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와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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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뿔님의 칼럼입니다

엘리야와 환생

쥐뿔! 0 2,985 2002.10.16 10:12
구약 최대의 선지자는 단연 엘리야다.

얼마나 야훼가 그를 예뻐했는지는 그를 불병거로 살아있는 채 하늘로 올리게 된 것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장면은 열왕기에 잘 나와 있다. 제자 엘리사와 함께 광야에서 이별을 하는중 하늘에서 불마차로 데려갈 때 엘리사가 못가게 막으니 엘리야의 옷이 찢어져 둘을 가르고 하늘로 간 것이다. 그 구절을 자세히 보면 불마차를 타고 올라간게 아니라 불마차와 불말이 엘리야 주위를 돌아서 불회오리를 일으키는데 빨려올라간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세의 출애굽때 불기둥이라든지 십계명 돌판을 불로 새긴 것이라든지 보면 야훼의 존재는 불의 현현이다. 에녹은 그냥 야훼한테 하는 짓이 어여뻐서 하늘나라로 산채로 데려갔지만, 엘리야는 수많은 기적과 이적으로 바알신의 제사장 세력 수백명을 갈멜산에서 불의 심판으로 처치하고 나서 죽을 때가 되어선지 하늘 나라로 올려진 것이다.

다만 산채로 하늘에 올려진 것으로만 기억을 하자. 그런데 엘리아는 그후에도 여러번 성경에 등장한다. 아래 구절은 구약의 마지막 편인 말라기의 맨마지말 줄에 나오는 메시아 등장 예언이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가 죽은지 900년이 지난 신약 예수시대에도,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엘리야가 반드시 다시 와서 로마의 압제하에 있는 유대민족을 구해줄 메시아로 갈망한 것이다. 마태복음 6장에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가 대해서 엘리야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시대 유대인들이 구세주 엘리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처럼 사람들은 예수를 엘리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는 마태복음 11장에서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엘리야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여기서는 한마디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니"가 "저가 네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라고 구체적으로 변형되어 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기까지는 구약의 메시아 엘리야가 예수의 예비길로 변형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세례 요한이 엘리야다. 혹은 사람들을 요한을 보고 말하되 엘리아나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의 하나이다라고 한다. 이런 일이 지금 신약의 시대에 가능한 해석인가?

살아서 승천한 엘리야가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요한이 된다. 당연히 윤회론적인 사고이다.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예레미아나 엘리야의 환생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어찌 그리 쉽게 예수와의 대담에서 나올 수 있는가?

그리고 이어진 요한의 죽음, 이제 환생한 엘리야는 목이 잘려 죽었다. 그후에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전에 산정상에서 맞는 유대의 지도자 회합이 있었다. 여기에 드디어 다시 나타나는 엘리야와 민족의 구원자 모세, 그 셋이서 한참 동안 광채 속에서 회합을 한다.

여기의 모습에서 엘리야는 목잘린 요한이 아니다. 그냥 엘리야다. 그럼 어찌된 것인가? 세례 요한의 전생은 껍떼기인가? 살아서 승천한 엘리야가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인 요한으로 태어나서, 다시 목잘려 죽고 다시 엘리아가 되는 것인가?

윤회론이 성경에서 사라진 건 기원후 3,4 백년 후이다. 엘리야가 예비한 요한이라는 이야기는 불교는 아닐지라도 윤회론적 인식 바탕이 없이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대화이다. 예수가 이 윤회와 환생을 들어 자신의 증거함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는가? 엘리야가 살아서 승천함과 요한으로의 환생, 그리고 재대면 등 예수가 자신의 구세주 증명을 위한 장치들에 등장하는 윤회와 환생이 그냥 뻥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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