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5]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칼럼 1-5]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김장한 7 3,611 2004.09.14 12:22
 

신화적 부정


  웅녀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파와 마늘을 먹는다. 그럼으로, 그가 곰일 때 먹은 피는 죄와 함께 씻겨지고 그녀는 인간이 된다.

헤라클레스는 계모인 어머니의 질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가능에 가까운 시련을 겪고 신이 된다.

예수는 순결한 영혼을 가진 인간과 신의 중재자로써, 그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동정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다.
 
신들의 황혼을 가져온, 주신 오딘을 물어 죽인 마수 펜릴을 잡기 위해 난장이들은 고양이의 발소리, 여자의 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물고기의 한숨, 새의 침으로 만들어진, 절대 끊어지지 않는 그물인 글레입니르를 만든다.



  위 이야기들은 모두 신화로써, 자신이 믿는 신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이것들은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곰은 파와 마늘을 먹지 않으며, 먹는다고 해도 곰이 인간이 될 리는 없다.

헤라클레스의 임무는 인간이 할 수도 없는 일이며,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신이 된다고 믿어지지는 않는다.
 
처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고양이의 발걸음은 자세히 들으면 들리고, 수염 난 여자도 있으며 산도 그 근원이 되는 마그마의 분출구를 찾을 수 있지만, 곰의 힘줄이나 물고기의 한숨, 새의 침은 구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을 섞는다고 해도 신을 이길 정도의 마수를 잡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실을 만든다는 생각은 부정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이러한 이야기, 너무도 불가능함이 당연한 이야기들을 소위 신화적 부정이라고 부른다.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


  무지한 중세나 문명의 여명기인 고대에서 이 이야기가 사실일 것으로 믿어졌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현대에까지 암운을 드리운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실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 작성자들은 그저 신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온 신화적 부정을 알고 있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담배는 콜럼버스와 같은 미 대륙 탐험가들이 유럽으로 들여온 것으로 우리나라에 담배가 보급된 역사는 고작 200년 전후일 따름이다.
 
호랑이가 담배를 필 수 있다 하더라도 당신의 할아버지가 당신에게 들려주시던 옛날 옛적의 이야기란 것이 200년 전후의 이야기인가?



평범한,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그냥 재미있으면 된다.
 
만약 당신이 그 이야기와 관련된 종교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함으로써, 지루하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으리라.

만약, 당신이 북유럽의 신화인 펜릴의 이야기나 주신 오딘을 믿는 신비주의 종교 집회에 나가시는 분이라 해도 굳이 글레입니르를 만드시려 고생하시지 않는 것을 안다.
 
당신이 대종교의 신자라 하더라도 굳이 곰에게 파와 마늘을 먹여 인간을 만드시고 싶어 하시지는 않는 것으로 믿는다.
 
혹시라도 당신들 가운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기가 언제인지 고증하시고 싶으신 분들이 계신가?

웃으며 말씀드리건 데, 포기하시라.

그것이 당신의 정신 건강에 이롭고, 그 시간을 다른 일에 쓰시는 것이 우리 사회에 이롭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하루의 피로를 푸시는 당신, 같은 소시민으로 환영하며 반가움의 인사를 건넨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가 아닌가!



망국적인 무지


  그런데, 이 반가움에 내민 손을 뿌리치는 손도 있다. 바로 바이블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통합공과를 만들어서 단군 신화는 부정하면서 예수 동정녀 탄생 신화는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레입니르는 만들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를 암수 한 쌍씩 실은 노아의 방주는 역사적인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와 신앙은 과학적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과학으로 이루어진 사실들을 흙발로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통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속담에 “처녀가 아이를 배어도 할 말은 있다.”하였고, “세 집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이 세상에 못 믿을 이야기가 없다.”는데, 정말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들고, “믿을 이야기가 없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반박을 하고 싶어도 기가 막혀 반박을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몇 명”으로 세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국민의 “몇 퍼센트”로 세어야 한다니, 어이가 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듯 하다.
 
사실이 그러하니 이 땅에 광신이 판을 치고 망국적 종교 양태가 보이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생각된다.



1. 1+1=2입니다.

2. 서울은 2004년 현재 대한민국의 행정수도입니다.

3. 물은 전기분해하면 산소와 수소로 분리됩니다.

4. 자석은 양극과 음극의 양극이 한 쌍을 이루는 자성체입니다.

5. 예수님은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위 5가지 보기 중 사실 명제가 아닌 가치 명제를 고르시오.


이 문제를 푸시면서 5번 이외의 답을 선택하신 분들이 계시는가?

중학생 수준인 이 문제를 틀리는 사람이 우리나라 국민 중 많게는 20%, 적게는 15%가 되는 이 현실은 이제 농담이 아니다.
 
중동 선교를 위해서 이라크 전쟁에 파병해야 된다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가 이것이 아니었던가!

피의 학살을 되풀이해도 그 근거가 바이블에 있으면 좋다는 사람들이 찬성하는 전쟁이 중동전쟁이 아니었던가!



말세적 광신에 대한 서술



  신화에 그 근원적인 소스로서의 신화적 부정이 발견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하지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을 보면, 신화적 부정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어야만 종교가 성립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수행 중 코끼리를 한 손으로 뒤집었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믿는 무지한 불교인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신화는 그 종교의 교리 자체와는 분리되어야 타당하며 신화는 신화로써 평가를 받는 것이 건강한 종교임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수차례에 걸친 휴거 소동을 보면서 신화적 부정을 객관적인 텍스트로 이해하려는 모든 의도의 저변에는 광신적인 신앙을 주도하려는 의도가 깊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루어진 종교적 예언이 하나도 발견되고 있지 아니함을 우리가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종교적 신화를 신화 이상으로 보려는 어떠한 의도도 행위 중립적이지 않음을 안다.

광신적 교리에 함몰된 이들은 흔히 지금 인류의 모습이 말세의 양상과 너무도 닮지 않았느냐고 한다.
 
물론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말세의 양상과 지금의 모습이 닮은 점이 있음은 안다.
 
하지만, 힌두교에서 말하는 칼리 유가는 어떠한가? 지금의 모습과 다른가?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보살이 내려올 때의 양상이 지금과 다른가?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정 도령이 내려오는 시기가 태평성대라고 하던가?

조로아스터교에서 불교까지, 디오니소스에서 미트라까지 온갖 종교의 교리를 모아 놓은 기독교의 교리에서 불가의 교리와 비슷한 점 몇 가지가 발견되는 것이 그렇게 신기한 예언인 것인가?

얼마나 이것이 염려되었으면 예수마저 “내 말은 곧 비유이니, 들을 귀가 있는 자만 듣겠고, 볼 눈이 있는 자만 보리라.”고 까지 말했겠는가!

예수의 말은 모두 비유이다. 왜 동정녀 출산과 나자로의 부자 이야기만이 비유가 아닌가!

정말 이상한 것이, 왜 돈 내라는 이야기만 비유가 아니고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만 비유일 것인가?



무지-그 자승자박의 결과



  기독교가 처음부터 잘 못 끼운 단추-신화의 텍스트적 해석의 결과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왔다.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켜 교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사건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내부적으로도 광신이 판을 치고, 바이블 해석이 엇갈려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논쟁에 불이 붙어 기독교 종파는 무려 25000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제는 기독교를 믿고 싶으면, 바이블에 진실이 있다 하더라도, 1/25000의 확률을 먼저 논해야 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진리를 믿는 것인지, 찍기 실력이 뛰어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이제 지식인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교회를 떠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단 싸움, 단군을 부정하는 통합교과, 과학을 부정하는 무지한 창조과학, 미국을 섬기는지 여호와를 섬기는지 모호한 목사와 신도들. 이것은 모두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기를 부정할 때부터 예견되었던 일이다.
 
교회는 먼저 사회를 범했으며 이웃의 웃음을 짓밟고 민족의 자부심을 팔아 넘겼고 연간 수 십 조원의 돈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기묘한 현상을 연구하는 이들은 비로소 예수의 실존 문제에 칼을 들이밀었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신화적 연구), 예수 망명설(역사적 연구) 등 셀 수도 없는 텍스트들이 예수를 직접 겨냥한다.
 
그 어느 종교도 과학적으로 그 고유의 성서 내의 인물에 대해 이렇게 많은 문헌연구, 연대 비평 등의 과학적인 수법을 강조하여 그 신성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가해진 적이 있었던가!

이 참람한 결과-그것은 자승자박에 다름 아니다.
 
우리나라의 교단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노아의 홍수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노아의 자손임을 입증하기 위해 각종의 연구를 하고 있으며 이 꼴을 보다 못한 지식인들은 밤을 세워가며 예수의 실존을 거론한다.
 
자승자박이라…….개신교를 위해 만들어진 말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지금 현재의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에 들어맞고 있다.



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정리하자면, 신화란 신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고 완성된 텍스트이다. 우리는 신화를 읽고 글레입니르를 만들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우리는 웅녀를 만들기 위해 곰에게 파와 마늘을 먹이려는 일체의 시도가 헛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굳이 반론을 원하는 사람을 위해 말하자면,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일부의 신화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쓰였고, 그 사실을 믿었던 아마추어 고고학자에 의해 트로이 유적지가 발굴된 적은 있지만, 트로이 전쟁 역시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으로 모든 사실이 다 사실일 수는 없다.

(혹시 파리스가 예쁜 마누라를 준다는 아프로디테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시는 분 있으시면 좀 참아주시라. 광신은 기독교 하나로도 이미 버겁다.)
 
전쟁을 수행하고 그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의로운 행위를 하다 죽어갔음을 기리기 위해 신을 들먹이는 행위는 그리 드믄 일도 아니다.
 
우리들도 보지 않는가? 대규모의 승전 기도회가 열린 근대와 중세의 유럽을 보면서 말이다.

이제 신화에서 튀어 나온 바이블을 다시 신화 안으로 넣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온갖 가지의 모순과 부조리를 그대로 두며 살기엔 우리네 인생들이 너무나도 고단하다.

이제 예수도 좀 쉬게 하여 주자.

고대의 신적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러했듯이, 인류를 구원하겠다던 동정녀의 아들이요,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는 디오니소스가 그러했듯이, 예수도 이런 신화적 영웅들과 같은, 망각의 길을 가야만 한다.
 
실존 인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예수…….그의 존재가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죽은 예수의 시신을 다시 파헤칠 이유가 없다.

그리고 또한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의 교회에 돈을 벌어주어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논할 가치도 느끼지 않는다.

구원은 스스로 얻으라.

죽어 넘어져 진물이 흐르는 예수의 시신에 대고 구원을 논하지 말라.

당신네들 기독교인들은 2000년이 넘게 그의 시신에 빌붙어 살지 않았는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 불행한 삶을 살다 간 예수…….그리고 그 불행으로 얼룩진, 모순된 삶을 서술한 바이블을 이제는 덮자.



그리고 이제는 말하자 :


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당신이 구속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당신을 구속해 버린 기독교인들의 집요함에서 벗어나…….인간이라면 누구나 걸었던, 그리고 걸어야만 하는 그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부조리를 죽어서야 알아버린 예수여,


다시 살 수 없는 예수여,


위선과 가식, 그리고 거짓에 가리어진 예수여,


오만에 찬 독설을 내뱉으신 것을 후회하실 예수여,


살아서는 아무것도 아실 수가 없으셨던 가련한 예수여,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신마저도 구원하실 수 없으셨던 불쌍한 예수여,


이제는 영면의 세계에서 편히 쉬시옵소서. 다시는 이 땅에 사시지 않을 당신을 기리며, 애통해 하나이다.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9-29 09:15:43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Asimov 2004.09.14 17:05
안티박멸// 반박글? 너무너무 기대 됩니다. ^^
wayne 2004.09.14 15:32
붕신...윗분 emoticon_036emoticon_044
어디 무슨 반박글이나 올리는지 기다려보겠소....ㅋㅋㅋ
안티박멸 2004.09.14 15:12
이사람 미쳤구먼. 181818
뭐 고 예수의 명복을 빌어? 18181818
이 글에 대해 당장 반박글 쓰겠소
허리베기 2004.09.14 14:22
김장한님 오랜만입니다..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인드라 2004.09.14 13:20
마지막 예수와의 대화는 비판정신과 감성적인 부분이 좀 결여된 듯하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좋은 글입니다..^^;;;
김장한 2004.09.14 12:23
동포님께, 자료 감사합니다. 그 때 말씀드린 신화적 부정에 관한 텍스트입니다.
김장한 2004.09.14 12:22
오랜만입니다. 집에 돌아온 것 같네요. 다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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