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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staire ( 강 민 형)
날 짜 (Date): 1996년04월25일(목) 04시15분23초 KST
제 목(Title): 과학은 진실을 캐는 도구가 아닙니다



이 글은 온누리에님의 '사실과 진실' 이야기에 대한 답글입니다.


우선 저는 '진실'이라는 단어가 왜곡되어 사용되는 것에 대해 우려를 느낍니다.

진실(verity)은 말뜻만으로는 사실과 같기 때문입니다. 온누리에님께서 언급하신

'진실'은 기실 사실이나 진실보다 더 심오한 용어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머니가 어린이를 때린다 - 이 '사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진실(이하 당신의

정의에 따라 진실이란 용어를 쓰겠습니다)'이란 '사랑의 매'일수도 있고 '못된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좀더 미묘한 사연이 숨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과학의 소임은 사실의 탐구에서 끝납니다. 그 이상의 심오한 내용은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아니합니다. 과학이란 '사실'의 탐구를 통해 한 단계 더 깊은 '사실'을

캐어내는 것입니다. '사실'의 탐구 과정에서 드러나는 모순점들을 '진실'이라는

표현으로 어물쩡 덮는 것은 과학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생물이 등장한 순서가

식물 - 동물 - 사람이라는 창세기 1장의 내용이 과학적이라고 떠들면서 창세기

2장의 사람 - 식물 - 동물이라는 순서에 대해서는 그 '사실'을 묵살하고 '진실을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신실하고 훌륭한 신앙일망정 과학은 아닙니다.


더우기 제가 '진실'이란 용어에 우려를 보이는 이유는 그 진실이 독점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때린다는 사실로부터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한다'

라는 진실을 당신이 도출하고 '어머니는 아들을 미워한다'라는 진실을 제가

캐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진실이 진실로 진실이라면 저의

진실은 허구입니다. 하지만 어느 편이 진실이고 어느 편이 허구인지 합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지요? 당신은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진실을

(적어도 일부나마) 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사실을 좀더 충실하게

지켜봅시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진실로 깊은 진실이라면 얕은 사실과도 훌륭하게

부합될 것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또는 스스로 보인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제게는 아직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스스로 납득할 때까지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사실'을 바라볼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 진실에

맞지 않는 사소한 '사실'을 묵살하지만 저는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하므로 아무리

사소한 사실이라도 묵살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그러한 저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진실을 묵살한다' 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진실. 아직 제게는 진실이

아닙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한 진실은 적어도 제게는 진실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방법, 즉 과학적인 방법이 당신께는 미련하고 답답해보이겠지만

저는 점진적인 발전에 만족합니다. 저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는

사람이 아니며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을 진실이라고 믿고 기뻐할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진실을 안다. 그러니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너는 허구를

쫓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


* 시지프스는 한없이 돌을 굴리면서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


                    ----------- Prometheus, the daring and endur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