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이벌... 예수의 회복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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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5:16
리바이벌... 예수의 회복
작성일: 2001/12/23
작성자: 몰러
예수의 회복
출처 : 페르난도 산체스 드라고의 소설 “아리아드네의 실”
그리스.로마 신화, 힌두교의 신들, 에라스무스, 니체에 대한 사전지식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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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메시지는 모세의 메시지와, 그리고 더 나아가 마호메트의 메시지와도 상반된다. 건조하고, 형식적이고, 위선적이고, 엄격한 유일신 종교로 변색된 유대교에 반(反)한 해방과 혁명의 메시지이다. 기독교는 초창기에 로마 형성단계에서 국교와 대립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 동쪽을 바라보며 ‘사막에서’ 보냈다는 그 몇 년간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다. 기독교 신화는 디오니소스 신화와 많은 연관성이 있다. 스칸다(크리슈나)나 디오니소스가 제우스의 아들인 것처럼 예수도 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내는 없고, 어머니 여신만이 그의 옆에서 그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다.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평민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의 가르침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는 쫓기는 자들과 창녀들을 거두어들인다.
그의 의식은 희생에 바탕을 둔다. 디오니소스의 수난과 부활이 오르페우스의 전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디오니소스가 일으킨 많은 기적들은 예수가 행한 걸로 되어 있다.
(오르페우스 : 고기를 물 속에서 빛의 세계로 낚아올린다는 것으로 입문식과 관련이 있다. 무지의 바다에 빠진 우리를 어부 오르페우스가 건져주는 것이다. 예수가 어부였던 사도들을 불러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한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또 다른 오르페우스의 특징은 예수가 박해와 십자가형을 받은 것처럼 몸이 갈기갈기 찢겼다는 것이다)
이 두 신화들 사이의 대응관계는 명백하다. 나사렛 예수의 탄생과 생애에 관련된 신화들과 상징들은 부득불 디오니소스를 연상시킨다. 그의 세례식과 주변 환경, 당나귀의 등에 올라 타고 이루어진 예루살렘 입성, 최후의 만찬(향연과 제사의 의식), 수난, 죽음, 부활, 향연들의 성격과 날짜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힘...
예수의 입문은 자주 언급되었듯이 에세네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니라, 오르페우스나 디오니소스와 관련이 있다. 창조주 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존경과 관용으로 점차적인 퇴보였던 그의 메시지는 예수의 죽음 이후로는 완전히 변질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의 기독교는 예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항하였다.
종교적 제국주의, 정치적 관심, 전쟁, 대학살, 고문, 화형대, 이단들에 대한 학대, 쾌락과 섹스와 즐거움에 대한 거부(빌어 먹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것들이다. 처음에는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피비린내 나는 제사와 에로틱한 의식, 향연을 행했다고 한다.
이런 소문들이 대체 어떤 근거가 있는지 조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초창기 기독교를 부활시켜 지속시키자는 신비주의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을 지닌 은밀한 모임들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삼위일체의 개념과 관련된 힌두교의 세 가지 상징주의가 있다. 성부는 시바(10개의 팔과 4개의 얼굴을 가졌으며, 눈은 셋인 힌두교 시바파의 최고 신)가 남근을 상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산적 원점을 의미한다. 성자는 비슈누(힌두교에서 최고 신인 시바와 양립하는 천신)와 그의 변신들처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온 수호신이다. 성부와 성자에게서부터 나온 성령은 양극을 연결하는 불꽃 같은 것으로 브라마(무한을 뜻하며, 비인격적인 중성(中性)의 브라만을 남성형으로 인격화한 힌두교의 창조신)에 해당한다.
성자는 사크티(여성의 시초, 여신)와 비슷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양성인 안드로진(현대에서는 호모, 레즈비안을 지칭하는 용도로도 쓰인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에 대한 찬양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찬양과 끊임 없이 뒤섞이고 혼동된다.
예수의 교리에서 오르페우스(그리스.로마 신화적 요소)와 시바(힌두교적 요소)의 흔적을 없애고자 하는 교회의 노력은 기독교 신화의 심오하고 진정한 의미를 잊게 하였으며, 만국적인 의미가 결여된 자본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해석에만 치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신교는 카톨릭 세계나 개신교 세계에도 아직 존재하고 있다. 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은 옛날 신들의 이름을 성도열전에 기록된 기명들로 대체시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사실, 하느님에게 바쳐진 성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 성모 마리아나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성신들의 보호 하에 있는 것들뿐이다. 기독교는 인도와 같은 다신교적인 분위기에서는 전통 종교와 쉽게 융합된다.
인도에서는 성모 마리아나 칼리(시바의 배우자로서, 점차 그 특성을 잃고 남편의 성격인 암흑과 음침한 면을 대표하여 광포하고 잔인한 신으로 변함)나 동일한 존재로 여기며, 아기 크리슈나(비슈누의 여러 권화의 하나로서 가장 중요한 신)에 대한 의식과 아기 예수에 대한 의식들이 혼동된다. 그리고 자신도 잃어버리는 황홀경에 빠져 춤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사로 잡는 부타 혼령(유령 또는 도깨비의 의미로, 힌두교 신화에서 부타들은 묘지에서 출몰하여 시체를 먹고 살며, 그들을 시바의 수행자들이라고 한다)은 기독교 성자들의 이름을 취하기도 한다.
예수의 메시지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그걸 위해서는 훨씬 덜 복잡한 복음서로 돌아가야할 것이다. 교회가 복음들의 출처와 역사에 관련된 것들을 조심스럽게 감추고 은폐시켰던 것들을 다시 복구시켜야 할 것이다. 그 이단으로 몰렸던 복음들은 교리보다 훨씬 오래된 것들도 있다. 이단으로 몰렸던 복음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시바와 디오니소스 의식에서 나타났던 위대한 인간적, 정신적 전통에 그의 세상과 시대를 순응시키려는 노력의 결실인,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바울 이후, 예수의 가르침을 에워싸고 변질시켰던 거짓된 가치들에서 해방된 예수는 그 전통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대표한다는 자들이나 신의 의지를 유일하게 대변할 수 있다며 거들먹거리는 자들의 울타리 밖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신의 업적과 신비를 겸손하게 존경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종교이다.
근대 서구 사회가 기독교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 때에는 기독교였지만 이내 기독교가 아니었다. 대충 천 년부터는 인간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며, 하느님을 도와 창조를 수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유럽 전역을 지배했다. 이런 건방진 생각은 기독교의 기본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 것이었으며,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이제 더 이상 진정한 종교, 즉 인류 전체의 종교가 아니다. 인간을 자연과 일치시키고, 인간의 영혼과 신들의 세상과의 관계를 복구할 수도 없다. 마지막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은 성 프란체스코 데 아시시(자연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으며, 청빈을 부정적 금욕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환희로 돌려 수도생활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이탈리아의 수도사)였다.
처음에는 모든 종교가 신성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이자 시스템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종교는 배타적이 될 수도 없고, 하느님이 독점권을 가질 수도 없다. 신의 세계는 그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길들 만큼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