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9]부도덕의 미화

김장한 0 1,639 2005.04.21 14:05

신념의 공격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행위는 바로 “몰이해와 편견”이다.


이에 모든 공격적, 배타적 정치 시도는 정보 차단으로부터 비롯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의 경우 자신들의 식민지 점령 정책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함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즉, 국력이 좀 강성할 뿐 실제로 문화가 뛰어나지는 못했던 서구 열강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의 주민들을 모두 야만인이나 식인종으로 몰아 “무식하고 저질인 너희를 개과천선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로 점령을 밀어부친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인, 특히 소수민족에 대한 이런 몰이해와 편견은 단지 일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장난처럼 보이는 다큐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90년대 말에도 문제시된 바와 같이 쇼킹 아시아와 같은 아주 일부 지역의 특이한 풍습, 신기한 광경, 생활고에 찌든 미개발 지역의 국소적인 문제를 마치 아시아 전역의 미개함을 표상하는 듯한 그 논조에 많은 사람들이 어이 없어 했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식민 개발 논리인 것을 말이다.


아주 웃기는 말이지만, 노예제도가 악마적인 발상이라는 사고방식이 생긴지도 사실상 얼마 되지 않는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을 전후하여 많은 사상가들이나 많은 지식인들까지 노예 제도를 찬성하며, 노예제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었다.


많은 이들이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를 보편적인 인간애에서 찾지만 노예제가 폐지된 이유는 노예가 별로 필요 없는 북부군이 승리하였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치에 우선하고, 정치는 이성보다 이권을 우선한다.


많은 권력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함축적으로 사회의 특정 부분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을 유도하지만 또한 그것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가치라고 하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반대 개념의 응원가


예를 들어 축구 한일전이 벌어지면 경기 당일을 포함하여 전 삼일, 후 삼일 일주일이 온 나라가 축구 열기로 뒤덮힌다.


이런 때 당당하게 “나는 축구가 싫어. 그러니 누가 이기든 나와는 상관없어.”라는 말은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공중파 매체가 축구와 관련 있는 메시지로 가득 차고, 각종 포털 사이트에는 축구 응원과 전략을 비교 분석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한다.


혹시라도 좋아하는 일본 선수가 있어, 그 선수를 응원하는 글이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그 글은 매국노의 글로 매도되기 일쑤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라.


스포츠의 정신이 무엇인가?


정정당당한 대결.


혼신의 힘을 다한 후회 없는 승부.


운동하는 인간의, 속일 수 없는 진솔한 땀으로 맺어지는 우정.


이런 것들이 아닌가?


스포츠의 정신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축구 시합 따위” 누가 이기든 상관할 바 없는 것 아닌가?


한 플레이어가 온갖 어려움을 딛고 혼신의 힘을 다해 슛을 성공시키면, 우리는 그 땀과 그 혼에 박수를 보내주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축구 시합에서 이기고 지는 것 따위 국익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포츠 외교니 선수 수출이니 말들은 많지만 실제로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간접적 국가 홍부 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될까?


실제로 미국에 진출한 유명 야구선수의 경우, 그가 창출해내는 이미지가 클까, 아니면 우리나라가 광고료나 메이저 리그 케이블 텔레비전의 수신료로 지불하는 돈이 더 클까?


성공하는 선수의 그 개인적인 불굴의 정신과 끊임없는 자기개발 노력에는 물론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더 좋은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로 뭉쳐 상생하는 노력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끊임없이 스포츠를 애국심을 재는 하나의 잣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는 것은 물론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저에 일본을 증오하는 마음을, 더 큰 성공에로의 열망으로 이으려는 정치적 의도는 어떤 경우에라도 재평가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종교적 우상


종교 집단이 이러한 요소를 가장 강렬하게 열망하는 것은 슬프기 보다는 차라리 희극적인  현실이다.


대다수 신도들은 진리를 구도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지 않으며, 구도보다는 천국에의 열망이, 천국에의 열망보다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교회로 내모는 요소가 된다.


기독교를 말할 때 관념적 악을 겨냥한 관념적 선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종교적 논지의 선과 악이 순수하게 대립적인 양극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


중립적이고 약간은 관념적인 윤리의 이 바이블이 사탄의 악행보다 신의 만행을 서술하고 있는 글이라는 점을 볼 때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진다.


파괴와 폭력은,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며 이 인간의 본성에 비추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순수하게 “전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은 자신이 작구하고 나아가는 지표를 스스로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실질적으로 종교적 이념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종교적 원리의 수용보다는 종교적 부정 개념에 대한 “적대적 개념의 성립”을 우선한다.


즉, 기독교를 믿고 구원을 얻어 “사랑을 실천하는, 예수라는 전인격적 존재와 마주하는 인간”이 되기보다 그의 종교적 이념에 반하는 인물들을 증오함으로써, “반기독교적인 존재를 증오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흔히들 아주 선하고 양심적인 사람을 본다면 “저 사람은 빼면 부처”라는 말을 한다.


이런 말이 생긴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유의 말은 “배설물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한다.


부처의 공덕을 드높이고 선한 자를 칭송하는 아주 흔한 표현에도 종교적 정개념보다 반개념이 더 자주 이용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교적 악은 “태생적”인 악이 아니었다는데서 “태생적”인 선의 표상인 예수와 구별되며 그들의 신앙은 태생적이고 원초적인 선을 바라보는 것에서보다 파생적인 악을 미워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또 다른 이야기


혹시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연령이 많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고 계시는 사건이다.


70년대의 일이다.


일본에서 춘향전이 출판되었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 교포가 신이 나서 그 책을 사와서 읽던 중, 경악을 하고는 모 중앙 일간지에 투고를 했더란다.


그 내용인즉, 우리나라의, 현모양처의 귀감이랄 수 있는 정숙하고 순결한 여인상 가운데 하나인 춘향을 거의 기생 수준이 아니라 소위 “몸 파는 여자”수준으로 묘사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자 도서관 등에서 볼 수 있는 그 때 기사를 읽어보면 나름대로 이 일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일감정과 겹쳐 국민적 울분을 자아냈던 일인데, 그 끝은 역시나 용두사미였다.


가장 문제시되었던 그 장면은, 이도령이


“춘향아, 우리 업음질이나 하여 보자.”


“에그 망측해라, 업음질이란 무엇이요?”


“우리 둘이 서로 옷을 벗은 다음 서로 업고도 놀고 보듬고도 놀고 그러면 업음질이지.”


라고 말하며 서로 옷을 벗고 사랑의 행위를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춘향전이야 말로 가장 내용이 충실하고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진본열녀춘향가”를 그대로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었으니, 이를 어쩌랴.


문제는 그 일본 교포는 물론이거니와 그 당시 신문 기자를 포함 우리나라에서 나름대로 지식인 행세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문화 가운데 하나인 춘향가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참으로 나라망신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건이었는데...


그럼 이 사건을 머리에 담아두시고 당신이 자녀에게 읽어주는 “아름다운” 동화를, 다시 읽어보시기 바란다.


백설 공주라는 끔찍한 동화는 남녀 차별적 시선과 근거 없는 벼락출세 주의에, 왕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 용기와 외모도 갖추게 된다는 출신주의를 지향하는 전근대적 사고를 배경에 깔고 있다는 점은 좀 뒤로 돌리고, 시신에 입을 맞추는 “시간”을 주요한 사건으로 다루는 “사애심리”를 주요 모티브로 전개한 “성인용” 소설이다.


푸른 수염에서 나오는, 열어서는 안 되는 문이란 문맥상 “정조대 문”이며 그것을 결혼한 부인이 마음대로 열고 다닌다는 말은 이 글이 평범한 성인용 소설의 범주도 넘어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동화들도 대동소이하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이 수백년을 읽혀왔음으로 “검증된” 동화라며 아직도 이런 동화를 자녀에게 읽어주는 부모님들이 좀 유감스럽다.


아마 많은 분들이 푸른 수염이나 백설 공주 등의 소설을 이미 어릴 때 경험하셨을 것이고, 이 책을 성인용으로 삭제되지 않은 원본을 읽으신 적은 거의 없으실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들 안에 이런 끔찍한 비유가 있음을 알지 못하셨을 것이고.


식자들이 우리 어린 아이들에게 읽히는 동화의 질을 의심하는 것은 모두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간(사애심)이나 프리섹스의 개념이, 상징적으로나마 어린 아이에게 교육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들에게 백설 공주나 푸른 수염 등의 고전 동화를 읽어주는 부모님들이 많이 줄었고, 또한 이런 글을 읽히는 것을 반대하는 아동학자들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개인의 신념과 결부되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동화는 “어떠어떠한 동화는 좋은 동화이므로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종교적 문제는 그 텍스트에 나오는 말의 인과 관계나 텍스쳐 상의 의미에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의 신념체계가 우선 문제가 된다.


위에서 서술한 두 가지 사례는 바이블이 옳은 것이라는 기독교인의 신념에 대해 재미있는 생각의 단서를 던져준다.


처음의 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춘향은 열녀이자 순결한 처녀”라는 착각과 선입견은 단순히 우리가 동화책으로만 접해 본 춘향가의 내용을 몰라서 일어난 해프닝에 불과하며 이러한 해프닝은 우리가 춘향가를 읽음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 다음 동화책의 예는 정독을 하지 않고 그저 표면적으로만 책을 읽어서 생기는 폐해에 불과하며, 이 역시 동화책으로 각색하지 않은 원본 소설을 자세히 읽고 문학 비평가들의 분석 내용을 봄으로써 납득이 가능한 문제이다.


바이블에 대한 기독교도의 신념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우선 신념이란 아무리 좋은 말을 덧붙여도 결국은 “어떠어떠한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믿음”에 불과하고 여러 번 전술했듯이 “근거와 합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직관적 추론과 자기 개인의 기대를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상기하자.(지식은 정당한 근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지식체계에 변화를 주는 근거의 변화가 생기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바이블이 옳은 것이라는 기독교도의 믿음은, 애당초 합당한 근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개인의 직관과 기대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식의 수용”과 “근거의 제시”와 “합리적 연역”만으로 기독교인들의 신념이 바뀌지 않는다는데 그 문제의 본질이 있다.


지난 200년간 전 지구를 뜨겁게 달군 이데올로기 논쟁은 그 신념의 근거가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적인 학문적인 영역의 성과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이데올로기 논쟁의 신념들을 때로 수정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했으며 또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대가 지남으로 인해 그런 신념들이 취사선택되어지는 과정들을 보면, 그 동시대의 학문적 성과들과 그러한 신념들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도의 신념은 어떠한 지식적 배경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인해 합리적인 개종이나 신앙의 포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단언한다.

인간이 신념을 가지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합리적인 근거가 없는 신앙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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