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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비교할 바 없는 열등종교
쥐뿔!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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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6 10:12
그리스도는 메시아이자 구원자이고, 미트라이자 마이트레야(미륵)이며, 디오니소스이자 오시리스다. 이들 모두는 같다. 예수는 구원자이나 부처는 구원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대승불교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 불교이며, 한마디로 상구보리하화중생으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한다는 상구보리는 이른바 마음바탕의 그릇이 높은 상근기 수행자의 길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는 하화중생은 이른바 근기가 낮은 하근기의 일반 대중신도들의 신앙이다..
그럼 왜 나는 상구보리를 수행자의 길이라 하고, 하화중생을 신앙이라 하는가. 상구보리는 원래 독각승이다. 즉 홀로 깨달은 자들이 자기 제자나 한정된 상근기자에게 설법으로써 또는 행위로써 보여주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니 이를 작은 수레(소승)에 자기들만 타고 가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작은 수레라는 것을 독각승단이 자기 스스로 폄하해서 말한 게 아니다.
하화중생은 일반 생활하는 사람들, 즉 깨달음의 수도길을 가지못하는 비근한 중생들을 어찌할 것인가? 그들도 불성이 있어 깨달음을 구하여 주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릇이 따라오지 못하고 생활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나서지도 못한다. 그래도 저 깨달음의 세계에 같이 동참시켜 가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큰수레에 같이 태우고 가야 할 사명이 있다.
위의 상구보리는 자력신앙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니 신을 갈구하지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 이게 원시불교이다. 여기에는 부처의 위신력과 기적도 없다. 인간의 삶의 구도일 뿐이고 소박하고 질박하여 구원이니 머니 이런게 없다. 여기에는 지옥이든 극락이 없으며 윤회가 실체가 된다.
그러나. 하화중생은 자기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가지 못하니 자신을 구제할 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타력신앙이다. 부처님께 빌어서라도 자기를 보호하고, 기도를 하고 절을 하고 복덕을 쌓음으로써 저세계 아미타 극락에 가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부처님을 의지하여 극락에 가는 길이다. 여기에서의 부처는 신이다. 중생은 자비심과 자리이타의 행위와 베풂으로써 부처가 구원해주는 구원의 자격을 얻게 된다.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고 극락으로 이끌어주는 부처가 당연히 신이니 윤회는 없고 극락과 함께 지옥이 있다..
이 두 가지, 깨달음의 자력과 가피력의 타력신앙 여기에 대승불교가 있으니 소승은 대승이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큰 수레를 지칭하여 속좁은 길로 폄하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절에 가면 대승에 숨겨진 소승을 찾아낼 수 있다. 대승에서 소승을 빼면 그게 일반 불교신도들이다. 이 대승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구원과 기원과 구복의 대가인 재물을 얻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9세기에 원효는 누구든 아미타불을 외우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아미타경에는 누구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죽는 즉시 아미타 부처님의 아미타 극락으로 간다고 했다. 저 유명한 가스펠송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와 한치도 틀리지 않는 이 뜻을 모르는가? “예수 믿으세요”는 “부처님 의지하세요’와 다른게 하나도 없다. 하나는 하늘나라요, 또 하나는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그 유업이다.
불교는 자력과 타력이 모두 숨쉰다. 그리하여 상근기와 하근기 중생을 모두 태우고 간다. 이게 대승불교다. 기독교는 하근기 중생들이 가는 길을 간다. 완전히 타력신앙이며 반드시 구원의 주체가 있다. 인간의 나약한 심성을 잘 이끄는 것이 이 타력신앙이다. 그러니 상근기의 건방진 수도자가 인간의 반야지혜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사탄의 꼬임이고 선악과를 다시 따먹는 건방진 짓인 것이다. 따라서 소승불교적 구도는 기독교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하근기 중생들에게 부처는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와 같은 신적 존재가 된다. 그러니 여러분 대승불교의 실상을 알아버리면 기독교는 하근기 중생들이나 하는 짓거리임을 알게 된다 이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불교의 극락세계는 부처님을 부르든 안부르든 자비와 동정심과 사랑의 행위는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는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 않아도 모두 극락에 간다는 말이니, 하근기 중생수준의 기독교가 얼마나 한심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