에는 카르납, 슐릭, 바이스만, 프랑크, 크라프트, 카우프만, 파이글 등이 속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분석은 물론 논리학을 찬양했으며 전적으로 헤겔을 싫어하였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저 유명한 검증 논리를 도입하였는데, 칼 포퍼는 이를 그 자신의 반증원리로 변경시켰다.

"어떤 명제의 의미는 그 명제의 검증 방법이다."

1. 명제는 참 또는 거짓이라고 증명될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를 지닌다.
2. 진리의 논리적 형식들과 사실적 형식들이 있다.
3. 사실적 진리들은 경험(검증)을 통하여 증명될 수 있다.

반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다. 참인가 거짓인가 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처럼 철학을 포기하였으나 세계 전역에 걸쳐서 분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언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푸는 데 실패함으로써 논리실증주의는 제자리걸음을 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1933년부터 1935년에 걸쳐서 쓴 "청갈색 책"에서 철학적인 복귀를 하였다.

완벽한 언어에 대한 나의 탐구는 궁지에 이르고 말았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실재의 한계다. 지금은 우리가 언어를 일종의 게임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규칙을 어린 시절에 훈련을 받아서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일상 언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우리 앞에 갖다 놓고 아무 것도 설명한다거나 연역하지 않는다.

말의 의미는 그 말의 쓰임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자신을 치료사로, 즉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하려는 욕구를 치료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일상 언어철학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남아 있다. 그중 생존(?)하고 있는 유명한 대표자가 A.J.에이어다.

분석철학, 논리철학은 결국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무릎을 꿇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분석철학, 논리실증주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가진 어쩌면 지엽적일지도 모르는 결함들을 쳐내거나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논제에 대하여 결함이 발견되면 분석하여 솎아내고 분석이 불가한 것은 그 논제 자체에게 남겨두는 것이다.
뭔 말인지 쉽게 설명하자면, 늘상 안티들이 개독들을 공격할 때 인용했던 말들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지전능과 선함이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라든지, 제1원인론의 문제점을 비평한다든지 하는 것인데, 그러면서 신(여기서의 신은 하나님(야훼)이 아니다)의 실존 여부는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토인비처럼 범신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불가지론에 가깝다. 한편, 칼 포퍼적인 논증을 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러셀을 제외하고는 종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딴지를 건 논리철학자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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