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사람을 "과연" 선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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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러님의 칼럼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과연" 선하게 하는가?

몰러 0 2,443 2005.06.20 16:42

종교는 사람을 `과연` 선하게 하는가?    
  
 
 
작성일: 2002/04/11
작성자: 몰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선하다고 우기면서 반대로 비기독교인을 범죄자 내지는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발언을 했다가 나한테 몇대 맞고 눈탱이 밤탱된 돌탱 때문에 끄적여 봤습니다.

좀 깁니다. 그렇다고 언제는 안 길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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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무오성, 절대적 진리로서의 기독교리, 완벽한 존재인 하나님, 지극한 사랑의 화신 예수님 등 강조의 오류의 극치인 주장들을 이제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섣불리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적극적인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기독교 반대자들의 논리에 밀렸을 때나, 기독교의 절대성을 마음속으로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간에 온건하게 기독교리를 주장하려는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주장하기를 즐겨한다. 대부분 다원적인 주장들이다.

ㅇ 과거에 기독교가 많은 죄악을 저질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기독교인들이, 아니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비종교인보다 높은 도덕성을 갖고 있다. 불교나 이슬람교가 기독교보다 낮은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주장은 당신이나 나나 함부로 할 수 없다. 어쨌든 도덕적 결과를 보았을 때 종교를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는 그 중에서 기독교를 선택한 것일 뿐이다.

ㅇ 현대인은 쫓기듯 살고 있으며,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갖기 힘들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준다. 성경, 불경, 코란 등 경전을 한번 읽어 보라. 마음이 차분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ㅇ 종교는 사람을 정서적으로 안정감 있게 만들어 주고, 또 덕 있게 만들어 준다. 과거에 그랬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기독교는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 주도권을 쥐었을 때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 하지만 지금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을 보라. 사려 깊고, 경건하며, 잘못된 길로 가다가도 종교적 가르침에 따라 회개하고 자신을 바로잡고 있지 않은가? 물질만능주의로 인간들은 서로 다투고 있고,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신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핵이라든지 첨단무기는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현대에는 이를 중화시켜줄 수 있는 종교의 역할이 강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범죄자에 대한 통계를 보라. 종교인보다는 비종교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혼자서 교양과 도덕성을 쌓을 수도 있지만 종교는 이를 훌륭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나는 생각한다.

ㅇ 봉건사상에 물들어 있던 한국에 인류평등, 박애, 자유 같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상들은 기독교가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미신을 타파하는데 기독교의 역할은 매우 크다. 교리에 일부 허점이 있고, 또 이로 인한 잘못들이 저질러졌고 앞으로도 저질러질지 모르지만 기독교가 이 사회에 공헌한 바를 무조건 무시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들을 살펴보라. 거의 모두 기독교적인 국가들이지 않은가? 미국을 예로 들면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책에 손을 대고 선서를 하며, 재판정에서 증인들은 성경책에 손을 대고 진실만 말하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는가? 찬란한 문화를 가진 프랑스, 합리적인 독일의 국민성은 기독교에서 기초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여성을 억압하고 극소수가 부를 독점하는 나라들은 어디인가? 탈레반 시대 아프간 여성들은 얼마나 핍박받았는가? 우리나라만 해도 동성동본의 결혼이나 여성의 호주 승계를 반대해 왔고 지금도 반대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이상은 비근본주의적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에 호감을 가진 비종교인들이 주장 또는 변호하는 내용들을 요약(?)한 것이다. 일견 그럴듯한 말이며, 웬만한 기독교 반대자들도 기독교가 저 정도만 된다면 안티를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 주장들과 그것에 동조하는 것은 근본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하다. 역사는 저렇게 포장된 기독교가 내부적으로 더 곪아 있었고, 더 심한 악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보았을 때 영화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독실한 신자로 나온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성기는 착실하게 십일조를 하고, 아주아주 절실하게 기도를 하였으며, 그의 회개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가 부패경찰인 점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제 구체적으로 저 위에 나열된 주장들에 대해 반박하고자 한다.


ㅇ 과연 기독교가 사람에게 높은 도덕성을 갖게 하는가?

기독교인들은 처음에는 기독교가 타종교보다 훨씬 도덕적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기독교만이 죄악에 물든 세상을 정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계역사는 기독교보다는 타종교가, 특히 동양종교가 훨씬 도덕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신론자/무종교인 보다는 종교인이 도덕적일 가능성이 높다 해도 그 중에서 기독교가 가장 높은 가치와 효용을 갖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점을 들어 반박하면 기독교인들은 위에 예를 든 것처럼 말한다. 그래 기독교가 최고는 아닐지라도 하여간 종교는 사람에게 도덕성을 심어준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래도 기독교가 가장 좋아서 받아들인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일단 개신교만 살펴보자. 개신교가 가진 가톨릭과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선행보다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일평생을 남을 돌보고 봉사한 사람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헌신한 애국자보다, 아니 취객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사람보다 더 높은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 개신교에게 있다. 평생을 사기치고, 도둑질하며, 강도/강간하여 자기 집보다 교도소에서 보낸 기간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여 목사가 된 경우다. 사실 따지고 말해서 폭력배에 진배없지만 영화나 소설에서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는 시라소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잘했고 못했고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말년에 회개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개신교인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비종교인, 타종교인들이 이것을 보았을 때, 그러면서 개신교에 호감을 가지게 된 때는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도덕적인 게으름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지랄 떨다가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이 교리는 세상을 황폐화시킬 것이 자명하다. “날 그냥 냅둬. 이렇게 살다가 뒈질 때 되면 교회 나갈께. 그때 진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될꺼 아녀?” 이 말이 그냥 농담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럼 가톨릭은 문제가 없을까? 개신교보다 조금 나아 보일 뿐 매일반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원죄론이다. 이 원죄는 도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짓지도 않은 죄인데다가 인간의 도덕률과는 동떨어진 이것에 대한 기독교의 대비는 신에게 귀의하는 것만으로 해결된다. 즉 원죄를 벗기 위해서 행해야 할 회개는 부도덕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일단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니다. 가톨릭은 믿음만이 아니라 선행도 중요시한다”는 말은 방금 필자가 말한 것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필자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선한 자가 고통받고, 악한 자가 흥하는 것에 대하여 기독교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만든 것이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이었나? 하지만 지옥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강박감이 기독교인들은 도덕적으로 만들 수는 있을지 몰라도 비기독교인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기독교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악해질 것이라는 결론을 내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참으로 기묘하게도, 기독교인들의 기대와 동떨어지게시리 종교가 극렬할수록, 믿음이 깊을수록 문제가 많았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교리의 절대성이 물렁물렁해진 가톨릭이 개신교보다 문제가 덜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렇듯 종교의 독트린이 약화될수록 도덕성이 높아진다는, 기독교인에게는 역설적인 결과를 놓고 봤을 때 기독교와 도덕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도덕적인 종교인이 많아 보이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등 일반적인 도덕률이 교리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지극히 당연한 것을 하느님의 명령으로 포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웃의 아내를 사랑(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하기 위해서 이혼을 거부하는 그녀의 폭력남편을 살인할 수밖에 없는 역리에 처했을 때 종교적으로는 아무런 해답도 제시할 수 없다. 일반적인 도덕론 이상으로는 말이다.

사실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이는 교리가 표방하는 도덕과 사회가 강제한 도덕이 합치될 때뿐이다. 교리와 맞지 않으면 법과 도덕보다는 교리를 우선시 한다. 이는 범죄자가 법과 도덕보다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우선시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한편 “이데올로기가 물러난 자리에 종교와 민족이 있다”는 말을 음미해보자. 극한 이념 대립의 시대보다는 과거 신앙의 시대와 현재의 다원성의 시대에 전쟁이 더 잦다. 그리고, 그 전쟁은 더욱 비인간적인 양상을 띤다. 역사에서 종교적인 이유의 전쟁을 제하면 절반으로 줄어든다.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종교전쟁에 대해 인간의 이기심의 발로이지 종교에 책임을 씌울 성질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순간 종교는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다. 종교는 전쟁방지에 아무 역할도 못하는 군더더기에 불과해지기 때문이다.


ㅇ 종교만이 사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하는가?

대부분의 종교 경전들은 경건하다. 해당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조차도 경전을 읽다보면 경건해짐을 느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늘상 주장하는 말이 있다. “하느님을 머리로 찾지 말고 가슴으로 느껴라”라는 말이다. 이성보다는 느낌과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의 특성이다. 이 말은 엄청나게 문제가 많은 말이지만 일단 그것을 수용한 사람에게는 그를 한없이 경건해지게 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종교경전만이 사람을 반성케 하고, 경건해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영화나 소설도 사람을 경건해지게 할 수 있다. 심지어 무협지나 판타지 소설도 그럴 수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가 히트했는데, 소녀들뿐만 아니라 소년들의 마음도 차분해지게 했다. 인류가 남긴 수많은 고전들, 명작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채근담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릴케의 시를 음미해 본적이 있는가(몰러는 해당 엄따. 덜떨어진 공돌이가 돼놔서 시는 도통)? 남회귀선을 읽어보았는가? 미스터 굿바(끝내주는 거시기)를 찾아서는? 미술을 보자. 성화만이 경건한가? 피에타 상만이 한없는 사랑과 안식을 표현하는가? 음악은? 헨델의 할렐루야 오라토리오는 솔직히 명곡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운명에 비하면 한참 내공이 딸리는 음악이다.

오히려 필자는 성경이 사람을 차분하고 경건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불만이다. 그 방식 때문에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스스로를 왜소한 존재로 각인시키고는 신의 권능과 거룩함을 강조하여 신 앞에서만 경건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면 자신이 더 우월적으로 군림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과학만능주의가 망쳐놓은 자연을 되살리겠다고 하지만 거기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단지 인간의 잘못으로 더럽혀진 자연을 신이 창조했던 아름다운 상태로 되돌리겠다는 마음 뿐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하는 환경운동의 실체다. 일단 인간을 전적인 죄인으로 만드는 것 말이다. 기독교인들은 비기독교인을 한없이 불쌍하게 생각한다. 반대로 목사에 대해서 한번 존경을 품게 되면 그 목사가 어떤 짓을 저질러도 눈감고, 대신 변명하고, 읍소하는 빠순이적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필자는 성경이 짜집기에다 협잡으로 가득하다는 이유보다는 이런 점을 들어 쓰레기로 치부하는 바이다.


ㅇ 물질만능주의, 인간의 자만심에 의한 생존위협, 범죄의 증가에 기독교가 과연 책임이 없을까?

과학문명으로 살기 편해진 세상에서 신이 필요 없게 된 인간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물질만능주의자가 되었다는 주장은 원인오판이다. 그리고, 종교인이 비종교인보다 범죄자가 적다는 말은 통계해석상의 오류이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현재 서양에서는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고 있다. 이것은 분명 과학문명의 발달이 그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삶에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신을 버리고 물질만능주의자가 된 것일까? 아니다. 신을 버렸기 때문에 물질만능주의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자유사상가와 계몽주의자들 노력 덕분에 서양인들은 과학을 발전시키고 문명의 꽃을 피워온 것이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가진 오류를 자각하게 되고, 기독교의 끔찍한 역사적 범죄를 인식하게 되었다. 당연히 서양인들은 하나둘씩 기독교를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버린 후 다른 가치관이 이를 채우기도 전에 사람들은 과학문명이 주는 편리의 달콤함에 취해버렸다. 다른 종교나 사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덕이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부와 편리함을 더 많이 취하기 위해서 자본주의가 탄생했고, 이것은 배금주의로 발전했다. 이 세상에서 무신론자나 무종교인이 가장 많은 곳이 어디인지를 보면 자명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버리면서 물질만능주의자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 것이다.

더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은 이렇게 기독교를 버렸으면서도 정작 서구인들의 내면에는 기독교가 가진 우월감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면서도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제국주의로 나타났고, 기독교는 소멸하는 대신 제국주의의 첨병 노릇을 한 것이다. 캡틴 쿠크가 오세아니아 어느 섬에 도착할 무렵 한 말이 있다. “저 야만스런 토인들에게 하나님의 군사인 우리들의 정의로운 힘을 쓰자.” 그러고는 토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노근리 학살 같은 것은 이러한 사고방식의 연장이다. 최근 미국 대통령 부시가 지껄이는 헛소리들도 모두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종교와 범죄에 대한 상관관계를 논하기 전에 다른 소재를 가지고 통계의 맹점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970년대에 미국 어느 대학에서 초등학생들의 신체와 학업성취도에 대해 비교한 적이 있다. 결과들 중에서 학생의 발크기와 수학성적과의 상관도는 무려 0.74인 통계도 있었다. 즉 발이 큰 학생은 대체로 수학성적도 좋았다는 말이다. 이것을 조사했던 석사과정 학생은 이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결론을 낸 레포트를 작성하여 교수에게 제출했는데, 교수는 여기에 대해 D로 평가했다. 발이 크다는 것은 신체발육 상태가 좋다는 것이고 따라서 두뇌도 일찍 발달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성장기의 어린이에 한해서 말이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은 학생의 분석상의 실수를 염두에 두고 종교와 범죄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면 간단하게 이해된다.

이 시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종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심을 심어줬기 때문에 범죄자가 적게 나온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라. 범죄성향이 있는 사람, 반사회적인 사람은 종교를 가지지 않으려는 경향이 크다는 점을 말이다. 결국 종교인보다 비종교인의 범죄율이 높은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 아닌가? 한편 범죄자들이 뒤늦게 종교를 가진다고 해도 나아질 가능성은 반반이다. 대도 조세형이 대표적인 케이스 되겠다. 그리고 종교인 중에서 정말로 큰 사고를 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살인, 강간은 성직자들도 저지르는 범죄이다. 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성직자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종교는 어떠한 변명도 해서는 안된다. 흔히 기독교인들이 하는 “인간이 잘못이지 교리는 문제없다”라는 변명은 얼마나 불쌍한 하소연인가? 교리의 절대성이라도 부각시키지 않았으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는 변명인데 말이다. 교리를 핑계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종교는 몇 안되는데 대부분은 기독교 계열이다. 한편 범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회장직을 세습하려는 목사, 부를 축적하는 목사의 문제도 도덕면에서는 완전히 빵점이다. 뉴스엔조이 같은 곳에서는 이것에 대해 비성경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신들도 반대한다고 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목사도 자신의 행위를 변명할 때 성경으로 근거를 제시한다는 점을 묵과하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말이다.

꼭 기독교가 아니라도, 또 종교가 아니라도 사람을 현명하고 사려 깊게 만들 수 있으며, 이타적으로 만들 수 있다. 또 핵무기를 만들고 자연을 파괴한 사람 중에 종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종교인 중에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은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경우는 베버의 사상으로 인해 종교와 부를 동시에 취하는 것에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학살극을 상당히 많이, 그리고 자주 보여주고 있다.


ㅇ 인본주의적인 요소들은 과연 기독교가 제공해준 것인가?

이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착각이다. 이 세상 역사에 있어서 이처럼 거창한 착각도 없었다. 기독교가 권력을 쥐고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암흑이었다. 박해와 화형, 마녀사냥, 노예제도, 성직자의 축첩과 간통... 인본주의는커녕 신본주의도 아니었다. 신의 이름을 빙자했을 뿐이다. 어쨌거나 신본주의를 벗어나 자유사상가와 계몽주의자들의 노력 덕분에 인본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 서구세계는 동양에 비해 몇백년 뒤떨어진 문명을 급속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합리적이고 냉철한 관찰과 실험정신이 과학을 발전시켰고 이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즉 간단히 말해 기독교를 실질적으로 버리면서부터 서구세계는 발전이라는 것을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정서라는 것을 갖게 되고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인식하게 된 것, 법률의 개선과 자유주의 전파, 성차별 및 인종차별 완화와 노예제도 폐지,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 등 인류가 한 단계씩 발전을 할라치면 조직적으로 반대해온 것은 다름 아닌 기독교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유전자 지도 작성, 안락사, 강간에 의하거나 기형아를 위시한 선천성 질병이 뻔한 태아의 낙태, 주5일제 근무, 노조활동 등등 기독교가 교리를 앞세워 반대하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기독교가 미신을 타파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코웃음만 나온다. 기독교가 미신을 반대한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십계명을 근거로 다른 종교와 미신을 억압하려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시대에 미신이 비교적 적었다고 볼 수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동양권이 가지고 있던 민간신앙이나 미신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중세유럽에는 더 많은 미신이 있었다. 그것도 신의 이름을 걸고서 말이다. 예를 들면,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독일 어느 주에서는 한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면서 쥐와 키스를 하면 악마가 인간에게 키스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병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물론 그렇게 했던 사람들은 모두 새까맣게 되어 죽었음은 불문가지다. 서양의 민담이나 동화는 거의 모두가 미신에다 스토리라인을 붙여서 만든 것이다. 지금은 기독교가 그것들을 비기독교적이고 비성경적이라고 하고 있지만 당시 유럽에서는 이것들 모두가 교회의 이름으로 용인되었던 것들이다.

노아의 홍수를 사실로 믿는 것이나 홍해가 갈라졌다고 믿는 것 같은 먼 옛날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자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느니,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큰 화를 입을 뻔한 것을 면했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미신이 아닌가? 닥종이에 뻘건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부적만 없다 뿐이지 기독교가 하는 작태가 골목 동양철학관에서 하는 짓과 뭐가 다를까? 개역판 성경에 뻘건 칠이 되어 있는 이유를 아는가? 팥죽, 부적들이 그러하듯이 빨간 색이 악귀를 물리쳐 준다는 소박한 신앙이 기독교에도 적용된 것이다. 기독교계가 이 점을 깨달았는지 몰라도 요즘은 성경책을 황금색으로 물들이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서양의 어느 종교학자(이 사람도 기독교인이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히브리 종교의 거의 모든 출처는 귀신신앙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기독교를 알면 알수록 기독교에서 멀어진다고 하는 신학자와 성직자들의 우려는 당연한 귀결이다. 기독교에 빠져서 코미디를 널어놓는 이들을 잘 살펴보면 거의가 성경지식이 빈약하고, 성직자가 가르쳐준 것 이상은 알려고 들지도 않는 경향을 보인다. 창조과학회의 실질적인 본부가 있는 카이스트의 교수라 해도 창조주의자의 성경지식은 웬만한 안티들보다 빈약하다(몰러가 직접 확인했음). 결국 “무지는 신앙의 어머니”라는 말은 변치 않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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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빼먹었다.
미국의 재판정에서 어떤 피고가 증인석에 서게 되었다. 법정서기가 성경책을 들이대고 서약을 하게 했다.
(증인으로서 진실만 말하겠다는 서약을 했어도 검사나 변호사는 혐의와 직접 관련된 질문은 못하게 되어있다. 이를테면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검사가 증인석의 피고에게 몇월 몇일 몇시에 어디에서 피해자 스미스씨의 머리에 총을 쏘았느냐는 질문은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단지 스미스씨와 처음 만나 것이 언제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제냐 하는 식의 질문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 증인(피고)은 부두교도였다. 그는 성경에 손을 대고 서약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경전으로 대치해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재판관이 주법 법전으로 대치하는 안을 제시하여 피고는 수용했다. 그 재판관은 배심원들에게 이 일로 피고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라는 주문을 했다.
도대체 미국 재판정에서는 성경책으로만 서약을 한다고 우기며 미국을 기독교국가라고 나불대는 종자들의 사고방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미국의 방식이 성경의 진실성에 권위를 주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단지 관례적으로 그런 것을 성경이 진실하다는 증거라고 하는 꼬라지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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