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NB님께] 선악이 뭐길래...


[RNB님께] 선악이 뭐길래...

※※※ 0 3,077 2003.09.30 04:43
[ Christian ] in KIDS
글 쓴 이(By): staire (강 민 형)
날 짜 (Date): 1999년 2월 26일 금요일 오후 02시 27분 26초
제 목(Title): [RNB님께] 선악이 뭐길래...



limelite님의 견해와 거의 비슷한 얘기겠지만 저는 '선'과 '악'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익함'과 '불리함'이

있을 따름이죠. 인간은 스스로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을 유익한 것으로 파악하고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을 불리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유익함을 추구합니다. 언젠가

다른 보드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저는 그런 이유로 진정한 이타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버스에서 할머니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앉아서 버티기보다 행복한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한없이 희생할 수 있는 것은 일신의 안락함보다 자녀의 행복이 더 큰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스스로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선택할 따름입니다. (예수조차도 그랬습니다.)


더우기, 한 가지 대상을 놓고서 이것이 선이냐 악이냐를 판단할 수 있는

일관된 원리는 없습니다. 관점에 따라 선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니까요. 라합은 거짓말을 했으니 악한 일을 한 것일까요?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라합을 악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틀림없이 라합을 악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극히 단순한 예에

불과합니다. 사르트르의 글에 등장하는 어느 청년의 경우는 조금 더

미묘합니다. 그 청년은 늙고 가난한 어머니를 부양하는 문제와 이념의

승리를 위해 혁명에 참가하는 문제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스스로의

이념에 사로잡혀 노모를 팽개치는 것은 악인가요? 육친의 정에 이끌려

대의를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악일까요? 사르트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답 따위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성경을 뒤적이든 신부님께

물어보든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절대선이니 절대악이니 하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에서 나온 개념들일 뿐, 실제로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공간은 그런 유치한 잣대로는 감히 잴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의 종교적 풍토는 '개념의 인격화'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복수'

라는 개념만으로는 그 냉혹함과 집요함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복수의 여신'을 상상하게 됩니다. 풍요, 전쟁, 질투, 사랑, 죽음...

유상무상의 모든 개념이 그것을 구체화하고 육화시킨 신을 갖습니다.

그것이 중동 특유의 다신교적 유행입니다. 기독교는 유일신교이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다신교입니다. 성경은 '야훼 이외의 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다만

'야훼같은 끝내주는 신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잡신들'로 취급할

뿐입니다.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토양이 다신교적 전통에 물들어

있는데 기독교가 어찌 유일신교일 수 있겠습니까? 몰렉, 바알, 그모스,

다곤... 이런 신들은 야훼의 위세 앞에 차례로 쓰러져 간 것으로 되어

있을 뿐 그 존재 자체가 부정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잡신들이 극복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냉전이 끝나자 람보에 대항할 악역을 잃은 헐리우드가 벨로시랩터니

외계인이니 잡다한 악역을 만들어냈듯이 '악'의 표상으로서의 인격화된

악역을 하나 만들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닥친 것입니다. 급기야 '욥기'의

창작자가 사탄을 빚어냅니다.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욥기의 창작자란

욥 설화를 만든 사람이란 의미일 뿐 그것을 문서화한 편집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욥 이전에는 사탄이란 개념조차 없었습니다. 구약을

펼쳐놓고 욥 이전의 문서를 뒤져보십시오. 사탄이 등장합니까?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권한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한 놈'일 뿐입니다. (창세기 3:1) 뱀 자체는 사탄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저자는 사탄을 굳이 '옛 뱀'이라고 부르면서 그 뱀을 사탄과

동일시하거나 최소한 사탄이 뱀을 이용한 복화술이라도 했다는 인상을

남기려 애쓰지만 정작 창세기 저자에게 그런 구차스러운 개념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선악이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관이든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세계관이든 대등한 거 아니냐.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겠지요. 저 역시 선/악이 존재한다고 믿는 세계관이든

그렇지 않은 세계관이든 '그 자체로서는'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둘다

나름대로 쓸만한 신념 체계입니다. 다만 저는 '선/악은 존재한다'라고

믿는 세계관의 'Symond적 위험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Symond : 하나님이 비록 인류를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을 방훼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가혹한 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범죄자들을 소탕하기 위해서 경찰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일말의 동정도 관용도 있어서는 안됩니다. 사악한 권세에

영혼을 팔아버린 자들이기 때문이죠. 물론 나쁜 놈은 사탄이지 사탄에

의해 귀신들린 놈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Symond님과의 talk에서 인용하였습니다.)


afraxas : 전 지금 그 분을 컨트롤 하고 있는 건 그 분이 아니라 그분

안의 악마라고 생각합니다.. 전 모든 인간을 사랑할 수 있지만 악마는

절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 댓글도 울버린이라는 인간 안에 있는

악마에게 쓴 글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전 울버린이라는 인간

자체는 사랑합니다.. 또한 동정도 가며.. 그가 빨리 그런 시험에서

벗어나서 사탄이 그를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afraxas님께서 저에게 보내신 편지의 일부입니다.)


RNB : 죄를 선택한 인간에게는 연민의 정을 느끼되 죄 자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봐주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죄는 본시부터 사망의

권세입니다. 동정하지 마세요... 사탄은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타도의

대상이고 극복해야할 것들입니다... 상황과 여건을 참작하고 그를 동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치고 살인을 한 행위를 동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고 벌을 받아야 할 행위입니다. 나쁜 것은

나쁜 것입니다.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살인은 타도의 대상이고

추호도 합리화하거나 수용의 여지를 줄 필요가 없는 대상입니다.

(지난 2월 4일에 올라온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닮아 있지요? 개신교인이신 RNB님과 천주교인이신 afraxas님, 그리고

정체불명(?)이긴 하지만 아마도 개신교인일 듯한 Symond님의 사고방식이

이처럼 닮아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공통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기독교적 세계관에 의해 고무된 태도'로

볼 수는 있겠지요. 일전에 RNB님께 드린 답글에서 Symond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이때문입니다. RNB님께서는 Symond님과 나란히 언급된

것을 불쾌하게 여기셨겠지만요.


순간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다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자신만의 사정과 사연이 있습니다. 사르트르의 고민하는 청년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논리와 이치로써 이해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 뿐입니다.

악한 행위는 사망의 권세에 속하는 것이므로 결코 용서해 줄 도리가

없고 다만 그 사람에게 연민과 동정과 사랑을 느낄 뿐이다... 라는

태도는 아집에 불과합니다. '내가 선이라고 믿는 것'에 그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한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무서운 아집일 뿐입니다.

이런 아집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한 아무리 '그 사람 속에 숨어 있는

사탄이 문제일 뿐 나는 그 사람 자체는 사랑한다'라고 강변해도

소용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의 인격을 걸고 하는 선택을 '결코

타협의 여지가 없는 타도의 대상'으로 보면서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 방식대로의 사랑'일 뿐이며 저는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선이며 저것은 악이다. 악은 결코 동정의 대상도

용서의 대상도 될 수 없다."라는, 시퍼렇게 날이 선 기독교적 공의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사랑은 기독교적인

'조건부 사랑'과는 다릅니다.


RNB님께 다시 묻습니다. 어째서 사탄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요?

어째서 사탄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사랑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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