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아이 콤플렉스
아이가 말을 잘 들으면 부모님들은 그 아이에게 “착하다”며 칭찬을 해 주고, 좋은 아이라며 칭찬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는 자동적으로 나쁜 아이가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아이에게 대답을 하도록 교육을 시킨다.
밥을 먹지 않으면 왜 먹지 않느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왜 하지 않느냐, 오늘 기분이 나쁘면 왜 나쁘냐 등등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대답을 잘 하는 아이는 역시 착한 아이이고, 대답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는 나쁜 아이가 된다.
말을 잘 듣는 아이는 물론 부모님들의 입장에서 키우기 편한 아이인 것만은 틀림없다.
게다가 효란 개념이 아주 중시되는 우리의 풍토 내에서, 권위에의 복종은 미덕으로 여겨져 왔음은 물론이다.
그럼으로써,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착한 아이”이고, “착한” 것은 “선”과 개념적으로 동위적 개념이라, “말을 잘 듣는 것”이, 즉 복종이 “선한 것”이라는 관념이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다.
사실을 알아보면 어떠할까?
말을 잘 듣는 아이는 과연 착한 아이인가?
사실상, 모든 아이가 “미운 아이(대개 아동 발육상 5~6세 전후가 되므로 미운 다섯 살이라고 한다)” 시기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아동의 정신 발육이 가속화되는 시기이다.
일부 교육학자들의 주장으로는, 이 때 대개 “나”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부모를 자기와 다른 “남”으로 인지하게 되는 첫 시기로서, 자기 개념이 미약하여 남의 뜻에 거부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시기의 아동 시기가 종료되는 시점으로 본다.
즉, 말 안 듣는 미운 아이는 “나빠서” 말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주체적 개념이 강함으로써 “남과 나”를 구분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발달이 강하고 빠른 아이라는 것이다.
오늘도 당신이 머리 쓰다듬어주는 그 착한 아이-그는 멍청한 건가, 발육이 부족한 것인가.
오늘도 당신이 야단치는 그 나쁜 이아-그는 나쁜 것인가, 영리한 것인가.
권위에의 복종
나는 수술이 길어지면 수술 도중 짜장면을 시켜먹는다는 의사들을 보고, 의사들에 대한 신비로운 느낌을 벗은 지 오래다.
수북이 쌓인 담배꽁초와 술병, 시켜 먹은 지 한달은 되어 보이는 썩은 프라이드 치킨의 뼈가 온통 굴러다니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보고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우아함에 대한 기대는 이미 접은 지 오래다.
아주 단순한 공학적 계산도 이해하기 버거워하는 변호사들을 보고 법 전공자들의 수리, 공간적 이해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이 현실인 것을 말이다.
위에서 보듯이, 권위는 그 위상차를 벌이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그 가장 중요한 수단은 “정보의 차단”임은, 우리가 역사를 들먹거릴 이유도 없이 위의 경우처럼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보게 마련이다.
그럼으로써, 권위가 가지는 그 핵심적인 주체는 사라지고, 객체와 가치지향만이 남는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는 분은, 권위에 바치는 복종을 일종의 ,loyalty라고 치환하여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충성이란 어떤 특정한 두 인격 간에 쌍무적으로 맺어지는 일종의 계약입니다. 여기서 권위주의는 그 본질을 숨기거나 왜곡함으로써 맺어지는 일방적인 계약이라고 치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위와 같은 사실 때문에 법에서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회사 등의 사물이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법인...법적 인격입니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권위의 팬티가 벗겨지고 있는 현실이 이러한 현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즉, 권위주의란 단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떠한 고상하고 아름다운 직업도, 고귀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사실 알고 보면 평범한 일이요, 평범한 사람들이다.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는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그 자녀와 그 가족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을 보기는 참 힘들다.
가끔 보이는 매스컴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가족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이랄까.
정말 그 사물의 속성을 잘 알면?
그것은 그다지 아름답지도 신비롭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근사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무지에 근거한 권위-기독교
위에서 서술한 특성을 기성 종교에 대입한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지금 이 나라에만도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한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그 착한 사람들만이 사는 세상에 대한 스트레스와 강박관념을 이기다 못해 스스로 다른 신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사고를 이분화시킨 사람이 수백만이 넘는다.
“인간 말살 흉기”인 기독교를 포함, 양성 평등 운동에서부터 환경보호, 반 포경운동에 이르기까지, 인간 “집단”이 소유한 신념은 좋은 쪽으로 흐르는 경우가 없었다.
양성 평등 운동은 여성 참정권 인정 이후 제대로 된 성과는 이루어내지 못하면서 가정의 파괴를 부추기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가정이 파괴되어 파괴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길거리를 헤메게 만들고 있고...
환경보호운동은 하나뿐인 지구를 지켜내기 위한 생존권 내지는 환경권 투쟁으로 발전하여온 것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환경 단체는 지금 전 세계의 법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집단임을 부정할 수가 없고...
반포경 운동은 고래를 먹는 일본인, 나아가서는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반의 저질 문화를 비웃는 인종편견의 수단이자 환경 단체에서 돈 잘 걷는 수단에 불과하다.
하물며, 선과 악을 관념적으로 재단하여 사람들간의 증오와 편견을 부추기는 종교적 신념은 이제 철폐되어야 한다.
더욱이 관념적 악을 겨냥한 관념적 선의 종교, 관념적 악을 말살하기 위한 관념적 선의 종교 기독교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착한 아이와 전혀 상관없고, 착한 것과 우리가 말하는 관념적 선은 전혀 관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