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1-3]바이블의 소설적 성격

[칼럼 1-3]바이블의 소설적 성격

 

비겁의 미학


  이 세상을, 많이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불가지론을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유일신 등의 특수한 사상을 믿을 때 그 문제는 특히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에 의해 구속된 상태이고, 우리가 신에 의해 이루어진 특수한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문제는 더욱 첨예화되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바로 여호수아의 이야기이다.

여호수아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하늘의 해를 붙잡아 놓았으며 이 사실이 천동설을 기반으로 설명된 것은 여호와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동설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지금에 와서도 “해가 뜬다.”는 비과학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누구도 수긍이 갈만하다.
 
이런 논의는 시작된 지 오래 되었으며, 우리가 단지 모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초월의지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게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이제는 기독교의 경전인 바이블을 비판하는 사람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인 “일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즉, 그 당시 율법을 해석한 일부의 신학인들의 일로 바이블을 다 해석한 것인 냥 행동한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말이다. 



무지에 기생한 변명


  나는 도대체 왜 그 전지전능하다는 여호와가 내려주었다는 말을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은 벌써 수백 년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던 사실을 마지못해서 깨닫게 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지식인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는 노고를 무릅써야 알 수 있었던 사실들을 사리에 맞게 말할 때는 무시하고 변명하더니, 여론에 밀리고, 반론을 어떤 방법으로도 제기할 수가 도저히 없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잘 못 생각했으며”, “ 여호와의 일은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너무도 높은 곳에 위치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판단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분명,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도처에 널려있고, 그것들을 분명, 우리가 잘 모르기는 하지만 우리 인류는 그 비밀을 계속해서 파헤쳐 왔다.

이 세상의 불확실한 면모는 아직 인간의 연구와 노력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

이 세상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과학은 계속 발전하여 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오염이라는 화두를 남기기는 하였지만, 그것도 과학자들에 의하여 밝혀졌으며, 유효한 대응책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의 답안이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바이블이 왜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바이블이라는 문서의 성격을 논함으로써 밝히고자 한다.

 


바이블은 팬 픽션이다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한번 생각해 보자.
 
이 명제는 우리에게 바이블이란 쉽게 말해 메시아 재림을 원하는 일단의 팬클럽에 의해 쓰인 팬 픽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아마도 인터넷이 널리 보급된 요즘에는 5인조 댄스그룹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런 팬 픽션들을 아마도 많이들 읽어보았으리라 생각된다.

팬 픽션을 읽어 본 이들은 잘 알겠지만, 팬 픽션에 나오는 이들의 성격과 행동들은 범인의 범주에 놓고 판단하기 힘들다.
 
그들은 대개 동성애를 느끼며, 같은 멤버들 가운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느끼는 모습들을 그려낸다.

좀, 반항아적인 의상을 입고 나오는 가수들은 그 소설에서 의협심 깊은 정의의 사도로 묘사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들을 정의의 사도로 표현한 것은 이해가능하다 하더라도, 왜 굳이 그들을 동성애자로 표현했는지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그들을 사랑한다는 10대의 여성 팬에 의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글들을 쓰는 사람의 성향을 알고 나면 답은 간단하다.
 
10대의 사춘기 여자아이…….그들이 그런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소유욕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뭔가 감동적인 러브스토리는 쓰고 싶은데 자기 외의 여자와 자기가 좋아하는 오빠들과 맺어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또한, 누구도 그런 일들이 사실이 아닌 것이 너무나 당연하므로, 이 글이 사실상의 픽션임을 알리는 장치도 겸하는 것이다.
 
바이블이 이런 입장에서 쓰였음을 말하는 부분은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지적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바이블의 소설적 장치


  이 문제는 예수의 출생에 대한 부분에서 가장 첨예화된다.
 
예수는 다윗왕의 후손인 동시에 여호와의 아들이다.
 
뭐가 옳은가?
 
다윗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데, 그가 하나님과 동격이 될 예수의 조상이 될 수 있는가?
 
성서의 저자들은 이 단순한 사실도 모를 정도의 바보인 것인가?

아닐 것이다.
 
영지주의로 대변되는 이러한 저작들은 우리가 성서를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기를 소리높이여 부르짖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위의 저술은 당시 로마의 통치 하에서 억압당하던 유대인들의, 자신들만의 왕이 이 땅에 내려와 자신들을 다스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일종의 소설적 장치에 불과하다.

자신의 역사에서 최초로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왼 다윗-이웃 국가와 전투 행위를 하고, 연전연승할 정도로 위세가 있었다는 그 왕의 적통이 메시아로, 신의 아들로 이 땅에 와 만 인류를 다스리리라는 생각은 매력적으로 느껴졌으리라.

그러므로 예수의 혈통에 대해서 자신들의 민족과 정통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 몇 개를 짜집기하여 만들어 진 사실에 대해서는 놀랄 거리도 못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쯤은 읽어보았을 삼국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삼국지의 주인공 중 하나인 유비가 황실의 후손이었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

단지 유비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며 한나라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남에게 빼앗기는 것을 한탄해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울분을 풀고자 했을 따름인 것이다. 



바이블 재평가의 정당성과 의의


  그러하다면 예수 미스테리아 명제를 여기에 적용했을 때, 유대 땅에 로마 총독부가 있었던 사실과 우리나라에 일제가 세운 조선 총독부가 존재했던 사실을 비교하여 귀납적인 결론에 도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 약자의 비애를 어떤 문서에 담고자 했다면, 바이블의 허구적 성격은 쉽사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 시대를 통하여 가장 많이 왜곡된 것 중 하나가 바로 우리나라 위인들의 업적이다.
 
즉, 일제의 우리나라 역사 왜곡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작성된 위인전기는 그 인물의 실제적 성격과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 중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웅”으로까지 추앙하는 이순신의 전기는 역사라고 평하기보다 차라리 무협지라 할 만큼 많이 왜곡되어 있다.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으나, 같은 시대의 위대한 명장 중 하나인 원균의 명예가 심각하리만치 왜곡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그 전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마찬가지로 바이블의 추종자에 의해 곡해되고, 왜곡된 이단 신앙과 주변 종교의 역사적, 유물적, 철학적 가치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바이블의 정당한 위치를 확립하는 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바이블의 정당한 위치 찾기는 그것이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 사실이므로 복원하여야 한다는 정당성이 있으나, 왜곡된 과거의 찬란한 문화와 정신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더욱 정당하다.

  


허구의 정당성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과연 기독교인들의 신앙 체계에 혼선을 주고 이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모두 다 신앙함을 포기하여야 하는가?
 
놀랍게도 그 답은 “예”인 것으로 보인다.
 
바이블의 무오함을 주장하다 결국, 우리는 노아의 홍수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며 사실을 왜곡함과 동시에, 거의 매국적 사고에 가까운 정신을 지닌 일단의 광신도들은 당연히 그러하며 일반적인 신도들도 예수 재림을 믿지 않으면, 그를 어찌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예수의 구속사를 부정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사탄에 가까운 이단적 사고이다.

1700년 전, 문자주의자들에 의해 영지주의자들이 제거된 이후 예수 재림에 대한 믿음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사상의 근간이 되어온 것이다.

불타를 믿어도 천국가고, 우남보테를 믿어도 천국가고, 무슬림들처럼 예수를 부정해도 천국 간다고 믿는 종교가 과연 그 이름이 기독교일 수 있는가?
 
사회악으로 불리는 기독교인의 행위는 그야말로 바이블에 명시된 그대로이며, 사찰방화나 단군상 목 자르기 등을 행하는 기독교인들은 “올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다.
 
그에 비하면, “고작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정도”밖에 행위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질 용기”가 부족한 것이며 믿음이 약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행 중 불행?


  시장이 자신이 봉사하는 도시를 봉헌하는 망국적 광신이 판을 치고 있는 한국과는 달리 외국에서는 정화운동이 한창이다.

그 중심에는 수천 년간 서방세계의 신앙을 책임져 온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다.

마녀 사냥, 십자군 원정 등 대표적 기독교 만행을 정식 사죄한 것이다.
 
또한 교황과 미국의 대통령이 만나는 자리에서는 미국의 전쟁 행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 중, 진리가 다른 종교에도 있음을 인정한 일은 백미라 칭할 만 하다.

양로원화 되어가는 서구의 기독교의 환골탈태!

이것은 어떠한 의미로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가 존재하는 채로 화해와 협력의 가능성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찬물을 끼얹는 예수의 한마디가 생각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 10;34~36)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별로 지켜본 적 없으면서 이 말은 거의 모든 기독교 권력에 의해 너무도 확실히 지켜져 온 것으로 보인다.

당장 힘이 없는 서구의 기독교야 한발을 빼는 모습을 보이지만, 권력을 확실히 가지고 있는 한국 교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범죄, 타락과 부패의 온상이 되어 있는 한국의 기독교를 보며,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단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결과가 아닐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야 누구나 아는 바이지만, 그 권력이 특히, 피로 점철된 기독교의 권력이라면 그 후가 더욱 두렵다.
 
이라크 파병을 찬성하던,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독설에 가까운 달뜬 설교를 하던 목사와 소리높이여 이라크를 맹성토하던 신도들의 눈에 비친 광기가, 화해를 위해 내민 기독교의 손을 잡기 어렵게 한다.
 
혹시 저 손을 잡았다가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우리의 자녀를, 십자군 원정에 내보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
 
불행히도, 그러하지 않으리라는 증거를 우리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화해와 협력의 길목에 서서


  7년쯤 전에 로마클럽의 한 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그 보고서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는 독립된 정치 단체가 지구상에 5000개가량 있었으며 그 보고서가 작성되던 무렵에는 200여개로 줄었다고 한다.
 
그 통합의 주된 수단은 모두다 전쟁이었으며, 이 200개의 정치단체가 1개의 세계 정부 내지는 10개미만의 대륙 정부로 정리되는 미래를 모델링하면서, 그 파장과 결과에 대해 서술해 놓은 보고서였다.
 
지금의 무기는 칼이나 활 등의 앙증맞은 무기가 아니다.

지금 인류의 무기는 핵이나 바이오 웨펀 등 심각하게 인류를 줄일 수 있는 끔찍한 살상무기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제 3차 세계대전의 무기로는 무엇이 쓰이겠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나는 그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세계 4차대전의 핵심무기가 무엇인지는 안다. 그것들은 바로 돌도끼와 화살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현대전에 사용되는 무기는 너무도 두려워서, 이것이 한번 사용되기만 하면,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이제 신념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정말 심각하게 재고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성전”이라 불릴 만한 어떤 행위도 유발되게 하는 것들을 심각하게 부정해야만 한다.
 
그 신념 체계 중 인간의 정신 체계 가운데 가장 상위의 것이며, 인간의 정신과 영혼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는 종교가 상위 리스트에 들어 있음을 슬프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기독교가 화해와 협력을 위해 내민 손을 뿌리친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지 오늘도 고민하며, 또한 공부한다.
 
이런 행위가 내 선택을 좀 더 낳은 미래로 데려다 줄 것을 믿으며.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9-29 09:14:48 (구)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우상파괴 2004.08.30 19:12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성경을 감히 소설이라니....
태식엄마 2004.08.30 12:32
조까emoticon_036
김장한 2004.08.30 10:20
음...올리고 났더니, 바로 그 다음에 데이터 베이스 오류가 뜨더군요...혹시 뭔가에 방법 당하는 건 아니죠?^&^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33 [칼럼 3-4] 이적은 없다! 김장한 2004.11.26 3209
32 [칼럼 3-3] 영생과 천국의 허구 김장한 2004.11.12 3065
31 [칼럼 3-2] 도전과 응전 김장한 2004.11.08 3334
30 [칼럼 3-1]언어체계 내에서 주관적인 진리 김장한 2004.11.02 3316
29 [김장한 먹사의 설교 제 3탄]기독교가 자살을 금지하는 종교라? 김장한 2004.10.26 3479
28 [김장한 먹사의 설교 제 2탄]열왕기상 18장 김장한 2004.10.26 3208
27 [김장한 먹사의 설교 1탄]사람위에 목사있고 목사위에도 목사있다? 김장한 2004.10.26 3873
26 [칼럼 2-6]주권회복운동 김장한 2004.10.19 2928
25 [칼럼 2-5]권력 지향적인 종교 김장한 2004.10.15 2690
24 [칼럼 2-4][속보-22세기 뉴스]기독교 박물관 개장! 김장한 2004.10.06 2805
23 [칼럼 2-3]문화 비평 1 김장한 2004.10.06 2787
22 [칼럼 1-6]눈물로 말하는 기원 김장한 2004.09.30 3204
21 [칼럼 2-1]시대 정신과 종교 댓글+6 김장한 2004.09.24 2953
20 에세이 1부를 종결하며 댓글+2 김장한 2004.09.24 2684
19 [칼럼 1-9]성령영접의 허위 댓글+2 김장한 2004.09.21 3362
18 [칼럼 1-8]완전에 바치는 기도 댓글+8 김장한 2004.09.20 3377
17 [칼럼 1-7]허구의 죄악 댓글+11 김장한 2004.09.17 3711
16 [칼럼 1-5]고(故) 예수의 명복을 빕니다. 댓글+7 김장한 2004.09.14 3611
15 [칼럼 1-4]껍질깨기 댓글+27 김장한 2004.09.02 3369
열람중 [칼럼 1-3]바이블의 소설적 성격 댓글+3 김장한 2004.08.30 3161
Category
State
  • 현재 접속자 155 명
  • 오늘 방문자 787 명
  • 어제 방문자 5,355 명
  • 최대 방문자 5,411 명
  • 전체 방문자 1,570,164 명
  • 전체 게시물 14,416 개
  • 전체 댓글수 38,042 개
  • 전체 회원수 1,668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