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까대기(마지막회)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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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7:28
가톨릭 까대기(마지막회)
작성일: 2002/07/16
작성자: 몰러
왜 가톨릭을 까대는지에 대한 작은이님의 질문에 답할 겸 썰을 풀어보겠다. 요즘 일이 없어서 땡땡이 치다가 심심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유는 별것 아니다. 등신 같은 호이의 지랄을 보다 못해 가톨릭 까대기에 잠깐 동참해 줬다. 이제껏 개독들이 가톨릭에 대해 발광하는 것을 보면 목사나 전도사들이 가르쳐준 것 이상은 가톨릭에 대한 지식이 없는 듯 하다. 지식 자체가 딸리니 내면까지 파고들어서 이해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일단은 개신교들이 하는 방식, 수박 겉핥기 식으로 가톨릭의 기본 교리만 다뤘다. 하지만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성모추앙(개신교들이 비판한 숭배의 수준은 아님이 확인되었다)이나, 영성체, 각종 성사 이외에는 손댈 만한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 개신교가 가톨릭을 비판한다는 것은 누워 침뱉기일 뿐이다.
결국 개독들이 원하는 대로 가톨릭을 씹기란 불가능하다. 개신교와 싸잡아 비판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1년 가까이 소사신부와 같이 놀면서 가톨릭에 대해 느낀 점을 개신교와 비교하여 정리하겠다. 외국에 안 가봤고 외국어도 영 꽝이라서 외국 가톨릭을 접한 일은 없으니 한국에 국한하여 말하고자 한다.
먼저, 전반적으로 에큐메니컬한 분위기 속에서도 가톨릭 내에는 근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그것과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가톨릭적인 펀드멘털은 외부로 발산되지 않는 것에 비해 개신교는 사뭇 심각하다. 종교말살론을 유발하는 것이 개신교 근본주의다.
소설 “장미의 이름”을 읽을 것을 권한다. 소설 속의 논쟁들은 중세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물론 개독들은 이 소설을 읽을(이해할) 능력이 없다고 잘라 말하겠다.
또한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사고가 유연하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과 기조는 유지하고 있지만 어떤 비판적 해석에도 무작정 거부반응을 보이기보다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토론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다. 물론 안티 입장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지만... 개신교? 앵무새 키우는게 더 낫지.
수도원(몰러가 접한 교파는 베네딕트회 뿐이다)의 수사들은 일반 사제나 주교들과는 차원이 다른 정신영역에서 “도 닦고” 있으며 이들의 내공은 불교의 이판승에 버금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좀 억지스럽게 표현하면 사제=사판승, 수사=이판승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몰러의 공력으로는 이들에게 도저히 항거할 수 없다. 그리고 사제들이 꼭 사판승과 같은 것은 아니다. 사제 중에도 이판승처럼 도닦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수도사들을 보면 그노시스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그노시스트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가톨릭이 실천적 이성도 중시하는데 비해서 개신교는 3 sola(오직 믿음만이, 오직 성경만이, 오직 기도만이)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소승불교 vs 대승불교’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소승불교가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데 비하여 대승불교가 중생구제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만 놓고 본다면 가톨릭=대승불교, 개신교=소승불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몰러는 이것에 대해 절대 부동의한다. 소승불교나 대승불교 모두 높은 정신영역을 소유한 이판과 사바세계의 중생과 다름 없는 사판이 구별되면서도 공존하고 있으며 실천도 강조하고 있음에 비해서 개신교에 대해서는 유아원 이상의 평가를 내릴 수가 없다.
(여기서 전도가 바로 중생구제와 같은 의미가 아니냐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렇게 전도를 해라. 몰러가 보기엔 니들의 전도질이 하늘에 상복을 쌓기 위한 이기적 행위의 발로로 보일 뿐, 남도 구원하겠다는 이타적인 행위라고는 도저히 느끼지 못하겠다)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하고 고민하는 다른 종교에 비해, 개신교는 지조때로 신을 정의내리고 거기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 한다. 여기엔 필연적으로 억지와 몰이성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그럼 가톨릭은 괜찮은가? 아니다. 가톨릭 기본교리 비판때 인용했던 버트란드 러셀의 짧은 딴죽들은 가톨릭이 가진 대표적인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다. 7, 80년 전에 지적된 오류들이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것이 가톨릭이 가진 문제점이다. 물론 고쳐질 가능성은 향후에도 없다. 그것까지 양보하고 후퇴한다면 가톨릭의 존립근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가톨릭에게 배울 점은 두 가지다. 한계는 있겠지만 오류를 인정하고 반론을 수용하고 고쳐나가는 것... 또 하나는 그 한계에 대해 철밥그릇적인 태도 대신 another side를 제시하고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제 가톨릭 근본주의자(파란색)와 일반적(?)인 가톨릭 사제(검정색)의 의견을 비교해 보라. 소사신부의 동료신부가 어느 교사에게 보낸 글을 허락 받고 퍼왔다. 맞춤법 틀린 것 말고는 손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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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 지성인들의 종교관을 알아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과
종교 문제를 다루게 되면 신부 앞에서는 그들은 체면에 눌려 있는 그대로 토로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만난 지성인들은 오히려 제가 얼굴이 벌개지도록 하더군요. 경력 19년차의 숙달된 사제로서 주교서품을 앞두고 있는 저조차 말입니다. 형제의 제자들이 만났다는 사람들은 고차원적인 의미로서의 지성인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비종교인들 같군요. 아래에 나오는 내용을 봐도 말입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S여고 학생들의 종교시간에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학생들이 알고 있는 친근한 분들을 찾아가서 "종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는 질문을 던져 그들이 솔직 담백하게 말한 내용을 기록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제각기 재미있는 숙제를 해 왔습니다. 학생들은 대답하는 사람의 신분까지 밝혔습니다. 숙제장에 나타난 대표적인 것을 몇 개 소개한다면,
ㅇ 어떤의사 - 종교는 도덕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ㅇ 어떤 회사원 - 종교는 인간 수양을 위해서 필요하다.
ㅇ 어떤 공무원-종교는 원시인들의 무지에서 나온 것이니까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는 스스로 없어지지 않을까?
ㅇ 어떤 법률가 - 종교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어떤 미지수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다.
ㅇ 어떤 젊은 회사원 - 종교는 의지할 곳 없는 나약한 군상들이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치 않다.
ㅇ 어떤 사업가 - 우리 사회에 종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데 정신을 둘 여유가 없다. 기회가 있으면 나도 종교를 가져야지
ㅇ 어떤 중년신사 - 내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종교인이다. 그런데 그 친구 생활이 종교인답기보다 도리어 더 엉망이다. 나는 그런 종교를 믿을 마음이 없다.
ㅇ 어떤 교수 - 종교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신을 전제하고 거기에다 인생관을 세워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등등이었습니다.
이것이 추려서 본 한국 지성인들의 종교관입니다. 우선 저는 여기서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종교인이 생각하는 그것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잘라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각기 종교에 대한 편견과 곡해가 있을 것입니다. 상기 종교의 정의를 간단 간단히 추려서 비판해 보겠습니다.
사실 이런 내용들은 굳이 설문조사를 하지 않아도 예상되는 답변들이고, 이미 거기에 대한 답변들이 나와 있는 상황입니다. 거기다가 답변 자체가 가톨릭 내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종교에 대해 생각하고 느끼는 점은 같을 수가 없다는 것이 명약관화한데, 이것을 “잘라 말한다”는 표현까지 써가며 강조한 이유는 비종교인이 편견에 빠져있고 곡해만 한다는 전제를 내세우려는 좋지 못한 토론자세인 것 같군요.
ㅇ 종교는 도덕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는 인간 수양을 위해서 필요하다.
첫째로, 종교를 도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종교는 도덕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은 종교의 한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도덕인이 되는 그것이 종교의 종착역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놓은 차원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글쎄요...... 물론 종교가 도덕의 완성이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저도 반대합니다. 그리고, 종교가 도덕보다 한차원 높은 것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점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도덕적 완성이 되지 않은 종교가 한차원 더 높은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도덕이 부수적인 것이라는 말씀이 도덕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종교의 목적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신 표현이라는 점은 알겠지만, 저는 도덕인이 아니면 종교인의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인정하기는 싫지만 종교가 도덕을 보장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형제들이 저지른 죄악을 보면 말입니다. 무신론자들의 비판 중에는 종교가 도덕을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비도덕적이라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을 우리 종교인들은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종교인은 우선 도덕인이 되고 난 뒤에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자.’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매도하는 비종교인들의 비판이 많은데, 슬프게도 사실일 때가 자주 있습니다.
ㅇ 종교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어떤 미지수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다.
둘째로, 종교는 인간이 풀 수 없는 것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종교의 진수를 말하려고 하는 듯도 합니다. 종교는 그 자체가 인간 능력의 한계선을 뛰어 넘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미지수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캐내야겠고 그 기본문제를 풀어야겠다는 사고방식에서는 참종교를 얻을 수 있는 길이 트일 듯도 합니다.
네. 동의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도 말씀되었듯이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구원을 추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완성이 없이 형이상학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인간의로서의 완성과 인간 이상의 것에 대한 탐구, 이 둘을 병행하는 것이 참종교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인간의로서의 완성 자체가 어떤 미지수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군요.
ㅇ 종교는 의지할 곳 없는 나약한 군상들이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종교가 필요치 않다.
세째로, 종교를 나약한 군상들이 소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절대자인 양 착각하는 교만한 자의 발버둥입니다. 종교는 근본적으로 겸손한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하늘나라의 선물입니다. 교만은 스스로의 기만이요 겸손은 진리가 심어질 수 있는 바탕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올바로 아는 겸손한 자만이 진리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절대자인 것처럼 인간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그들도 인간의 나약성을 느끼고 발버둥치는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인간의 무능력을 극도로 깨달으면서도 그것을 득도로 덮어두려고 무진 애를 써야 하는 모순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착각하는 인간 만능주의자여서 종교를 나약한 군상의 소유물이라고 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반기독교인(몰러를 지칭함. 헐~)도 가끔 종교를 패배주의자의 전유물이라고 할 때가 있지만 항상 그러지는 않더군요. 물론 과학만능주의, 인간만능주의에 빠진 사람도 많고, 교만에 가득 차서 자기기만에 빠진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 평신도들조차도 - 신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무지하고 나약하다거나 교만에 빠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무관심과 무지는 다른 문제지요.
저는 겸손을 가장한 패배주의보다는 차라리 교만에 빠진 도전정신이 더 좋다고 봅니다. 과거 우리 믿음의 사도들은 하느님께 대한 순종을 전하면서 겸손보다는 패배주의를 요구한 부분이 많습니다.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할 것 없이 믿음의 형제들 면면을 살펴보았을 때,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나약한 군상의 전유물이라고 비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반기독교인(몰러가 확실함. 아래 내용 내가 만든 거거덩)이 함께 식사하는 도중에 말했던 우화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다른 또 한 사람의 콩쥐가 있습니다. 역시 또 다른 계모가 해질 때까지 밭을 일궈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그마하고 자루가 다 썩은 호미 하나만 달랑 주었습니다. 콩쥐는 앉아서 한탄을 하다가 신령님께 빌었습니다. 저런 호미 가지고는 일을 못하겠다고요. 그때 어떤 농부가 소를 몰고 오는데 줄이 끊어져서 소가 도망갔습니다. 그 농부는 괭이와 삽과 호미를 두고 소를 쫓아갔습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 농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해가 질 때가 되어 콩쥐는 신령님께 빌었습니다. 도저히 일을 다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요. 어느 덧 해는 졌고 농부가 돌아왔습니다. 농부는 농기구들을 챙겨들더니 콩쥐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이렇게 좋은 괭이와 삽을 줬는데, 하루 종일 뭐 했느냐?”
이 농부가 그 말을 한 순간 구름에 휩싸이더니 풍채 좋은 할아버지로 변하고는 구름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우리 사제와 교사들이 신도들에게 떠 먹여 주고 다음 식사를 기다리라고만 했지, 밥하는 법을 가르치고 그것을 시키는 것은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할 일입니다. 신도들 중에 나약한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믿음과 순종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겸손과 패배주의는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ㅇ 우리 사회에 종교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데 정신을 둘 여유가 없다. 기회가 있으면 나도 종교를 가져야지
네째로, 종교가 좋긴 하지만 그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그는 종교를 인생의 기본문제로 보지 못했고 하나의 취미로 아니면 인생의 한 장식물로 생각한 것입니다. 분명히 그의 종교는 신앙을 위해 피를 쏟은 순교자들의 종교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이들은 대개가 종교 무관심증에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좋은 것인 줄 알면서도 여기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가치판단으로는 종교보다는 세속이 더 아름답고 신앙보다도 물질이 더욱 가치스럽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그들도 종교의 진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가 인생의 기본문제라고 하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크나큰 착각입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을 보십시오. 아무리 종교에 무관심할 지라도 세속보다는 종교가 더 고차원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타박을 주는 표현을 스스럼없이 하실 수가 있습니까?
종교를 갖지 않고도 고도의 정신영역을 이룬 분들도 많습니다. 불교에서 ‘모두가 부처’라고 하는 말의 뜻을 저는 공감합니다. 어떤 성취를 위한 방법론에는 종교 말고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 중에서 종교를 택하겠다고 고려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종교에 반감을 가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종교가 무조건 좋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종교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부정적인 면도 우리 스스로 깨닫고 그 위험성을 함께 제시해서 부정적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종교를 권유하는 것이 우리 사도들의 임무가 아닐까요? 종교의 진수를 보여주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영화 스타워즈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선과 악, 긍정과 부정, 밝음과 어둠은 하나에 속해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둠의 힘에 넘어간 이유를 보면 종교가 가진 딜레마를 아주 절묘하게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밝은 면만 부각시키려 하고 어두운 면은 외면하기만 해 온 것이 아닌가 반성해야 합니다.
ㅇ 종교는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 어떤 신을 전제하고 거기에다 인생관을 세워 정신적인 안정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다섯째로, 그들은 말했습니다. "종교란 있지도 않는 신을 믿는 것"이라고, 무신론자들의 소리입니다. 이것을 말한 대학 교수는 신의 문제를 얼마나 연구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런 말을 하는지 알고 싶군요. 신의 존재를 부정한 그 말에 대해서 지성인다운 책임을 질 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무수한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신을 믿어 왔는지를 시원스럽게 해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의 문제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겠읍니다.
가장 편협된 자세를 보이시는군요. 그 대학교수님이 아무 생각이나 고민도 없이 신이 없다고 했을까요? 신이 있다고 하든 신이 없다고 하든 자신의 말에 지성인다운 책임감이 결여되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잠시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질문드리겠습니다.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성 아끼나스(토마스 아퀴나스)께서도 하지 못하셨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성 아끼나스의 증명이 무효라고 배웠으면서도 그것을 고집하려 합니까?
무신론자들도 이제는 “신이 없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신이 존재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무신론이 아니라 불가지론에 가깝네요.) 그들도 신의 존재여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무슨 증거로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저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일어날 기적을 저는 믿습니다. 이것이 저의 신념이자 고백입니다. 하지만 저의 믿음을 사실로 단정짓지는 않겠습니다. 그러고는 싶지만 말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 있다는 믿음 하에서 그러한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진지하게 느껴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믿는다고 해서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수한 사람이 있지도 않은 신을 믿어온 것에 대해 해명하라고 하셨는데, 신이 있어서 우리가 믿어온 것인지 우리가 믿어왔기 때문에 신이 있다는 것인지조차 단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틀린 것이라고 모두가 의심을 한다면 하느님은 사라집니까? 신이 있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로 증명할 사항이 아닙니다. 신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자신의 영혼을 완성해가는 것, 이것 이상을 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과욕입니다. 또한 신이 없다는 전제하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해나가는 것을 틀린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신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무신론자보다 우월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신은 공평함에 대해 우리가 가진 가치관과 전혀 다른 것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까요.
ㅇ 종교는 원시인들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여섯째로,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종교는 원시인들이 무지에서 나온 것이므로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긴말을 생략하고 단도직입식으로 반문하겠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위대한 과학자들의 신앙 실태조사에서 99%가 신앙인이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습니까? 또 하나 있습니다. 과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선진민족일수록 종교가 발전하고 한국이나 아프리카와 같이 발전도상에 있는 국민일수록 종교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옳겠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의 종교와 과학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과 지식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 반기독인은 ‘무지는 신앙의 어머니’라고 자주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우리 그리스도교가 신자들의 무지 덕분에 지탱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분이 말한 무지는 다름 아닌 종교의 다른 면에 대한 무지를 뜻한다고 봅니다. (틀렸어요. 몰러가 말한 무지는 총체적인 무지예요) 과학이 발달했어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하지만 이것을 말 그대로 판단하면 곤란하다고 봅니다. 과학발달에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은 것은 과학이 반증명하지 못하는 영역이 종교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전적으로 종교가 진리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세월이 가면 과학이 종교적인 것을 부정하는 증명을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 같은 종교에 긍정적인 역할을 해줄 수도 있겠지요.(글쎄요?)
위대한 과학자의 99%가 신앙인이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군요. 이것은 그리스도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를 포함했겠지요?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논의된 사항은 그리스도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저는 종교를 가진 과학자들이 과연 종교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했을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제가 잘 아는 과학자는 이분뿐입니다)은 어릴 때 받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부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의 위대한 질서부여자로서의 신을 찬미한 것이지 유대교의 신(바로 우리의 하느님입니다)을 말한 것은 아니더군요. 다른 과학자들도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의 하느님도 구원의 하느님만이 아니라 이렇게 좀더 업그레이드된 신이었으면 합니다.
(99%가 아니라 30%가 유신론자였고, 무신론자가 10%, 나머지는 불가지론자에 포함할 수 있죠. 유신론자의 경우에도 범신론이지 기독교적인 신을 말한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불가지론자가 추구하는 신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와 빈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저도 이런 말을 했다가 반기독인들에게 처절하게 비판당했고, 또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저지른 죄악만 들춰내는 결과만 낳을 뿐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선진국일수록 종교가 약화되고 있고, 결론은 종교를 버림으로써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슬프지만 이것이 더 그럴 듯한 해석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선진국일수록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종교가 도덕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랑할 것이 아니라 반성해야할 문제입니다.
(종교를 대치할 뭔가가 부족해서 타락했던 것이죠. 그렇다고 종교만이 모랠러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와 과학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과 지식을 혼돈하고 계시지는 않은지 반문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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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어떠신가? 다양한 견해가 있을 것이다.
“역쉬 기독교는 어쩔 수 없어.”
“역쉬 삽소리잖아. 밥그릇 챙기는 버릇은 못 버리네.”
“기독교가 저 정도만 되어도 안티 때려친다.”
“오잉? 교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쩝, 썩 만족하지는 않지만 괜찮네요.”
몰러도 단방향의 견해를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가톨릭이 개신교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예전의 오십보백보의 견해보다는 조금 긍정적으로 변했다) 몰러는 반대자로서의 안티가 아니라 비판자로서의 안티가 되고 싶고,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런 수준을 요구한다. 인간을 위한 기독교 비판이지 인간을 위한 기독교 비판이 아니다. 그리고, 개독들에게는 종교말살론적인 대응만 있을 뿐이다.
가톨릭인들에게 한가지 슬픈 사실은... 인용한 신부의 글에 대한 소사신부의 한마디를 보라.
“곰패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사제는 아직은 일부야. 신부가 아닌 안티의 글이라고 할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