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8] 한국의 집단주의 광신-기독교

김장한 0 2,253 2005.01.13 15:08
 

집단주의


내부고발-한 개인의 처절한 도덕심으로 인한 기업 내부의 비리가 공개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이 논리에 거의 대개의 사람들이 공감한다.


왜냐하면, 현대는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사회이기 때문에 특정 전문 분야에 대해 그 분야 외분의 사람이 전문가에게 항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문가란 어떤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그 분야 지식에 관한 경험이 있으므로, 적용할 수 있는 판단의 폭이 넓다.


그래서 기업이나 단체의 비리는 내부인에 의해 공개되는 것이 좋은 선택이며, 기업이나 공직 세계의 문제가 그들 자신에 의해 나아진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사회적 이득은 외부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개인의 도덕성은 신뢰할 수 있지만 집단의 도덕심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현대의 상식이다.


아버지의 임무는 돈을 벌어, 그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최고의 가치는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지, 숭고한 사명에 자신을 던지는 일이 아니게 된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성향의 개인들이 모이든 집단이 되면 이미 그 집단은 집단으로서의 논리를 가지게 되며, 그것이 집단-즉 다수이기 때문에 개인의 논리에 집단의 논리는 항상 위에 서게 된다.


우리가 보는 내부 고발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것이다.


즉,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그들 집단에서는 “배신자”이며 “밀고자”인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우리 사회에서 영웅이면 무엇을 할텐가.


자신이 평생을 같이 한 사람들은 자신을 비난하는데 말이다.


공학 윤리


우리 주변에서 우리 모르게 영향력을 과시하는 집단이 있다.


바로 공학자들이다.


과학적 성과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800만년 전의 영장류 화석이 발견되면 어쩔 것이고, 그 분포가 어떠하면 또한 어떠한가.


하지만 공학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물품 속에 있다.


단 하루도 우리는 공학적 성과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물에서 그 안의 가정 잡화까지, 가전 도구에서 장식장까지, 심지어는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물과 음식도 “공학적” 프로세스에 의해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학적 실패 역시 우리 주변에 있다.


멀게는 아폴로 호의 발진 실패에서 가까이는 우리나라의 성수 대교나 삼풍 백화점 사건에서 우리는 공학적 실패는 “인재”의 탑임을 보게 된다.


최악의 참사로 알려진 이번 동남아 해일 피해 역시, 전문가와 과학자 그룹의 경고와 연구를 무시해서 피해를 증폭시킨 점에서는 역시 인재의 범주에 있다.


이런 문제가 이전부터 있어온 서구는 엔지니어들도 나름대로 윤리 강령을 만들어 실천해 오고 있다.


학회나 회사에 따라 조금씩은 다르지만 대개


1. 전문적 지식을 함양하고 발전시킬 것

2. 후진을 양성할 것

3. 충성을 다할 것(여기서 충성이란 loyalty로, 계약 관계에 의한 충실한 이행을 말함)

4.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정직할 것


등이 공통점으로 발견된다.


이 윤리 역시 집단 윤리이다.


공학자는 기업에 고용된 고용인으로, 월급을 받고 일을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러므로 공학자는 4번에 해당되는 책무를 다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기고, 그럼으로 인해 생기는 갈등을 공학자 “집단”으로 해결할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집단을 믿을 수 없는 사회-도덕적인 개인과 비도덕적 집단이 끝없이 마찰을 빗는 아비규환이 21세기이다.


종교의 기원


믿을 수 없게도, 모든 종교는 “공포”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번개나 화산과 같은 자연 현상을 보고 생긴 자연 신앙과 현대의 종교는 그다지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인이 가지는 공포가 대자연의 경이로운 힘에서 생긴 공포라고 한다면, 현대인이 가지는 공포는 인지 세계를 넘어선 세계에 관한 공포이다.


그 공포는 무지에서 오는 공포-사후 세계는 무엇이 있는가? -에 관한 것으로 대개 국한된다.


죽음이라는 영역은 아직 인간의 인지 세계 밖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간의 과학이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거나, 클론 복제를 통하여 영원히 살아갈 길을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일이지 저 세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공포에서 자라난 종교는 “고통”을 먹고 무섭도록 성장한다.


이 세상의 3대 종교는 그 종교의 기원에서, 대개 그 신자들이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아직도 종교가 진리를 찾는 행위라고 생각하시는가?


종교가 진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증거가 바로 종교의 시작이 최하 계급이었다는데 있다.


종교가 진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사유 열망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왜 그 종교들은 “최하 계급”이 주도하는 것일까?


지금도 조금은 그렇지만, 특히 정보가 일반인에게 감추어져 있고, 문맹률이 높은 과거에 있어서, 먹고 살기도 힘에 겨운 계층이 무슨 능력으로 진리를 사유하고 무슨 시간에 경전을 논할까?


과거사를 돌아보면 백성은 무지하고 권력자는 그것을 악용해 왔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해당되는 교단의 정식 교리를 잘 알지도 못하며,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누구누구가 우리의 신이라더라.”는 피상적인 정보일 뿐이다.


항상 “수준이 있는” 것은 대중적이지 않다.


뒤집어 말하자면 “대중적인 것”은 항상 수준이 “낮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배정 방식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다채널 시대가 개막된 지금은, 취미나 공유하는 정보에 따라 아주 고급스러운 정보도 전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낚시 프로나 바둑 채널을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이다.) 그 이전의 프로그램 편성은 항상 “하향 평준화”가 상식이었다.


유전이나 유존종 등에 관한 다큐는 항상 비인기 시간대에 방영되고, 인기 시간대엔 어김없이 쇼나 영화가 방영되는 것은 상식이다.


수준이 있는 사람은 수준이 낮은 것도 볼 수 있지만 수준이 낮은 사람은 높은 수준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정식 종교가 된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원래 그 종교의 발생은 항상 그 당대의 최하계급에서 발생한 것이다.


즉, 에 세상에서의 미련이 없는 계층의, 삶에서의 고통을 먹고 자라는 것이 종교이다.


이 점은 지금도 끊임없이 관찰된다.


가장 왕성한 포교력을 보이는 기독교의 경우 군대, 병원, 학교가 중점적인 포교 대상이 되며, 성과도 가장 높다.


평범한 직장인이나 주부에 비해 군인과 학생, 환자들은 그 고통의 정도가 높으며 폐쇄적인 집단을 구성하여 이끌어가는 집단이므로 그 집단의 부조리나 문제점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으며, 내부 논리는 강하지만 외부 논리에 대해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공통점이 있는 집단에서만 포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공포에서 자라고, 인간의 고통을 먹고 자란 집단-이것이 무섭지 않다고 한다면 과연 세상엔 무엇이 무서울까?


이 세상의 전쟁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종교라는 말이 그럼으로써 이해가 된다.


우리가 학교에서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이 종교라느니, “가장 높은 도덕률”이라는 칸트 식의 헛소리를 주입받은 것 역시 지금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피와 학살로 점철된 종교가, 텔레비전의 영상에서나 보는 성스런 “쇼” 몇 번 한다고 종교는 성스러운 것이 되는가.


무지와 공포에서 생겨나 고통을 먹고 자라는 종교-과연 인간의 문명은 언제쯤 종교를 신화 안으로 집어넣을 것인가?



집단의 논리


어떤 아파트 단지의 공사에, 사측과 주변 주민의 협상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사측은 당시 민원 제기를 1)합리적인 공사 방법, 2)무진동 공법의 도입, 3)소음 정도를 측정하여 그에 따른 보상금 지급 등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민원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주민 측의 어떤 사람이 이 논리에 동의하자 주민 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비난을 하여 결국 그 사람이 이사를 가게 되는 것을 보았다.


아주 흔한 경우 가운데 하나지만, 이 사건 역시도 “집단”의 논리에 개인이 진 사례이다.


즉, 주민 측으로서 사측에 가능한 한 많은 돈을 “긁어” 내는 것이 주민 측의 요구였고, 그 사람은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그 사람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지만 애당초 주민 측이 요구하는 것은 “합리”가 아니고 “돈”이었음에랴!


니부어를 굳이 거론할 것도 없이, 집단이 비도덕적이게 되는 이유는 “집단의 논리”가 “합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집단의 논리를 배격하면 무조건 “배신자”인데 어찌 “합리”를 논하겠는가.


집단은 유,무형의 의도가 있어서 생기는 것이고, 이 의도는 “집단의 이익”을 가져오며 “집단의 이익”은 반드시 합리적일 이유도, “사회 전체의 이익”에 공헌할 이유도 없다.


예를 더 들어보자.


우리는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 “다를” 뿐이지, 이 차이가 차별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 명제”에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여권 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을 본다면 이 운동이 이 “합리적 명제”에 대해 토의하고 사회적 동의를 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는 수많은 사건들을 본다.


여권 운동은 궁극적으로 “남성 증오주의”로 나타나며, 여권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여성의 인권이 가정의 평화에 우선한다는 논리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혼은 권장되고, 가정은 파괴되어도 여성이 그 파괴된 가정의 책임에 주권적 원인이 있다고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들이 없다.


여기서 가정에 대한 책임은 “남녀가 공히 공유” 해야 하며, 훌륭한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건전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우는 책임에 대해 여성도 면책권이 없다는 논리는 “배신”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정의 신성함이라든지 자녀 교육에 대한 의무라는 것은 남성 우월 사회가 만들어낸 도그마티즘일 뿐이고 여성의 행복이나 삶의 질이라는 것과는 전혀 별개라는 사람들과 최소의 사회 구성단위인 가정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우리나라의 패미니즘이 여권 신장주의라기 보다 “남성 증오주의”라는 말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여권 신장이라는 명목은 아주 근사하다.


인간 평등!


인권 존중!


하지만 여권 운동에 유감인 것은 그들에게 관념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는 있지만 심장이 뛰고,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 없다는 것은 아주 유감이다.


다른 예도 있다.


환경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며, 인간이 사는 이 지구는 “유일”하며, 이 세상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 “잠시 빌린”것이라는 명제 역시 훌륭하다.


환경 문제는 이제 이념적이고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다.


인류 생존에 아주 절실한 요구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이 아주 우수한 “도구”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이번 동남아 참사에서 보듯이 자연의 폭력 앞에 인간은 무기력했다.


아무도 자연의 소중함을 모를 때, “조용한 봄”이란 저서를 필두로 시작된 농약 문제는 훌륭한 사건이었다.


국가 권력에 저항하여 환경권을 얻어낸 러브 캐널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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