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7]절망에 이르는 현대인의 질병-고독

김장한 0 1,767 2005.01.05 19:41
 

논증과 논거


우리들은 물 속에 넣은 막대가 굽어보이는 현상을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빛이라고 하는 에너지가 매질을 통과할 때, 매질에 따라, 저항을 받음으로 해서 빛이 진행하는 속도가 물이라는 매질과 공기라는 매질의 경계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근대의 합리론자들은 이 현상을 두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감각적 인지 체계를 기각하고 이성을 사용한 합리적인 인지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즉, 곧바른 막대가 굽어보이는 현상은 우리 눈에 비친 현상으로, 실재하는 막대는 굽어 있지 않으므로, 우리의 감각 체계로 관측되는 현상을 기각해야만 하는 중요한 논거로 쓰일 수 잇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신학자 어거스틴은 같은 현상을 놓고 반대로 해석했다.


그의 주장은, 막대를 물에 넣는다고 막대가 휘지는 않지만 우리 눈에 굽어보인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두 매질의 경계에 놓인 물체는 그 매질의 성질 차이에 따라 굽어보이는 것이 당연한 자연현상이며, 우리 눈에 그 굴절 현상이 관찰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굴절성을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고 말했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판단은 각자 해 주시길 바라며, 나 개인적으로는 둘 모두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눈에 비친 사물을 우리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지금의 현대인들로서는 상식적인 일이며, 또한 우리 눈에 인지되는 현상은 우리가 비록 이해하거나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분명한 자연 법칙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이 점에 관해서는 과학적 발견을 보면 알 수 있다. 과학적 사실은 항상 감각적 인지를 대상으로 해 왔다.)


위의 두 가지는 모두 올바른 근거에서 추론한 올바른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의 논거는 하나의 결론만을 제시하고, 그 반대의 논거를 약화시키는 수단이 될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어르신들이 자주 말씀하시는 바, 이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아주 일상적인 일 하나라도 모두 동등하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인은 나쁘며, 특히 존속 살해는 죄질이 무거운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폭력과 성적 학대로 일관되는 삶을 산 딸이 부친을 살해한 경우도 동일한 판단이 적용되는가?


각종의 게시판에 올라오는 기사 꼬리글을 보면 위의 질문에 대해 그다지 "yes"라고는 하지 않는 듯 하다.


비슷한 경우로 법이 인정하는 긴급피난이라는 조항이 있다.


긴급피난이란, 자신의 생명이 경각에 달했을 때 행하는 행위는 악의의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조치는 정당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법에서 이야기하는 선의와 악의란 의도성의 유무를 가리는 말이다. 즉 악의적이란 고의로 행사한 일이고 선의란 선한 의도가 아니라 의도하지 않고 저지른 행위가 위법 요건이 성립하였을 때 하는 말이다.

 또한 긴급 피난은 정대 정, 즉 피해자도 정이고, 가해자도 정인 경우이며 정당 방위는 정대 악, 즉 피해자가 악이고 가해자가 정일 때 성립하는 것으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겨울철 로키 산맥에서 조난당하고 식량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다 서로 죽인 사건이라든지, 죽은 사람의 시신을 훼손한 경우는 서로 정당한 입장에서 살기 위해 벌인 우발적 행위로 긴급피난이며, 무장 강도에 저항하기 위해 발포한 경우는 상대방이 정당하지 않으므로 정당방위가 된다.

  위의 경우에서 폭행당하던 딸이 존속살해를 저지른 경우는 정당방위가 된다.)


논리라고 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합리적인 방편이라면, 그리고 그 논리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결론이 단수가 아니라 한다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선택” 뿐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아주 흔한 질문이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는 말이 희자되기는 하지만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이 말이 다르게 느껴지고는 한다.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면 빵은 얼마나 중요하길래 애당초 없다는 가정도 하지 않고 말하는 것일까?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하는 공자 역시도 이에 동의하는 듯 하다.


물질에서 정신이 나온다는 말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아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아주 흔히 바쁘면 몸도 아픈 것을 모르고, 다른 생각도 없이 일한다.


하지만 한가한 시간에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떠오르지 않는 잡생각이 없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라며 감탄하게 되지만 사실상, 그들이 그만큼 바빴기에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데...


 

만능형 인간-피곤한 현대인


이 시대 기업은 어떤 인재를 요구한다는 사설이나 책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설이나 책의 내용을 뭉쳐 이야기하자면 현대의 기업들은 “만능형” 인간을 원하는 것이다.


뱃살을 빼기 위해 아침에 조깅도 해야 되고, 아침에 이른 출근을 해야 되며, 출퇴근 전철 안에서는 영어 회화 책을 보아야 되고, 잔업이나 야근 요구도 받아들여야 되고, 대인 관계가 원만하며, 양성성을 가지고 있어, 남자의 장점과 여자의 장점을 가지고 있어 화술에 능하고 몸 쓰는 일도 마다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것을 기회로 받아들이는 인간...


내가 위에 서술한 것이 대체 인간에 대해 쓴 것인지 로봇에 대해 쓴 것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는다.


기계가 인간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는 이미 백일몽이 된 지 오래이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강한 것이 정한 이치인가.


문명이 일구어낸 최고의 이기인 자동차는 현대를 살아가는 최고의 살인자가 된 지 오래이고, 커뮤니케이션의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휴대전화는 밤낮으로 끊일 새가 없다.


대륙간 이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이제는 외국어 하나 두개는 기본이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돈을 들여서라도 배워야 되는 기계의 사용법이 하나 더 늘었다.


정보화의 물결을 타고 전공 지식은 더욱 더 어려워만 가고 대학의 교수들은 옆자리에 앉은 교수가 전공하는 분야의 핵심 개념도 잘 모른다.


우리 세대는 슬픈 세대이다.


차라리 삶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하고, 고민할 것도 없는 생존의 기로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는 최소한 삶의 현장에 있기는 하였지만, 우리의 세대는 삶의 현장이 우리의 삶에서 유리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비극이다.


우리의 사회, 우리의 세계는 너무도 거대하고 조직화되어 있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이끌어갈 수도 없는 현장이 바로 현대이다.


현대는 슬픈 시대이다.


현대는 우리의 생활에 흙발로 걸어 들어온 시대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 우리의 생활에 대해, 어떠한 공통된 합의도 도출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삶은 지속되며, 이야기는 되풀이되어, 오늘의 하루도 해가 뜨고 내일의 하루도 해가 뜰 것이다.


어떠한 결론도 우리가 만들어 놓거나 선택한 것도 없으면서, 부부는 아이를 낳고,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노인이 되고, 노인은 귀천하는 순환이 되풀이되어간다.


그리하여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의 정서는 메말라가고, 메말라 죽어가는 자신들을 살찌우기 위해 달려가는 곳이 종교집단이다.


종교는 생로병사의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빵으로만 살 수 없는 인간에게 결여된 부분을 우리는 종교에서 찾을 수 있는가.


현대인의 질병-고독


인간의 이성은 모든 금기 사항을 우스개로 만들었다.


사실, 금기나 권위는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며 그 궁극적인 이유가 권력의 유지에 있다 한다면 우리가 그 금기와 권위를 존중하는 것은 사실상 “우스개”에 불과하다.


남성우월 사회가 이혼녀나 미혼모를 경멸하는 사회풍토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사회 풍토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가족제도가 유지되게 만들어 준 공로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서로 독립적인 두 사람이 한 집에 살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을, 그나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지켜준 것 또한 이러한 금기와 권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금기가 사라져가는 현대에, 이혼이 프로야구보다 더 인기 있는 “스포츠”라고 비아냥거린 비평가의 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한 가정의 해체, 해체된 가정에서 망가져가는 아이들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술자리의 한 번의 실수가 이혼으로 이어지고, 단순한 잠자리의 취향이 서로 다른 것이 바로 이혼으로 이어져 여성은 여성대로 남성 위주의 사회 진입에 일생을 시달리는 인생을 살고 남성은 남성대로 직장에서, 가정에서, 심지어 잠자리에서마저 수퍼맨이 되는 것을 요구받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만 하는 시대-이것이 혼돈의 현대이다.


현대인의 고독은 단지 철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고독이 아니라 군중 속의 소외이고, 외부로 보이는 수퍼맨이 가진 나약한 내면에 대한 경멸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그래서 고대인과 중세인의 고독이 “존재론적” 이었다면 현대인의 그것은 철저히 “삶의 질” 문제로 귀속된다.


나의 이야기를 누가 들어줄 것인가.


나는 어디에 가서 “나”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2000년 전에 열사의 대지에서 죽었다는 예수라는 한 젊은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으로 당신의 목마르고 주림은 해결될 것인가.


교회에서 울고불고 예배를 드린 후 헌금을 내고 교회를 나오면 소외는 근절되는가.


그래서 현대인의 고독은 질병이다.


애당초 소외와 고독의 근원이 거기 있지도 않은데, 당신의 삶이 당신에게 유리됨으로 해서 생기는 고독이 어째서 종교 집단의 집회를 하러 달려가는 것일까?


구원이라는 만병통치약?


구원이라는 말은 만병통치약이고, 이 약을 파는 저질 약작수인 목회자들은 입심 좋은 차력사에 불과하다.


애당초 인간은 근원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이고, 이 존재적 독립성에 대해 고독감을 느끼며,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사람들 속에 숨겨진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면, 애당초 교회니, 종교적 구원이니 하는 곳에 현대인의 처방전이 있지 않다.


고독에 대한 현대인의 처방은 결국 자신에게 있다.


그렇게 되도록 한 사회와 집단에도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 자신의 부주의와 게으름이 만들어낸 문제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자신에게 찾아야 할 것이 아닌가?


*당신의 직장 상사가 당신을 믿는다면 당신의 가족이 당신을 믿는가?


*당신의 직장 부하가 당신을 존경한다면 당신의 자녀는 당신을 존경하는가?


*당신의 직장에 있는 이성의 직원이 당신을 친절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만큼 당신의 배우자도 당신을 친절한 사람이라고 느끼는가?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의 교인들이 당신을 신실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가족도 당신을 신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이웃이 당신을 성실하다고 한다면 당신의 가족도 당신을 성실하다고 하는가?


전술하였듯 애당초 현대라는 사회는 그 구성원으로 하여금 수퍼맨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당신은 반드시 사회에서 필요한 인간은 아니다.


당신이 기술과 지식을 익히고 배워 당신의 직장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이 당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해고되고 나면, 같은 지식과 기술을 익힌 자가 당신 자리에 들어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당신은 당신의 직장에서 일단 “쓰이는” 입장이지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은 아니다.


더욱이, 당신은 당신의 가족에게 필요한 사람인가?


이혼이 일상화되고, “아버지”의 위치가 역할 모델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금 시대에“돈 벌어오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당신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가정에서조차 당신이 앉아줄 자리는 없다.


(*참고로, 프로이트나 융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현대의 여러 연구에서 이혼은 자녀의 정서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는 교육이 가정과 해리되고, 정보의 주입이 구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통해 전달됨으로 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즉 요즘의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역할 모델로 삼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다른 매체를 통해 역할 모델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현대인을 움츠러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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