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덕의 신념
말도 되지 않는 창조과학회를 보면서, 그리고 한민족의 조상은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무지한말을 들으며, 나는 기독교 사상의 그 단단한 신념체계에 감탄했다.
그 신념이 어떤 것인가를 논하기 이전 우선 신념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대개의 사람들은 신념이 옳은 것이며,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러하지 못한 이들에게 비추어 더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지래짐작한다.
신념이 없는 공무원은 돈을 위한 비리나 저지르고, 뭔가 더 나은- 발전적인 사고에 대하여는 복지부동이며, 그럼에도 출퇴근 시간과 봉급에 대해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사수하는 이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신념을 가진 이는 그러하지 아니하며, 그가 만약 공무원이라면, 복지와 민원 서비스에 만전을 기하며, 친절하고 유능한 공무원이 되리라는 것이 그들의 사고의 한계이다.
왜냐하면 대개 그들은 신념이 단단하여 누구의 무슨 말을 들어도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아니하는 사람을 실제 그리 많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생각하고 살지 아니하는 것은 행복하다.
그것은 곧, 우리의 삶이 현재 암초에 부딪혀 있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이는 불행하다.
왜냐하면, 그의 앞에는 온갖 가지의 부조리와 모순이 더미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이들은 훌륭한 사람의, 혹은 학교나 가정에서 이미 들어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한다.
신념이라는 것이 어떤 모순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실재 그 문제를 다루어 보지도 않은 것이다.
과학이 신념인가, 신념이 과학인가
창조과학회-나는 이들이야 말로 지금 우리 주변의 가장 단단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신념 체계가 아니다.
진리를 향해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 길을 나아가는 선구자요,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고 안주할 땅을 찾지 못해 끝없이 방황하는 엑서더스의 순례자들이다.
과학은 영원한 과정이며, 끝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이다.
창조과학을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한번 되짚어 볼 것은, 과학이란 과연 결론을 내리고 증거를 찾는 것이던가, 아니면 과정과 현재를 반추하며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인가라는 과학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이다.
창조 과학은 신앙의 일부-즉,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의 새로운 신앙체계라는 것은 이래서이다.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이 공식을 제공하고, 이것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한 것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기존의 현상과 공식을 조합해 위의 결론- 즉, 질량 소실은 에너지의 생성이 됨을 논증한 것에 불과하다.
나열된 물음표의 길 위에 서서...
아인슈타인은 역시 신념을 가진 학자로, 그는 죽는 날까지 기계론적 우주관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4대력이 하나일 가능성이 초끈 이론으로 정리되고 있는 지금, 보어의 양자이론 또한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우리 앞에 목도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이 논쟁은, 누구 하나가 다른 이의 말꼬투리 잡기 대회가 아니라, 너무도 규칙적인 아인슈타인의 세계와 불연속적이고 종종 일탈하는 보어의 세계가 서로 충돌을 일으켰을 뿐이다.
이 거대한 충돌은 결국 카오스 이론과 초끈 가설로 우리를 인도하였으므로 우리는 빅뱅이 가능하여진, 그 거대한 에너지를 인간의 두뇌 안에서 재현해 볼 수 있는 기틀을 보는 작은 지적 충족감을 맛볼 수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 과정을 여러 번 겪었던 역사가 있다.
빛의 속성에 관하여 광양자설과 에너지 파동설이 충돌한 결과, 우리는 빛이 이 양자의 성격-즉, 굴절을 설명해 주는 파동적 속성과 직진성을 말해 주는 입자설 양자를 다 만족시키는 결과를 유도해내었다.
이 놀라운 결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고, 결국 드브로이는 빛만이 아니라 물질이 파동성이 있음을 입증하여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토대를 구성해 줌으로 우리의 과학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며, 과학자의 신념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열려 있는 우주를 열린 시각으로 봄으로써 우주의 근원과 생명의 기원에 대해 우리는 보다 더 본질적인 의문을 새로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부산물로부터는, 비록 그것이 지구상의 몇몇 국가에 한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굶지 않는 사회가...아니 오히려 많이 먹어서 문제가 되는 유일한 시대의 막을 열 수 있었다.
이것이 과학이다!
의문으로 출발하여 결론을 얻고, 그 결론으로 다시 새로운 의문이 시작되는 무한의 프렉탈!
길 위의 풍찬노숙이 일상인 영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의 행렬!
사실과 악수하는 점잖은 신사이며 끝없이 투쟁하는 혁명가이다!
창조과학회. 그대는 이러한 사실을 아는가!
창조과학-미래로 뒷걸음질하는 그 허상의 세계
기원전 3세기에 우리는 과학책에서 배운 대로,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둘레를, 지금의 계산과 그리 크게 틀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산출해 놓았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어진, 지금의 계산과 비율이 그다지 크게 오차가 없는, 보석으로 꾸며진 공전 모델을 우리는 본다.
하지만 그대들이 그 토록이나 위대하다는 예수의 축복받은 교회는 그 후로 천 년이 넘도록 이 사실을 모를 수 있었는가!
파르테논을 만들던 그 위대한 문명과 같은 것을 만들기 위해, 그대들은 어찌하여 수백 년을 미래로 뒷걸음쳤는가!
그대들은 어찌하여 이집트의 이교도는 그렇게나 잘 다듬던 보석들을 다듬지 못해 교황에게 그저 연마되었을 뿐인 보석을 달게 하였는가!
고대의 그 풍만하고 아름다운 서사를 보기 위해 왜 우리를 수천 년을 기다리게 하였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성 있는 이들의 저작에 추악한 말꼬리를 잡으며, 그대들은 우리를 대체 몇 백 년 전의 유물과 대면케 하려는가!
그저 신앙함으로, 오롯한 행복과 충만감을 느끼고 베풂의 기쁨을 느끼기가 그렇게도 싫은가?
죽어 넘어져, 이제는 추한 진물만이 흐르는 창조의 시신을, 그대들은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매달아, 그것으로 과연 무엇을 행위하려 하는가?
증명함으로 신앙이 가능한가, 아니면 신앙함으로 오히려 증명이 가능한가?
당신들이 지금 하는 행위는 전자인가, 아니면 후자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단지 교회의 단물을 빨아 먹는 속물에 불과한가?
당신들이 진정 과학을 하는 이들이면, 반드시 길 위에 서서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창조”라는 종착점에 서서, 그대들은 과연 무엇을 더 말하는가!
수집을 멈춘 미술관은 창고나 다름없고, 열람을 금한 도서관은 장식품에 불과한 것을 알고는 있는가?
“창조”라는 수집의 정점에서 또 수집할 것이 남아있는가!
“창조”라는 열람 금지의 팻말 앞에서 그대들은 무슨 글을 더 읽으려 하는가!
그릇된 형용의 허구
성서의 무오함을 증명하고 예수를 받아 들여 단군을 쓸어버리는 이들의 행위는 그들 자신에 의해 “선한 싸움”으로 정의된다.
기독교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존재인 것이다.
“선한”이라는 형용사에 함몰된 싸움이라는 말은 왜소하기 그지없다.
기독교를 안 믿는 비신앙인들도 선 하다는 말에 현혹되어 진리를 밝히려는 이들을 “선한” 싸움을 말리는 “악인”으로 매도해왔다.
이에 나는 인간의 무지를 탓 할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싸움은 그 자체로 악하다!
그 사실을 왜 모르는가?
우리는 “선한”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반대하는 것이다.
싸움이라는 단어에 어찌 선하다는 형용이 가능할 것인지 혹시 생각해 본 일 있는가!
기독인들은 “선한 싸움”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2000년간을 싸워왔다.
초기에는 이교도 주의자들과,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과 다른 그노시스파와, 자신들의 일부인 신자들과, 저 멀리에 있는 무슬림들과, 마녀와, 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미개한 종교를 믿는 이들과 싸워왔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지금, 창조의 신념을 밝히려 과학자와 싸우는 중이며 단군을 부정하려 역사학자와 싸우는 중이며 순교하기 위해 외교관들과 싸우며 호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인근 주민과 싸우며 목사와 교회의 부패를 고발하는 방송국과 싸우며, 기독교에 정통한 지식인들과 싸우 며 악한 신을 모시는(?) 불당과 싸우며 한국의 12번째 선수인 붉은 악마 응원단과 싸우며 목사에게 성폭행 당한 딸의 가족과 싸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화평을 주러 온줄 알지 마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쥐어주러 왔다.”고 성서에 이르니, 어찌 그리도 기독교인들과 성서 말씀이 일치하는 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은 지금도 위에서 언급한 것들과 싸우고 있으며 또 싸울 거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부도덕의 신념...
이라는 말로 이제 서두에서 꺼낸 말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념이라는 것만큼, 우리 인류를 피폐하게 만든 것도 없다.
세계적인 살육사는 신념의 역사이다.
나폴레옹의 신념이 약하다 할 수 있는가?
나치보다도 특정 인물과 종교를 증오할 수 있는가?
지금의 무슬림 테러단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최강대국인 미국을 상대하며 위험한 도박을 감행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고 김선일씨를 죽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의심한 점 없는 완전한 믿음!
신념이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신념 그 자체도 악을 내포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목숨보다 소중한 무슨 가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만큼 많은 사람을 살상하고 피해 입힌 사고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다종교 시대의 개막을 목전에 두고...
이제 우리는 다종교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있다.
모든 신앙과 진리가 하나의 담론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지금의 우리는 고대의 화려한 이단시대로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서구의 르네상스는 고대의 인본으로 우리를 인도하였으며 지금 현재진행인 이 신 르네상스가 끝나면 우리는 보편 종교가 아니라 특수 종교 시대를 사는 이들이 되어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증거의 하나가 바로 개신교의 분열양상이다.
이미 26만개에 육박하는 이단교파의 성장은 이미 기득권 종교가, 그 위세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최소한 “Christ"라는 말을 쓰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제 교계의 가르침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가 폭주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그리고 교계가 은폐하여왔던 진실들을 일반 신도도 알 수 있게 된 지금에 있어서 보편종교는 답이 될 수 없다.
이미 노후한 서구가 보여주고 있으며, 종교-특히 기독교 신앙을 반사회적 시각으로 부는 중국이 그러하다.
예수를 신도의 한 신으로 만든 일본의 경우가 그러하며 미국의 기독교 감소 추세가 이를 보여준다.
수백 년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것이지만, 이제 우리는 과학적 사실과 신념의 체계는 분리할 필요가 있고, 이 나라를 좀먹는 광신적 기복신앙으로 탈피하기 위해서라도 신념적 지식체계는 분명히 거부되어야 한다.
이제 신념으로 지식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신념을 구성하는, 지성적 믿음이 필요한 시기라 생각한다.
우리가 잘 못 행위를 하여왔음을 반성함과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