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맹신
우리 민족의 주식은 쌀이다.
우리 역시 쌀농사 민족의 후예로, 온갖 민족의 음식을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포식시대인 지금 역시도 우리의 주식이 쌀이며, 우리 입맛에 우리의 쌀이 맛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밥은, 조리 단계에서 버터나 생크림 최소한 베이킹 파우더를 넣어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맛이 나게 만드는 빵과는 달리 순수하게 쌀과 물만을 넣어 지어, 그 자체의 맛은 아주 포근하고 밋밋하다.
그래서 맛의 특성이 적은 쌀 맛은 김치나 된장같은 자극적인 발효음식만이 아니라 회나 나물, 무침 등 맛이 비교적 가벼운 반찬에도 잘 어울리며 전혀 이질적인 서양식의 토마토나 버터 소스에도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은 단립종의 쌀로, 전 세계에서 단립종의 쌀을 먹는 것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유일하고, 전 세계 인구 1/3이 먹는다는 쌀은 사실상 장립종의 쌀이다.
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홍콩이나 대만의 최고 요리집에도 항상 사용되는 쌀은 장립종의 쌀이고 그 역시 맛과 향이 넉넉해 많은 반찬과 어울리지만 그래도 우리 입맛에는 우리 쌀이 최고가 아닐까.
하지만 최근 불거지게 된 쌀 수입문제에서 바로 쌀 문제가 거론되면서 “음식 국수주의”의 면모가 쌀에서도 보여지게 된다.
갓 지은 쌀밥만 있으면 온갖 반찬이 필요 없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상에 앉아 갓 지은 쌀밥 냄새를 맡는 광경은 이제 드물게 보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글쎄?
정말 쌀의 향기가 식욕을 돋우는 향긋한 냄새일까?
밥이 맛이 있고, 많은 반찬과 어울린다는 점은 수긍하는 바이지만 과연 갓 지은 밥의 냄새도 좋은 냄새일까?
물론 대답은 “아니요”이다.
쌀로 갓 지은 밥의 냄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황 화합물의 냄새이다.
식으면 상대적으로 무거운 이 황 화합물은 공기 중으로 날아가지 않아 냄새가 나지 않지만 뜨거울 때는 무지막지한 냄새를 피워 올리는 것이 바로 갓 지은 밥이다.
황 화합물의 독특한 냄새에 대해 우리는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달걀 썩는 냄새”라고 배운 바 있다.
밥 냄새는 그 농도가 낮고 다른 화합물의 냄새도 섞여 있으므로 그 정도까지는 아니긴 하지만 밥상과 상관없는 곳에서 경험한다면 충분히 불쾌한 냄새로 여겨질 수 있는 냄새이다.
냄새에 대한 취향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민족적 차이가 심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말린 건포물의 냄새와 치즈의 냄새이다.
건포물을 굽는 냄새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생선을 먹은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는 좋은 냄새이지만, 대개의 서구인들은 역겹게 느끼는 냄새이며 치즈 특히 표면의 처리를 습한 상태로 계속 유지하여 만들게 되는 블루치즈의 경우 대개의 아시아인들은 그 냄새를 제대로 맡지도 못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도 “썩은 계란냄새”로 표현되는 황 화합물의 냄새가 섞인 밥의 향기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좋은 냄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밥 향기가 나면 곧 밥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조건 반사적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에 그 냄새를 긍정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사고”하게 된다.
갓 지은 밥의 냄새는 악취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에게 “배고픔을 달래주는 냄새”이다.
(*갓 지은 밥의 악취는 황 화합물의 활성에서 오는 냄새이므로 식으면 냄새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진짜 밥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소개합니다. 우선 밥을 지은 뒤 뜸이 든 직후 밥을 섞어서 밥알 사이에 있는 수증기를 밖으로 빼낸 뒤 여분의 습기를 흡수할 수 있는 나무 내지는 천연 재료로 된 통에 옮겨 담습니다. 그리고 뚜껑을 살짝만 열어두어 자연적으로 식힌 뒤 그 냄새를 맡아보십시오. 그 냄새가 진짜 밥의 향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의 냄새는 악취라는데 반대하시는 분은 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와 국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를 같이 맡아보시기 바랍니다. 국에 있는 화학 물질의 성분이 압도적으로 많고 농도도 진하지만 밥의 수증기를 맡을 때 사레가 쉽게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 맹신
이런 선입견-우리 민족이 쌀농사 민족으로 쌀을 주식으로 하는 것으로 쌀 냄새는 선호 판단 단계 이전에 주입된 것-은 종종 종교에 오면 첨예화된다.
종교적 교리는 논리적 윤리적 정당성과 맥락 이전에 주입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교리에 대한 종교인의 판단은 항상 “논리”와 “윤리”적 맥락을 뛰어넘을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종교에 있어, 그 윤리성과 논리성을 배제하고 교리만이 최상위의 사고를 선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종교의 배타성으로 직결된다.
쌀 냄새가 인간에게 있어 항상 좋은 향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기네 종교의 교리가 논리와 윤리 위에 있다는 종교인들은 참혹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 주변에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믿음은 없어져 간다.
아주 사소한 것도 각종의 연구와 그 실적으로 인해 인간의 믿음에 해당하는 영역이 지식의 영역으로 넓혀져 온 것이 바로 근래의 과학이라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유추하는 것은 원래 우주의 제1원리를 찾는 “형이상학”이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기본이 4대원소라는 말도 나오고 이 세상의 기반은 수라고 하는 피타고라스 학파도 창설되었으며, 지금에 와서는 정설인 원자론도 원래는 형이상의 학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의 기본 요소는 파동론과 입자론 두개로 압축되어 있으며 물리학계의 정설은 “파동적 입자” 내지는 “입자의 유동(파동에 의한)”으로 굳어져 가고 있는, 형이상이 아니라 실증적 학문 체계가 되어가고 있다.
또한 이 세상의 형상 역시 원래는 형이상에 기초한 학문이었으나 인공위성에서 지구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지금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우리가 사는 땅의 모양을 “철학적으로 고찰”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이 수라고 주장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주장 및 삼각형의 성질에 대한 놀라운 발견은 지금도 도형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발견이지만 수학이란 더 이상 형이상학이 아니다.
글쎄, 좀 성급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영혼의 실체가 밝혀지고 신체적 이상과 신체 기능의 정지에 대한 완벽한 메커니즘을 재구현할 수 있는 미래는 아주 많은 형이상학적 주장이 과학적 난제에 불과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종교가 위험한 것은 바로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믿음이 이 세상에 끼친 해악을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근거 없는 믿음이 위험한 이유는, 그의 믿음 체계 그 자체가 바로 그 믿음 자체를 위한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것은 항상 대상과 존재 이유를 그 근거로 하는데, 이 대상도 존재 이유도 “인간은 알 수 없다.”거나 “그러한 신성한 것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며 회피하는 그 심리의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그러한 언급으로 인해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믿음 그 자체의 존재 여부가 무너질 위험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말로 하면 누구나 수긍할 만 하고, 또한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도 교회에서 할렐루야를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믿음에 적용을 시키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일까나.
애석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