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를 지내고 나자 나만 집에 남았다. 나는 회사에서 뺑뺑이 근무라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고, 딸래미는 화요일까지 교장직권 휴교다. 그래서 부인은 시골 시댁과 친정을 돌기로 했다. 모친은 한사코 시골에 남고 싶어 하신다. 그래서 명절과 딸의 생일(내 생일이나 부인의 탄신일에는 추카전화만 하신다 ㅠ.ㅜ)에만 서울에 올라 오시고 부인이 운전하는 차로 내려가신다.
명절날 오후는 그래서 완전히 프리~하지만 허전함과 심심함은 감출 길이 없다. 결국 동네 DVD가게 뒤적거리거나(근데 모두 문 닫았더라), 딸래미가 하고 있는 게임 캐릭터의 레벨업이나 할 수밖에... 아무리 내가 애사심이 뛰어나도 명절날까지 열씨미 일하겠다는 정신나간 시도는 하지 않는다. 놀아야지...
웰컴 투 동막골을 보려다가 귀차니 신이 강림하는 바람에 부인이 빌려두었던 DVD나 보기로 했다. 영화가 발표될 때마다 항상 연기력을 의심받는 브래드 피트, 그가 아킬레스 역으로 주연한 "TROY"였다. 역쉬나 연기가 영 불안정해 보였다. 프리아모스왕 역의 피터오툴과 핵토르역으로 나온 에릭 베너는 충실하게 캐릭터를 구현했지만... 아마도 아킬레스라는 캐릭터를 호메로스의 일리어드와는 다른 각도로 보면서 새로이 캐릭터를 창출하다 보니 어정쩡한 캐릭터가 되어버려서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불안정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기존의 일리어드와 완전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신이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물론 극중에 나오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신의 이름을 운운하고, 신의 탓을 하고, 신의 의지나 저주를 말하지만, 실제로 신이 관여한다는 단서는 영화 내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킬레스는 공공연하게 신의 존재를 배제한다. 자신은 신을 보았다고 하지만, 하는 짓을 보면 신의 존재가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일리어드에서는 아킬레스의 모친이 테티스 여신으로 되어 있고 전장에 날아와 아킬레스에게 코치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평범한 할무이로 나올 뿐이다. 다만 아들을 전장에 나가도록 부추기는 내공은 평범한 할무이가 아니지만...
아폴론 상의 목을 치는 아킬레스를 보니, 교회나 성당의 예수상 목을 치는 장면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오버랩되었다. 신과 관련된 대사들, 특히 아킬레스의 말을 살펴보면 유대교로부터 비롯된 저급한 신론들을 올리포스의 신들과 매치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인간이 해야 할 바를 말해준다. 아킬레스가 포로로 잡힌 헥토르의 사촌 브리세이스에게 하는 말이 있다(일리어드에서는 전쟁 초기에 포로로 잡힌 것이 아니라 성이 함락될 때 죽는다)
"사실 신들은 우리 인간을 질투해. 그들은 영원하거든. 하지만 우린 언젠가 사라지는 존재지. 인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을 살지. 그래서 우리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거야"
일리어드에는 안 나오는 이 대사를 듣고 나는, 이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이 안티크라이스트이거나 최소한 기독교의 병적이고 저질스러운 영생추구를 비웃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인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인류를 더 나은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영생은 나태와 권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천국에서 허연 옷을 입고 하루 종일 노래나 부르고 앉아 있는 영혼들을 상상해보라. 차라리 지옥의 영원한 고통이 덜 권태롭다.
극중 아킬레스의 신에 대한 언급에 담긴 생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인류는 신에 얽매일 필요나 이유가 없으며, 인류의 가치는 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 자신이 가치판단의 관건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며, 세상을 후손들이 좀 더 살기 좋은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킬레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던 사촌이 죽자 미래에 대한 비젼까지 잃은 듯 행동했다. 그러나 트로이 함락 순간에 전쟁의 목적은 안중에도 없이 브리세이스를 찾아 헤매는 그의 모습은 인간이 진정 추구해야 할 바를 보여 준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제 출근해야 한다. 그나마 차례도 못 지내고 회사를 지킨 분들과 빨리 교대해 드려야 한다. 지루한 하루가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