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실존에 대한 의문과 신약의 가치

예수의 실존에 대한 의문과 신약의 가치

몰러 0 4,505 2005.06.20 18:55
예수의 실존에 대한 의문과 신약의 가치    
  
 
 
작성일: 2002/12/16
수정일: 2002/12/19
작성자: 몰러 
 


"할 말이 없으면 가만있기나 할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했다는 것, 즉 인간으로서의 예수는 바이블 외에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필로, 플리니, 요세푸스 등의 저술이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인간 예수를 접해본 적이 없기에 모두 “카더라”식의 문체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후대에 가필, 왜곡된 부분들이 적발되기도 했다. 하긴 기독교의 경전조차 무수한 억지와 첨삭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바이블 외적인 것은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대다수의 역사가와 신학자들은 예수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예수라는 캐릭터는 단일성을 띠지 못하고 거대한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미신과 사기가 더 자주 발현되는데, ‘예수’라는 이름은 경전(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전형으로, 당시 혼란한 유대사회에서 수많은 이들이 예수를 자칭하면서 자신이 구원자임을 주장한 것들이 종합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100년 안에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어느덧 모든 언어와 문자가 한국어로 통일되었다고 말이다. 그런데, 종주국 한국에는 수많은 이들이 자신을 재림주라고 하면서 교단을 설립하고 사람들을 모은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을 때 전쟁(극렬한 사이버전을 포함하여)이 일어나 거의 모든 기록들이 소실되고 재림주에 대한 것은 구전으로만 전승된다고 가정하자. 그럼, 정명ㅇ 재림주, 이재ㅇ 재림주, 조희ㅇ 재림주, 문선ㅇ 재림주... 그 많은 재림주들이 성은 재씨요, 이름은 림주라는 하나의 캐릭터로 통일될 수도 있다. 결국 사람들은 재림주의 3차 재림을 고대하면서 신앙의 영역을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이 ‘재림주’에 대한 전승이 문자화되어 하나의 경전으로 종합될 것인데, 이때부터 우리의 후손들은 무진장 헷갈리게 될 것이다. 경전의 각 텍스트와 챕터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재림주에 대한 묘사 때문에 말이다. 또한 어떤 선지자적인 이가 나와 각 교회에 서간문을 보내면서 자신의 관점으로 ‘재림주’의 캐릭터를 완성하고 또한 기존의 경전들을 변개할 수도 있다.
그리고, 중세 라틴어가 가졌던 것과 같은 권위를 한국어가 갖고 있다가 종교개혁이 일어나 각 나라와 민족의 언어로 경전이 번역된다면, 영어권에서는 ‘재림주’를 “Jae, Rimju” 또는 “Rimju Jae”라고 표기할 것이다.

소위 ‘홀리 바이블’은 이런 식으로 형성된 것이다. 수많은 예수 중에서 비슷한 것만 모아 복음서를 형성하고, 이를 바울이 다시 적절히 구성한 뒤에 복음서 내용을 첨삭(대표적인 것이 예수가 부활한 후에 제자들에게 이방전도를 명하는 장면이다)한 것이 바로 성경의 실체이다. 이것은 양심적인 신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은 바보 아니면 사기꾼”이라는 말은 타당성 있는 명제가 되어버린다.



논의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공식적으로는 침묵한다. 하지만 침묵만 하고 있기에는 무척 억울하다. 그래서 다양한 반론이 비공식적으로 제기된다. 그런데 이들은 반론이라기 보다는 바이블을 개연성을 가지고 해석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먼저 예수의 실존 여부는 누구도 증명 또는 반증명할 수 없으니 새로운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논의를 유보하기로 하고, 일단 신약의 가르침은 좋은 것이 많으니 설사 예수가 가상의 인물이라고 해도 그 가르침을 삶에 한번쯤 적용해보는 것도 좋지 않느냐는 주장이 많다. 정말로 산상수훈이나 안식일에 대한 예수의 유연한 해석, 사마리아인에 대한 태도 등은 오늘날 사람들이 그 정신을 실천했을 때 좋은 결과가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예수(실존한 예수든 가상의 예수든 간에)가 창안한 것이라고 우긴다면 곤란하다. 산상수훈의 내용들은 불교와 조로아스터의 성자들이 수 백년 먼저 설파했던 것이다. 단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안식일 예화나 사마리아인에 대한 우화는 인간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률일 뿐 예수의 위대함을 대변해 줄만큼 의미가 깊은 것은 아니다. 한편, 산상수훈의 교훈은 현대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그리 인기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기독찌라시에나 활용될까...

다음으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굽히지 않는, 우격다짐에 가까운 항변이 있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약간의 통찰력만 있어도, 예수 자신이 주장한 신성은 환상적 신념일 뿐이며,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의 많은 방랑 신비주의자들과 정신병자들도 공통적으로 가졌던 몽환적 개념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철학자적인 신학자들의 주장도 살펴보자. 이 부류들은 신약의 가르침이 깊은 철학적 성찰과 사색의 결과이며, 기독교의 교리는 종말, 심판, 구원이 다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는 예수의 신성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가 훌륭한 철학자이며 성현이라는 것만큼은 인정해 줄 수 있지 않느냐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자들에게 중고등학생용 철학입문서라도 다시 읽어볼 것을 권한다. 예수만으로는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고 소멸하거나 유대의 한 이단적 분파에 머물렀을 것이다. 단적인 예로 기독교리에서 사도 바올로가 덧붙인 신플라톤주의(특히 필론이나 플로티노스)를 빼버리면 기독교는 성립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다. 삼위일체만 해도 예수의 신성과 야훼에 대한 유일신관을 조화시키기 위해 플로티노스가 정립한 일자(一者), 누스(정신), 영혼의 성삼위일체, 그리고 미트라이즘의 그것을 표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외에도 기독교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 -에세니즘, 마니즘, 그노시즘,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주의, 오르페우스 신비주의, 심지어 견유학파(막말로 개똥철학) 등등- 중에서 한가지만 제외시켜도 기독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깊은 철학적 성찰과 사색의 결과물이 아니라 필사의 짜깁기에 불과하며, 이러한 짜깁기는 조화롭게 되지 않고 마치 스핑크스와 같은 괴물처럼 되어 많은 역사적인 문제점을 야기했다.

그 외에도 잡스런 주장들이 많지만 마지막으로 바이블이 봉인된 비유라는 주장만 다루고 이 글을 마치기로 하자. 예수는 비유로써 진리를 전한 적이 많았는데 여기엔 모두 깊은 뜻이 있으며, 성경의 진리는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성령으로 지혜를 받은 자 만이 그 뜻을 온전히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비유와 상징이 지혜롭게 해석되었을 때 성경에는 아무런 오류가 없다는 논리를 편다. 심판자로서 오실 예수는 자신의 예정을 이렇게 숨겨놓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이런 논변은 결국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필자는 ‘고린도에 보내는 서간문’의 사랑가를 에로스적으로 해석하여 내세운다.
‘사랑은 언제나 오 ~~~~~ 래 참아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필자는 이 구절을 남자들이 ‘오래가그라’를 복용하는 등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1시간 이상 사정을 참아야 하고, 대부분의 여성 파트너들은 터프한 ‘애기맹글기를 위한 푸샤푸샤’ 보다는 전희와 후희를 곁들인 무드 있는 것을 원한다는 교훈을 준다고 말하곤 한다. 물론 필자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기독교인들이 비유, 상징 운운하는 순간 진담이 되어 버린다. 기독교인들은 필자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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