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가 위대한 개혁가라고? 웃기지 마...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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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6:30
마틴 루터가 위대한 개혁가라고? 웃기지 마...
작성일: 2002/03/21
작성자: 몰러
먼저 이 글은 명백하게 마틴 루터의 업적을 깎아 내리기 위해 쓴 것임을 밝혀둡니다. 불만 있으면 뎀비셔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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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는 타락의 극치에 서 있었다. 당시 스콜라적인 해석에 기반을 둔 기독교는 12, 3세기 그리스도 청빈의 논쟁(예수를 핑계로 재산소유권이 교회에 있는지, 세속권력에 있는지를 다툰 논쟁)에서 황제파를 누르고 교황파가 승리함으로써 교회가 부를 축적하는데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세속권력은 신권 아래에 있다는 암브로시우스의 주장과, 오류를 범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교회의 위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이 믹싱되어 최대의 권력을 갖게 되었고,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에 어김이 없이 교회는 최악의 타락상태에 빠진 것이다. 로저 베이컨과 윌리엄 오브 오캄은 그러한 교회의 타락을 꾸짖고, 권위는 하나님과 주 예수에게 있는 것이지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나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성직자의 무식을 비웃었으며, 오캄은 교황의 소유권을 부정하였다. 특히 오캄은 신앙과 이성에 확실한 경계를 짓고 스콜라 철학의 장황한 변리를 타파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초기 종교개혁의 움직임은 교황청이 투옥, 파문, 암살위협 등의 방법을 총동원한 덕분에 잠시나마 그 기세가 억눌렸다. 하지만, 성경의 자국어 번역과 이를 뒷받침한 인쇄술의 발달 덕분에 신의 대리인인 성직자의 위상은 깎아 내려지고 말았다. 그 이전(1229년부터)에는 성경의 개인소유가 금지되었고, 설사 개인소유를 허용했다손 치더라도 어려운 라틴어는 백성들이 성경에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고, 값비싼 양피지에 필사하는 성경제작 방식으로 인해 결국 성경 자체가 희귀하여 성경보급은 요원한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성직자가 독점적 교리해석권은 인쇄술 보급으로 약화된 것이었다. 소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이란 성경의 보급확대가 이끌어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성경보급 확대로 인해 루터의 지지자가 증가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근본적인 성공이유는 딴 데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그리고 게르만 지역의 봉건영주들은 수입의 많은 부분을 교황청에 빼앗겼다. 이는 자신의 영토 관리에 있어서 그 권위가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백성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영주는 백성들로부터 외면 받기 마련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종교에 상관없이 띨띨한 백성을 강압과 권모술수로써 다스리면 될 것이라고 했지만 군주론은 아직 이탈리아에서만 전파되었고 게르만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설사 독일의 영주들이 군주론을 적용하였다고 해도 옛날처럼 백성들이 멍청하지도 않았고, 각종 수탈에 따라 영주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위기상황에 봉착한 영주들에게 마틴 루터는 흡사 재림주와 같은 존재였다. 당시 모든 위기의 원흉인 교황청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루터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루터는 영주와 귀족들에게 독일을 교황청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압수하자고 외쳤는데, 이것만큼 영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만한 주장이 어디 있겠는가?
우선 루터의 신학과 철학의 기조를 살펴보자.
철학적으로 보아 루터의 논증은 윌리암 오브 오캄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온 것임은 틀림없다. 그 수준에 있어서는 한참 뒤떨어진 저급한 것이었으나, 그 논증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나 의미는 혁명적이었다. 루터의 중심적인 주장은 일(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됨이었다. 그는 성서의 권위가 교회의 어떠한 전통이나 어떠한 성직자의 권위보다도 위에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취했다. 성직자들은 그 자신이 타락하여 백성들의 영을 인도할 자격이나 능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며, 연옥, 미사, 성배, 성의와 그곳에 새겨진 영상, 수도원에 보관된 성물들(예를 들어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의 나무 조각, 롱기누스의 창, 베드로가 찼던 칼, 마리아의 두건, 야고보의 신발, 바울의 허벅지 뼈 따위들), 교황의 은사에 대한 모든 불요품들은 말끔히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그대의 마음이 어디에 붙어 있고 무엇을 믿든 간에 그것이 그대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에 보관된 성물을 보고 소설의 화자인 아드소 수련사가 감탄을 하자, 그의 사부인 주인공 윌리엄 수도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수도원에 보관된 예수님의 십자가 토막들을 전부 모으면 원래보다 몇 곱절은 더 큰 십자가가 될게야.”
루터는 또한 운명설(예정설)과 바울의 죄의 개념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킨 오캄의 철학을 오류확대하여, 인간의 끔찍한 상태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만 해결되며 영이 깨끗하여 진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적/철학적/사회적/역사적 배경을 놓고 본다면, 루터가 농노해방을 거부하고, 농민의 반란을 강력하게 진압할 것을 영주들에게 권한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이 인도하심의 소치도 아니요, 중심사상이나 신앙의 기조가 필연적으로 개혁을 이끌어 낸 것도 아니요, 백성들에게 그의 위상이 위대하게 보였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게르만의 귀족/영주들이 필요로 했던 것과 루터의 주장이 합치되었기 때문에 영주들의 비호 하에 그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둔 것일 뿐이었다. 루터가 농민의 편에 섰다면 지금의 개신교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떤 영주가 반란의 지지자를 비호할 것인가? 오히려 영주들의 손으로 교황에게 바쳐져서 화형대에 묶이고 말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그의 종교개혁이 완전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이후에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쟁 후 더 이상 서로를 이길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프로테스탄트(독일)와 카톨릭(프랑스)이 협상을 함으로써 소멸을 면한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순교라는 이름으로 개죽음 당한 것은 어느 쪽도 책임진 적이 없다.
개신교인들에게 루터는 타락한 종교를 바로잡고, 성경을 바로 보게 한 위대한 개혁가이다. 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이나 심지어 가톨릭교도들에게도 개혁자요, 대단한 사상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몰러는 이러한 견해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의 신앙적 중심사상, 즉 행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은 당시 교황청이 남발했던 수백 가지의 면죄부를 하나로 통일한 것일 뿐이다. 그 폐해는 지금 개신교인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후 가톨릭이 여러 차례의 공회개최와 강령채택 끝에 표면적이나마 자기 개혁을 이룬데 비해 프로테스탄트는 위선적이고 훨씬 더 위험한 타락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 법과 제도, 계몽주의, 합리/경험주의가 아니었던들 프로테스탄트는 중세 가톨릭보다 수십 배는 더 타락하고, 인류에게 극악한 종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글이 루터의 영향을 축소하거나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루터는 분명히 세계를 뒤흔들었으며, 엄청난 파급을 불러왔다는 것은 틀림없다. 가톨릭의 자기혁신도 프로테스탄티즘의 대두 때문인지 아닌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영향은 분명히 끼쳤다고 본다.
몰러는 루터의 개혁이 가져다 준 영향이 그리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도 루터를 ‘위대한 종교개혁가’라고 씨부리거나 ‘거대 권력에 항거하고 약자의 편에 선 운동가’라고 개긴다면 몰러의 대답은 이거다.
“조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