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하나님인가? (1)
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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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20 15:27
누구의 하나님인가? (1)
작성일: 2002/01/14
작성자: 몰러
유대인의 하나님? 만민의 하나님?
일전에 철학사적 관점으로 본 기독교 역사를 언급하면서, 예수의 사상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유대에 한정될 성질의 것이었으나, 바울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구출하였고, 더구나 바울에 의해 이방인(유대에 대한 이방인) 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만이 아닌 만민의 하나님, 유대만이 아닌 온 민족의 구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아닌 시대적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면?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금기시 되지만, 기독교인의 억지에 대응하여 억지를 부려보자.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어찌 되었을까?
바울이 전도사역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 두고, 만약 베드로와의 주도권 다툼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어찌 되었을까?
무식한(바울에 비해) 베드로와 똑똑한 바울이 만약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면 기독교는 어찌 되었을까?
위의 가정에 대해 한번이라도 곰곰이 생각해본 기독교인이라면 아찔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안티들에게는 아쉬운 역사일 것이고...
성경은 Testaments로도 불리며, 이는 신과의 약속 또는 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Old Testaments는 야훼와 이스라엘 민족의 약속이며, New Testaments는 일부내용을 제외하고는 신과 전 인류와의 약속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정의하고 있다. 구약은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자신의 권위를 밝히고, 추종을 요구(강요)하며, 삶의 방식에 대한 율법을 규정하고, 상벌을 규정한 것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구약을 율법의 성격이 강하게 포함된 의미어로 “토라”라고 부른다. 신약은 구약의 일부 내용이 파기, 수정되고 예수에 의한 - 그리고 예수를 위한 것도 포함하여 - 새로운 약속이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벌이 조금 규정되어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는 구약과 신약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짓자는 것이다.
상벌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일종의 계약서이기 때문에 상벌의 개념이 아니라 계약 불이행에 따른 강제조치로 표현하여야 한다고 강변한다. 계약을 어겼으니 불이익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성경을 계약서처럼 보기에는 또 다른 기독교인이나 안티들에게는 무리가 있다. 성경만큼 그렇게 불공정하고 일방적인 계약은 거의 없다. 즉 노예계약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언제부터인지 그 계약을 이행키로 했다. 창세기때 이미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약을 어겼을 때는 개인적이거나 민족적인 고난을 받았으며, 계약 이행을 잘 했을 때는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구약을 잘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민족만의 계약이고 율법임을 알 수 있다. 구약 여기저기에 수시로 반복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사악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즉 유대인의 하나님만 있다. 유대인하고만 계약을 맺었으며, 유대인만을 돌보았으며, 유대인에게만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약속했으며, 유대인만 시험하였다. 근처의 다른 부족(특히 블래셋, 즉 팔레스타인)은 쫓아내고 죽였으며, 애굽민족은 실컷 이용해 먹고 차버렸으며(물론 역사적 증거로 비춰보아서는 택도 없는 소리지만), 유대인과 같은 종족인 사마리아(가나안)인도 왕따하였다.
이렇게 특별한 민족인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을 자신들의 종교로 전도할 이유가 없다.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뭐가 아쉬워 전도를 하겠는가? 유대인임에 틀림없는 예수마저 그랬을 정도니까...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떼에게로 가거라(마태 10:5-6)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마태 10:24)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태 10:26)
결국 사마리아 여인은 개 취급당하는 것을 감수한 끝에서야 딸을 살릴 수 있었다. 여기에서 보면 예수도 야훼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신 것이다. 그 외의 예수의 행적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방전도는 허용하거나 언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지시한 것은 완전히 색다르다. 예수의 부활이 주는 의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에 의한 신성의 증거도 아니고, 재림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도 아니라, 이방전도를 지시한 것이라 한다.
물론 목사들이 부활의 의미에 대해 신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신성의 예수이지만, 목사들끼리의 토론, 그리고 신학대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방전도가 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결국 한민족은 유대 민족이 될 수밖에... 이 시점에서 한번 비웃어 줘야겠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타이핑 하다가 이렇게 우습긴 처음이다. 왜 웃어야 하는지는 쫌 있다 자세히 설명될 터이니 따라 웃지 마시라.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 28:18-20, 마가 16:15-18, 누가 24:46-49)
다음 기회에 본격적으로 예수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논하겠지만(까대는 글이 될 것임을 미리 말한다) 맛 뵈기로 몇 가지 말하기로 한다.
먼저, ① 십자가 사망 이전까지는 예수가 감히 말하지 않았던 전권위임이다.
둘째는, ② 이방전도를 개시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이어지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에 의한 세례로써 삼위일체의 증거로 삼으려 하는 덜떨어진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고, 단지 이방전도가 중요한 문제임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③ "너희"가 누구를 지칭한 것이냐는 의문에 대한 구구한 해석들을 야기한 구절이다.
①에 대해서 살펴보면(이 글에서의 주된 논점이 아니므로 ②로 건너뛰어도 좋습니다) 물론 자신이 전권을 위임받은 듯한 인상을 주는 언급이 사망 이전에도 있었으나, 잘 따져보면 전권위임이라기보다는 대속(십자가 보혈)과 구원자로서의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부활이 주는 의미 중에서 기독교인들이 꽤 비중 있게 다루는 부분이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도 직결된다. 땅에서의 권세는 그렇다고 쳐도 하늘의 권세는 분명 신과 같은 권세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문제는 여기에서 논의하여야 한다. 신은 유일하다는 절대적 명제 하에서는 예수의 신성은 아무런 보장을 받지 못한다. “항상”, “모든”, “전부” 등의 낱말을 함부로 사용한 결과이다.
하늘의 권세는 단순히 위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하늘의 권세는 신의 자격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신은 야훼가 유일하다. 결국 예수는 야훼 자신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생전에 아버지를 자주 호칭했다. 그 아버지는 육체적 아버지(그나마 피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요셉을 지칭하지 않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러한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또 다른 모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임과 동시에 셋이다.”라는 제논이 “혀 깨물고” 자살해 버리고 말아버릴 “거룩한 궤변”(Holy Paradox)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마태 28:18의 구절만이 아니다. 다른 부분에서도 예수의 신성이 필요한 곳이 많다.)
②는 이번 글의 주요 논의점이다. 관련구절들을 다시 살펴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마태 28:19)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마가 16:15)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누가 24:47)
(요한 복음엔 아무 언급이 없음. 이런 점에 있어서도 마태, 마가, 누가는 공관복음이고, 요한은 별관복음(ㅋㅋㅋ)이다.)
어떤 교인들은 사도행전 1장 6절에서 8절의 내용, 특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마침내 땅 끝에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방전도사역의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 논의와 별 상관없는 내용을 덧글로 도배질하기 좋아하는 유병기 같은 부류들은 특히 실수하기 쉬운 게 이런 경우인데...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에게 분명히 다음과 같이 질문했었다.
“주님, 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리 예수가 부활한 뒤까지도 제자들은 예수와 자신들의 사역의 의의를 인류의 구원이 아닌 로마로부터의 이스라엘 독립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되찾는다는 말이 예언의 성취를 비유한 것이라는 식의 억지와 궤변과 변명은 제발 그만두시라.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에 나온 저 구절들은 예수께서 유대인의 틀을 뛰어 넘으신 증거이며, 이방인도 구원하라고 부활하셔서 직접 증거 하신 것이다. 아멘~ ...
...
...
...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뭐... “모든 민족”, “온 세상 만민”에 어떠한 비유를 갖다대거나 비틀어서 해석하지 말자. 그래야 교인이나 안티나 서로 피곤하지 않으니까. 말 그대로 모든 민족이고 만민이 맞다고 하자(하지만 아무리 봐도 온 이스라엘 민족, 온 유대땅이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온다). 그리고 장사한지 3일 동안에 전도노선이 갑자기 변경된 것에 대해서도 일단은 따지지 말자.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모든 권세를 주면서 지시하셨을테니...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변덕이 궁금할 뿐이다. ‘그 동안 유대인만 챙기시다가 미개한 한국민족이랑 북극의 이누잇까지 챙겨주시겠다는데 고맙지 뭐’ 하고 넘어 가고 치워버릴 문제가 아니다. 절대적인 신에게 예정이라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도 문제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니까. 이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초월자인 하나님의 권세는 이런 논리를 뛰어 넘으신다고 하지도 마라. 또 다른 모순을 불러오니까...
그럼, 예정은 처음부터 변경된 것이 없었으며, 단지 그 동안 예수가 하나님의 예정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할까? 십자가에 매달려서 숨이 끊어진 후에 하나님께 가서 전권을 부여받을 때나 알게 된 것일까? 예수가 하나님을 (선의의) 변덕쟁이로 만들지는 않을 것이니...
이것을 시사해주는 듯한 구절이 누가복음에 있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는 구절 말이다. 하지만 이 약속이 언제부터 있었는지, 그리고 ”온 민족 구원“을 말씀하신 것인지, 제자들이 위로부터 와서 입게 될 능력을 말씀하신 것인지, 사도들에게 이적(귀신 쫓고, 방언하고, 독사에 물려도 까딱없고, 만독불괴의 몸을 갖게 되는 것)이 있는 세례를 주는 능력을 부여하겠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냥 좋게 보아서 안티들의 동의하에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약속이 처음(굳이 소급하자면 인간이 타락(?)한 때부터이거나, 아예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부터 있었고, ”온 민족 구원“, 즉 이방전도의 교시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분명 생전에 전혀 다르게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예정)은 원래부터 있었고, 또 변함이 없었지만 예수가 살아생전 뭘 잘못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이건 아무리 봐도 코미디다. 예수의 삑사리를 인정할 기독교인이 있지 않는 한은...
그럼 뭐야?
하나님의 예정이 바뀐 적도 없고, 예수는 구원의 대상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려면 어떤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까? 꾸민일보의 김모 교수나 말보회 따라지들이 한민족은 유대민족의 한 지파라고 우기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처절하기 짝이 없는 논고의 아픔을 거친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
결국 후대의 조작만이 유일한 답이다. 마지막에 다루겠다.
③은 이 글의 논의점과 별 관계가 없으니 건너뛰어도 좋지만 짧으니까 함 봐주기 바란다.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어떠한 비유나 상징도 걸러내고 직해하면 종말의 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말이다. 전에 올린 글에도 있지만 예수는 살아 생전에 자주 제자들이 생존하고 있을 때, 즉 가까운 시기에 종말이 올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종말은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지 않았다. 결국 “너희”는 “제자들”이 아닌 다른 대상을 지칭함이다. 기독교인들이여. 당신들이 바로 그 “너희”가 되겠다는 수작인가?
“종말=완성된 질서가 구현된 세상” 라고 주장하시는 어느 분에게 여쭙습니다.
“학교 성적 꼴찌는 인생의 1등이다.”라는 말과 “학교에서는 비록 꼴찌를 했더라도 인생에서 낙오한 것은 아니다.”의 차이점을 아시는지요?
저는 전자는 개소리이고, 후자는 개소리가 될 소지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님은 어떻게 설명하실지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