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글] 네로를 변호함


[다시 쓰는 글] 네로를 변호함

※※※ 0 7,853 2005.06.08 05:32
[ SNU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5년04월25일(화) 16시15분24초 KST
제 목(Title): [다시 쓰는 글] 네로를 변호함



우리는 아들의 이름을 바울(Paul)이라고 짓지만

네로라는 이름은 개에게나 붙여줄 뿐이다

                             - C. 루드비히 '신약 시대의 통치자들'



재작년 성탄절 밤에 오랜만에 TV에서 'Quo vadis'를 보게 되었다. 한짱 때의

로버트 테일러와 데보라 카, 피터 유스티노프를 보고 반가와한 사람이 많았으리라.

그러나 영화 속의 네로의 모습은 엄밀한 역사학적 검증을 거친 네로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대중들 사이에서 유포되고 있는, 잔혹하고 사치스럽고 황음방탕한, 권력을

위해 스승과 어머니마저 살해한, 로마시의 대화재를 기독교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한, 그리고 마침내 폭정에 반기를 든 민중들과 군인들에

의해 축출되어 비굴한 모습으로 죽어간 네로의 이미지가 전부이다.



상업성도 영화의 중요한 한 요소임을 감안한다면 영화가 다소 선정적으로 제작된

것을 이해 못 할 바 아니지만 역사서의 탈을 쓰고서 서점에 널려 있는 책에서도

이와 똑같은, 흥미 위주로 씌어진 선정적으로 왜곡된 네로의 모습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흔히 로마는 사치와 환락, 퇴폐로 인해 멸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멸망으로

치달은 부패한 후기 로마는 기독교국이었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테오도시우스, 유스티니아누스등 기독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받은 황제들의

치세야말로 가장 부패한 시기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세력을 잡은 초기 기독교회의

교인들은 자신들을 박해했던 네로 시대의 로마제국의 모습을 악의적으로 왜곡시켜

버리고 말았다.



네로의 시대를 기록한 역사가들로는 타키투스, 수에토니우스, 요세푸스, 플리니우스

등이 있는데 이들 중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The twelve caesars'에서 로마의 초기

황제들을 통렬하게 비난했으며 'Quo vadis'에서 볼 수 있는 네로의 이미지는 거의

수에토니우스의 묘사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호교론적인 역사가들에게조차 그 성실성을 의심받는,

역사가라기보다는 풍자 작가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다행히 동시대의 많은

역사가들이 수에토니우스의 오류를 지적해주고 있다.



그는 겸손하고 검약, 성실했던 티베리우스를 교활하고 음험하며 나약한 겁장이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집권 초기 백만 세스타에 불과했던 국가 재정

(개인 재산이 아니다)을 떠맡아 23년의 치세를 거쳐 3조 세스타로 늘린 유눙하고

검소한 황제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에 그의 작품만을 위한 서가를 따로 설치할

정도로 방대하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저술가였으나 (8권의 자서전, 20권으로 된

에트루리아 역사서등을 남겼다)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바보'로 표현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다음 대목은 수에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편지를 인용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인데 여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에 충실하기보다는 흥미 위주로 기사를

쓰는 풍자가로서의 수에토니우스의 면모이다.

"나는 그(클라우디우스)가 극장의 황실 좌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그랬다가는 사람들이 경기는 보지 않고 그만을 바라볼 테니까..."

카리귤라에 대한 다음 구절은 호교론적 초급 입문서인 '신약 시대의 통치자들'의

저자 루드비히조차도 '농담'으로 취급한 부분이다.

"... 검투 시합용 맹수들의 먹이가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은 카리귤라는 '모든 대머리

죄수들을 먹이로 주라'고 명령했다..."



근대의 역사가 중에는 '케사르와 그리스도'의 저자인 윌 듀란트가 네로에 대해 특히

악의적인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불륜과 동성애, 음모와 질투 등의 저속한 주제에

관심을 집중한 특이한 역사가로서 주간지 기사를 연상시키는 글을 쓰고 있다.



네로의 생애를 검토함에 있어서 이런 왜곡된 시각의 역사서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불행히도 이런 비뚤어진 역사서들은 그 내용이 선정적이고 흥미로우며

기독교회의 구미에 맞다는 이유로 대량으로 유포되고 있으며 네로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다. 'Quo vadis'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네로의 시대를 현대인의 눈으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 시대의 보편적인

시각과 정서를 고려해본다면 네로는 그다지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여러 번의 결혼,

정적에 대한 철저한 응징, 잔인한 검투 시합, 사치스러운 연회, 이교도(기독교도)에

대한 박해, 이들 중 어느 것도 네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로마

황제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중세의 교황들의 생활을 떠올려본다면...)



네로의 아버지는 황족이 아닌 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였다. 네로의 어머니인 유명한

아그리피나는 옥타비아누스의 동생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2차 3두정치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안토니아의 손녀이다.

네로의 전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는 메살리나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브리타니쿠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자 했으나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후 그녀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그녀의 전남편 소생인 네로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그 직후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마음이 변할 것을 두려워하여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한다. 또한 네로는

즉위하자마자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다. 끝없는 권력욕의 소유자인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친아들인 네로마저 제거하려다가 발각되어 네로에게 살해당한다.



이러한 골육간의 권력다툼은 세습체제가 확립되기 전의 초기 왕권 시대에 어느

왕조에서나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로마의 경우 안정된 왕위계승률이 자리잡기도

전에 네로의 죽음으로 정통 왕조가 몰락하고 국권이 군인들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데에 그 비극성이 있다. 군벌의 지배는 필연적으로 국가 전체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오며 (한국 사회를 보라!) 로마의 부패는 네로의 죽음과 더불어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네로의 죽음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다.



17세의 나이로 황위에 오른 직후 한 죄수의 사형을 명령하는 문서에 서명하면서

'내가 왜 글쓰는 법을 배웠던가'라고 한탄했다는 episode 이외에 네로의 어린 시절을

짐작할 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즉위 직후에 원로원에서 한 첫 연설은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는데 타키투스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제국의 번영을 위하여 실시하고자 하는 정치의 원리와 모범에 대해

진술했다... 그는 또 자신의 가족들 중 누구도 뇌물을 받아서는 안되고 엉뚱한

야망을 품어서도 안되며 가정의 일과 국가의 일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선언

했다..."

연설의 후반부는 아그리피나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의 권력에 대한 도전이 이미 그를

괴롭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로마의 다른 황제들과 네로를 뚜렷이 구분짓는 그의 개성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에서 드러난다. 그는 예술 부흥에 관심을 기울여 연극, 문학, 음악이 크게

꽃피우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대규모의 예술 제전인 Juvenalia와 Neronia를

창시했다. 또한 음악 교사를 초빙하여 성악을 공부했으며 당대의 음유시인 세네카도

그의 교사였다. 그는 식도락이나 도박, 잔인한 검투시합에서밖에 즐거움을 구할 줄

몰랐던 후기 로마의 황제들과는 격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그는 금전 문제에 있어서도 비교적 담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제가 축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군인 출신 황제들(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베스파시안등)의

시대부터이다. 특히 오토는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황제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네로의 태도는 당시 로마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크리스티안이란 티베리우스 치하에서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에게 처형된 크리스트라는 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위험한 미신적 종파의 이름으로서

... 로마에까지 포교되었으며 세계 도처에서 급류와 같이 번창하여 가증스럽고

비윤리적인 행위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15:44)"

무신론자였던 네로는 원로원이 그의 선왕 클라우디우스에게 신의 칭호를 부여하자

"이제 그가 신이 되었으니 그가 먹던 독버섯은 앰브로시아(신의 음식)가 되겠군."

하고 빈정댔다. 이러한 무신론적 태도는 나중에 원로원이 그에게 등을 돌린 한

이유가 된다.



네로의 집권 10년째인 AD 64년 7월 19일에 로마에서는 유명한 화재가 발생한다.

네로는 방화범일 리가 없다. 그는 당시 시리아 지방을 순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곧 로마로 돌아와 대책을 마련했다. 그는 마이즈 평원에 이재민들을 위한

가건물을 세웠으며 자신의 재산을 털어 음식물을 공급했다. 그 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린 사람이 네로인지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소문이

로마 시민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먹혀들 만큼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반 사회적이었다.



화재의 뒤처리가 끝나자 네로는 새로운 건설을 시작했다. 좁은 거리는 확장되고

직선화되었으며 저수지가 정비되어 더이상의 화재는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들은 그의

업적에 열광하여 도시의 이름을 로마에서 네로로 바꾸자고 건의했으며 원로원은

로마시의 재건을 기념하여 새해를 네로의 탄생월인 12월부터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네로가 이러한 건의들을 물리침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치솟았다.



그러나 이미 비극의 싹이 트고 있었다. 네로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 드는 비용을

식민지에 대토지를 소유한 군벌과 귀족으로부터 거두어들였으며 시민들은 일체의

비용이 면제되었다. 불만을 품은 군벌들은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65년 겨울에서 66년 봄에 걸쳐 로마에서 페스트가

만연했던 것이다. 몇 주 사이에 3만명이 죽었다. 군벌들은 이러한 재난이 무신론자인

네로가 신에게 거역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귀족과 부호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은 네로를 불법자로 낙인찍었고 에스파니아와 갈리아, 게르마니아와 아프리카

등에 파견된 장군들이 반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지지세력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68년 6월, 31세의 네로는 자살하고 말았다.



네로의 죽음으로 권력은 공백 상태가 되었다. 누구든 먼저 옥좌를 차지하는 자가

황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네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은 에스파니아 사령관

세르비우스 갈바는 36시간이라는 기록적인(당시로서는) 시간에 322마일의 거리를

달려 로마에 입성하여 왕좌를 차지했다. 'Quo vadis'에서와 같이 "갈바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여유있는 행군을 할 처지가 아니었던 거다.



네로의 몰락과 함께 로마는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등 당대의 대장군이 연이어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으며 황제들의

재위 기간은 수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것은...

네로의 죽음과 더불어 싱싱하던 로마의 기풍은 사라지고 권력은 한갓 돈과 무력을

가진 세력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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