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은 인간(인간의 인식,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적용하고, 신(신의 존재, 신에 대한 관념, 신이 보여주는 행동)에 대한 인식에서는 절대주의를 적용한다. 이명신씨가 늘상 하는 강아지 풀 뜯다가 지렁이 등뼈 씹는 소리들을 정리하면 모두 이러한 이중잣대에 귀착된다. 도대체 "신은 절대적 합목적성을 갖고 있다"는 헤겔식 발언(시비거는 분이 있을까봐 말하는데, 헤겔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명신이 한 말은 사실상 헤겔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짝퉁 헤겔이다) 자체가 상대적 인식이라는 것은 왜 모르는지...
물론 신은 절대적이라고 하며 나름대로의 선험적 명제론을 내세우지만, 그러한 신을 말하는 자신들이 신인가? 신을 다 아는가?
호교론자들의 상대주의는 정당성을 상실한 불공정한 규칙의 게임이며, 이중잣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어떤 주장을 펼치다가 논리적 반박에 직면하면,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전제(이것은 참이다)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논리(논리학)가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변호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상대주의를 살펴보자.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은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 마음의 본성이 그러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을 자연 안에서 결코 발견하지 못랬을 것이다." - 칸트 『순수이성비판』
러셀은 칸트가 데이빗 흄의 태클, 즉 회의주의 때문에 기나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 3대 이성비판서를 작성했고, 그 이후 다시 독단의 잠으로 빠져들었다고 비아냥댔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비판서 이후에 나온 칸트의 저작들이 그리 보기 좋지 않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은 무지하게 어려운 3대 비판서를 보다가 지쳐서 러셀의 평가를 그냥 받아들이기만 할 뿐이다(나도 그렇다). 다시 말해 "순수이성비판"이 흄의 회의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만다. 그러나 여러 철학자들의 공통된 해석들은 비록 칸트가 동의할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우리가 차용해 볼 수는 있겠다.
어쨋거나 "순수이성비판"의 전체적인 경향은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 chapter나 paragraph는 여전히 칸트가 독단적이며, 회의주의에 적절하게 반론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다. 위에 인용한 인식론에 대한 문장이 그 한 예다. 이명신씨가 즐겨 칸트를 씹는 대목이기도 하다(예전 게시판이나 기비평 까페를 뒤져보면 이명신씨의 찬란한 역작 "칸티안의 후예들에게"라는 글을 볼 수 있다). 각설하고...
사실상 위에 인용한 문장 등이 근대적 상대주의의 시작이라고 간주되고 있는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니체보다도 수십 년 앞서는 것이다. 상대주의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이중에서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모든 진술이 배경과 전제조건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가치판단이든 가치중립적 판단이든 간에 모든 판단의 진위가 상대적이라는 입장을 가진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판단의 진실성을 담보해주는 객관적 기준 따위는 없다고 보고 있으며, 그 원인은 언어의 애매성, 개개 지각의 불일치 및 한계 등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형태의 상대주의도 객관적 준념, 즉 개념의 틀이 없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먼저 칸트가 이성비판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된 회의주의의 기본개념은 "나의 지각"이 과연 "저기 저 바깥"에 있는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내 지각을 제쳐두고" 그 사물을 직접적으로 알아 볼 방법이 없다는 문제에 대해 칸트는 "마음이 수동적인 지각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경험의 세계를 구성하는 구성자"라고 주장하며 회의주의를 극복하려 하였다. 만약 시각적 흐름을 해석해 주는 인식 구조가 없다면, 순간순간의 규칙성은 사라지고 그 어떤 사물도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못한다(아예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격한 의견도 있다). 그래서 칸트는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고 하였다.
칸트의 이러한 시도, 즉 지각에 대한 마음의 기능을 재해석한 결과는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극단화된 주관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지식과 진리는 지각자 각각의 입장이나 해석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칸트는 지각자가 의식을 일으키는데 몇 가지 공통적인 기본 지침, 다시 말해 개념의 틀을 따른다고 하였지만, 여기에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방법이나 기준이 없다. 어떤 방법이 다른 방법보다 더 낫거나 나쁠 수는 있지만 말이다. 물론 이마저도 과격한 상대주의자들에 의해 부정된다.
여기에서 상당수의 유신론자들은 신이나 악마가 개념의 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는 신을 포함하는 개념의 틀이 신을 배제한 개념의 틀 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란다. 나아가 우월성이나 열등성을 판단하는 비교평가 기준조차도 없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을 인용한다. 우열을 가리는 것, 즉 개념의 틀에 대한 등급이나 서열을 매기려면 합리성이 바탕이 되어야 하나 그런 기반은 없으며, 합리성은 이미 개념의 내부에 들어 있기에 중립적인 합리성은 없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상대주의는 여기에다 "모든 관점이 타당하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여러가지가 있다.
"객관적 외부세계"란 인간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는 것이며, "진리대응설"은 어떤 진술의 참됨은 마음과 상관없이 세상의 참된 사실과 일치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이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여기서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면 관념론자가 될 것이며, 진리대응설을 거부하면 인식론적 상대주의자가 된다. 인식론적 절대주의자들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반대하여, 사람들의 의견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차이가 객관적 외부세계에 대한 인정이나 진리대응설과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유신론자들은 객관적 외부세계를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이나 악마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다른 반론은, 모든 관찰에 이론이 개입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 진리밖에 없다는 주장"은 거부한다. 물론 유신론자들도 여기에 동조하기는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인간의 일은 모두 주관적이며, 신의 일은 객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서두에 말했던 불공정한 게임을 하는 것이다.(이명신이 말장난을 하는지 정말로 언어장애가 있어 그런지 모르지만, 끈기를 가지고 그의 주장을 해석해 보면 결국 이중잣대에 불과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효과적인 반론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의 주장들이 실은 상대주의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상대주의의 주장대로 모든 판단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타당하다"는 판단의 진리 자체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마치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라는 어느 크레타인의 발언이 모순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이를 일부 유신론자들의 주장에 적용해보면 서두에 말했던 것과 같은 것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신에 대한 인식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를 어떻게 논증할 수 있는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부정하는 증거(?)는 역설적으로 상대주의가 씹어대고 있는 과학이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과학자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인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대과학의 성공은 그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 물론 과학(과학자)이 항상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객관성과 재현성,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앞세운 과학은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해 둘 것은 아인쉬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그 출발에 있어서 상대주의의 방법을 차용하고 있으나, 주관성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개개 관찰자의 객관적 관찰의 결과가 상대적인 것일 뿐이지 주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상대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교인들은 신의 절대성에 비해 과학이 상대적인 지식에 불과하다면서 인간과 과학을 폄하한다. 이런 현상들은 오해의 결과가 아니라 무지의 결과이다)
빛의 속도가 초속 29.9790...만 킬로미터라는 것과 개개 관찰자의 운동상태에 관계없이 일정하게 관찰된다는 사실, 모든 물체는 별도의 항력이나 추력이 없는 한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정확하게 말해서 모든 물체는 인력을 가진다는 사실), 속도가 증가하면 질량(무게와 개념이 다르다)이 증가한다는 관찰 등에는 상대주의가 끼어들 구석이 없다. 도대체 객관적 진리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과학적 탐구가 무엇을 지향한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적 견해들과는 상관없는 분야에 대해서도 인식론적 상대주의가 항상 타당한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구석이 많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논리적 근거로 "모든 이가 옳다"는 것을 들고 있고, 또한 서구적 방식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는 그 성과들을 근거로 하여 상대주의가 똘레랑스와 자유주의를 표방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철학적 이론이 바람직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점을 근거로 그 이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며, 또한 상대주의가 자유주의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상대주의적인 똘레랑스의 심각한 결점은 상대주의나 그 해석의 어떤 결과들 중에는 분명하게 유쾌하지 못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Ku Klux Klan 단원이나 슈퍼맨의 호적수 렉스 루더도 나름대로 자신의 개념의 틀 안에서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종차별주의나 세계정복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종차별주의 같은 것은 타인에 대한 문제이니 그럼 개인의 문제에 국한된다고 볼 수 있는 것도 살펴보자.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을 예로 들면, 그들의 행동은 먼저 인간(생명)의 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불러왔으며, 과학(의학)에 대한 부정으로 인간이 누릴 혜택을 거부하거나 박탈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점이다
(과학을 비판하는 종교가 많지만, 아미쉬 이외에는 과학을 비판할 자격을 가진 종교가 없다. 많은 국가에서 발행되는 파수대가 맥킨토시 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작성되어 배포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고 해야할까? 비웃어야 할까?)
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내려준 신의 의도(사실은 문화/문명적인 이유 혹은 위생적인 이유에 의한 율법일 뿐이다. 동물의 피는 쉽게 변질되고 또한 배탈을 유발하기 때문에 못 먹게 한 것이다)는 생각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수혈을 거부하는 행위를 과연 관용의 범주에 넣어 "네 맘대로 하라"고 하면서 방치해야 할 것인가?
권력의 횡포, 권력의 타락이나 사회의 분열과 전쟁을 막아주는 것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상대방에게 똘레랑스(이때는 관용보다는 양보의 의미)를 강요하며 분쟁을 조장할 뿐이다.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 지도자들의 망언을 보라. 자유주의적 똘레랑스(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맘껏 자유를 누림)가 근/현대 민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지 상대주의적 똘레랑스가 자유주의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어떤 개념의 틀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개념의 틀에서는 거짓일 수가 있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그 자체도 상대주의적 비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상대적인 것"에 대해 상대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절대적 존재가 존재함을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상대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지난하고, 아예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절대적인 존재가 무엇이며 어떤 것이라는 것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인식론적 상대주의든 인식론적 절대주의든 간에 말이다.
함부로 절대성을 가진 존재가 주는 축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설명이나 설득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존재가 주는 축복을 누리기 위해 어떤 바보짓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런 축복을 반대하거나 회의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나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그들은 절대로 자신의 인식결과가 상대적임을 말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한 가지밖에 없다.
"조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