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의 삽질 종합

마태의 삽질 종합

몰러 0 2,619 2005.06.20 16:51
마태의 삽질 종합    
  
 
 
작성일: 2002/05/11
작성자: 몰러




예수의 행적을 그대로 보지 말고, 예수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를 보고 느끼자는 기독교인들의 견해에 일단 반대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이 사라질 때까지 말이다.
이미 몇 번이나 언급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검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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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22:41-46에서 예수는 직접 자신이 다윗의 자손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것을 가지고 공격하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는 육으로는 다윗의 자손이고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대꾸한다. 하지만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므로 육으로는 다윗의 씨가 아니다. 그러므로 2절부터 이어지는 족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럼 마리아가 다윗의 씨일 수 있다고 우길 것인가? 족보 맨 끝에는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고 했지 마리아를 낳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여자를 거의 인간 취급도 하지 않고 애 낳는 기계와 밥하는 가정부로만 간주하셨던 하나님을 심히 부정하는 소리다.

(1:22-23)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신 것은 동정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였다. 그리고 예수와 임마누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는 여호수아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이름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은 태어나서 별 짓도 하지 않고 이미 기록에서 사라진 인물이라는 점이다. 마헬살랄하스바스, 즉 하나님이 (여자)예언자와 바람피워 낳은 아들이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유대를 치려던 시리아(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에브라임, 사마리아)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토사구팽 당한 앗시리아에 멸망하였으니 이미 예언이 성취된 것이 아닌가?

(2:5-6) 그들이 왕에게 말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너 유대 땅에 있는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통치자들 가운데서 가장 작지 않다. 네게서 통치자가 나올 것이니, 그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일 것이다(다스릴 것이다)’”
해산하는 여인(마리아)이 아이(예수)를 낳을 때까지 그의 백성을 원수들에게 그대로 맡겨둔다고 했는데, 유대가 과연 원수들에게 맡겨져 있었나? 로마의 식민지였다고? 좋다. 그럼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올 포로로 잡혀간 남은 백성은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예수보다 훨씬 이전이며 예수 당시에는 그런 적이 없었고, 나중에 로마의 침공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것은 예수 사후 100년 뒤이다. 어슬프게 마태가 미가서를 컨닝하면서 이미 상황종료(그런 상황이 있기나 했는지)된 이야기를 앞으로 일어날 것처럼 말한 것이다.

(2:15)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에브라임)을 꾸짖기 위해 나온 말이다. 내 아들(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이집트에서 불러냈지만(출애굽), 신으로부터 멀어져가고, 바알 우상을 섬기며, 그 동안 길러주고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 은혜를 몰라보니 안타깝다는 말이다. 정리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전의 순수했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한 것이다. 필자의 분석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할 수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부름을 외면하고 멀어졌으며, 짐승을 잡아 바알에게 번제를 드렸다고 할 수밖에... 그리고 예수는 예언대로 이집트에 되돌아가기도 하고 앗시리아의 지배도 받았겠지.

(2:17-18)이리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으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우는데, 자식들이 없어졌으므로, 위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위로를 거부할 정도로 슬픔이 컸다)
그럼, 적국에 잡혀간 아들딸들이 고향 땅에 돌아온다는 예언은 언제 성취될 것인지? 예수의 행방을 찾지 못해 두 살 아래의 아기를 모조리 죽이기로 한 헤롯의 만행(그나마 헤롯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헤롯을 부추긴 것이다)과 원수들에게 잡혀갔던 포로의 복귀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기독교인들은 대답해 보라.

(2:23) 이리하여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씀하신 바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 예언이 언제 있었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구약뿐만 아니라 도대체 어느 예언서에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 나타나 있는가? 그리고, 예수는 이집트에 갔다가 나사렛으로 간 것인가, 아니면 예루살렘에 가서 할례의식을 치르고 나사렛에 간 것인가?
표준새번역 성경을 보면 또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거의 모든 구절들에 대해 일일이 다른 복음서 어디어디에 나온다고 표시하면서 누가복음 2:39는 왜 표시하지 않는지 말이다. 결론은 성경번역자들도 답을 못 찾았다는 것이 아닌가?



지금부터는 예수가 경전과 율법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예언서에 나온 내용대로 예수가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예언을 이루려 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면 앞부분을 포함하여 예수가 절대로 한 적이 없는 행적을 마태가 짜집기했다고 보든가...
논의의 편리성을 위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전까지는 마태의 어거지라고 하고, 앞으로 까댈 부분은 예언 해석상 마태(또는 예수)의 실수라고 하자.

(3:3) 이 사람을 두고서,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이 구절은 목사들의 설교 아이템 중에서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면 단골 레파토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사야서의 위상을 심히 훼손케 하는 것이란 점은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나보다. 이사야서는 원래가 이미 상황이 종료된 사건을 후대에 묵시적 표현법을 사용한 것일 뿐이라고 신학교에서 가르친다. 이사야서를 하나님의 무한한 돌보심, 즉 하나님은 잠시 고난을 주시지만 믿고 따르면 결국 승리케 하고 또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설사 이사야서가 예언서라고 해도 그 주안점은 바빌론유수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주겠다는 식 같은 하나님의 약속일 뿐이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는 조셉 스미스, 문선명이나 이재록처럼 새로운 교파를 만든 것일 뿐이며,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을 구세주 또는 재림주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14-16)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예언서와 직접 비교해 보시라.
옛적에는 주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내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 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마태복음에 인용된 예언에 대해 황량한 갈릴리에 예수가 감으로 해서 그곳 백성들에게 큰 빛이 되었다고 목사들은 흔히 해석한다. 하지만...
예언서는 옛적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에 한정되어 있었지만(또는 스불론 및 납달리 지파의 지배아래 두었지만) 곧 해방시켜서 온 세상(당시 유대인의 관념상 땅 끝은 지중해안과 이라크 지방 정도였다)을 지배케 하거나 온 세상에 민족을 퍼뜨리겠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의 성취시기는 물론 예언서가 작성되기 전(이사야서는 묵시적 표현법을 사용한 역사서란 말은 좀전에 했다)이지만 백번 양보하여 정말로 예언이었다고 해도 예수가 태어나기 몇 백년 전이다. 긴말 않겠다. 유대역사를 다시 훑어 보라.

여기서 또 한가지 딴죽을 걸어야겠다. 세례 요한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예수가 허겁지겁 갈릴리로 토낀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엔 요한이 헤롯의 범죄를 지적한 뒤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힌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단순하게 이런 이유라면 예수가 토낄 필요가 없다. 예수의 도망은 요한과 예수가 같은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이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잠수타겠다는 심사가 아닐까? 동업자가 체포되었으니 도망가는 것이 당연할 터...
나중에 요한이 섭섭한 마음을 제자를 시켜 간접화법으로 토로한다.
“네가 계속 해 처먹을껴? 우리가 다른 얼굴마담을 세워삔다.”
이에 예수는 생깐다.
“시작은 요한 니가 했을지라도 사실 넌 조또 아녀. 아무리 잘난 척 해봤자 넌 내 따까리라고 이미 찡박혔지. 개기지 말고 살 궁리나 혀. 자 봐라. 사람들은 모두 너보고 미친넘이라고 하자너. 물론 나도 항상 좋은 소릴 듣는 건 아니지만 너보다 팬 확보는 많이 했자너.”

이상 소사신부의 마11:2-19, 눅7:18-35에 대한 해석이었다. 개독들은 ‘역시 가톨릭은 악마와 결탁한 이단’이라고 우기겠쥐.


(8:17)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이사야서 53장은 거의 예수를 가리킨 내용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과 예수의 유사성을 아는 기독교인이 드물다. 성경공부 좀 하기 바란다.
그는 멸시받고, 버림받고, 고통을 겪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 슬픔, 징벌을 대신 받았다. 우리의 죄악은 모두 그에게 지어졌다. 굴욕과 고문을 당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세대 사람들은 그의 속죄양됨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악한 사람(두 강도?)과 함께 묻히고(죽었고),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부활)을 보고 만족하였다.(실은 고난의 결과를 보고 만족한 것임). 남들이 죄인처럼 여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죄지은 사람들을 살리려고 중재에 나섰다. 조또 아멘이다.
그런데, 너무 좋아할 일은 못된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일전에 나온 꼭 유인원 닮은 합성사진이 예언에 나온 그와 가깝다. 금발고수머리에 하얀 얼굴의 귀공자는 예수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죽어서 부자와 함께 무덤에 들어갔을까? 또한 그가 그의 영혼을 속죄제물로 여기면, 그는 자손을 볼 것이며,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이건 맞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사이의 조사에 따르면 예수는 프랑스 어느 땅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애 낳고 알콩달콩 살다가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수기록을 세우고 죽었을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이사야서를 위시한 어떠한 예언서도 예수를 지칭한 것은 없다. 예수나 그 추종자들이 예수의 행적을 예언서에 끼워 맞춰 변조하였거나, 예수 자신이 예언서에 맞춰 행동한 것이다. 예언이 성취된 것인지 예언에 끼워 맞춘 것인지는 사실 구별하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예수문제만큼은 그렇지 않다.

(11:10)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먼저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예수가 요한을 길잡이벌레 취급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은 말라기를 가지고 모종의 합의를 한 듯 하다. 마태서와 누가서를 보면 둘의 궁합이 딱 맞아떨어진다. 요한을 새로이 보내질 엘리야 예언자로 한 것도 그렇다. 하지만 말라기를 다시 한번 정독해 보시라. 인용한 문구가 과연 예수와 요한을 가리키는 말인지...
말라기서는 타락한 제사장이나 성의 없는 번제행위에 대하여 꾸짖고 율례와 법도를 준수할 것을 협박을 섞어 강조하는 내용일 뿐인데,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예언서로 취급한다. 좋다. 예언서로 치자. 그럼,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고 살아 남겠느냐고 했는데 과연 못 견디고 죽은 이가 있었나? 요한이 과연 타락한 레위자손을 정화시켰는가? 예수가 온 때가 크고 두려운 날이었는가?

(13:35)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었다. “나는 내 입을 열어서 비유로 말할 터인데, 창세 이래로 숨겨 둔 것을 드러낼 것이다”
예수는 비유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직접화법도 구사했다. 그러니 이 예언 인용은 삑싸리 되겠다. 시편을 찬양이 아닌 예언으로 보는 엽기성에 치가 떨리지만 꾹 참고 읽어 봐주자. 그래도 시편 78장은 출애굽 이후 너무나 쉽게,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흔들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 분노, 용서를 다루고,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처럼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않고 유다지파와 다윗을 택한 것에 대한 정당성을 다룬 것이 아닌가? 여기에 뭔 창세이래의 비밀이 있나? 그리고, 시편78:3을 보라. 들어서 이미 아는 바이며 조상으로부터 전하여진 것이라니...

(27:9-10) 그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그들이 은돈 서른 닢, 곧 이스라엘 자손이 값을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서, 그것을 주고 토기장이의 밭을 샀으니, 주께서 지시하신 그대로다.”
예레미야서에서 토기장이와 관련된 구절을 보면 전혀 상관없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항아리를 산다는 말은 있어도 밭을 산다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밭을 산다는 구절이 있는 부분은 어떤가? 토기장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하여간 유다가 내팽겨친 예수의 몸값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을 마태가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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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지 알겠는가? 그렇다.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적어도 유대인의 경전에 예언되어 있는 메시아는 아닌 것이다. 이렇게 조작할 수 있다면 예수의 모든 행적이나 심지어 존재 그 자체조차도 조작되었을 수도 있다. 신약의 형성시기나 변천사를 본다면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진다.

믿으면 보이고 느낄 수 있다는 애처로운 변명은 제발 그만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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