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질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단상
진리는 어려운 것인가, 쉬운 것인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아마도 저질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으실 것이다.
날카로운 비판 정신과 위트가 결여된, 남을 상처 줌으로 웃음을 주는 저질 개그, 해학은 없는 위트, 그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가운데 얼빠진 웃음을 유도하는 저질 코미디를 보고 인상을 찌푸린 적은 분명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있은 지는 꽤 오래되었다.
하지만 저질 오락프로그램은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고, 비판은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방영된다.
방송은 항상 하향 평준화된다.
왜인지 아시는가?
수준 낮은 이들이 고급의 프로그램을 보고 재미있어 할 리가 없다.
아예 이해를 할 수 없을 것이므로.
하지만 고등의 사유가 가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저질 개그는 이해가 가능하다.
상향 평준화는 불가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방송을 선택하는 이들의 수준을 낮게 보아야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길 수 있다.
그러하므로 방송에는 저질 개그가 지금도 난무하고, 고급의 해학은 이해하는 자가 드물기 때문에 저질 개그는 여전히 제작 가치가 있는 것이다.
진리가 쉬운 것이라 하나, 여기에 진리가 있다 하면 우리는 슬프지 아니한가?
보편타당한 진리?
고정 불변의 진리는 가능한 것인가?
케보키언 박사를 보면 우리는 그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소극적 안락사를 실행함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바 있고, 저번에는 적극적 안락사를 실행함으로 전 세계적인 안락사 논란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다.
(*참고-안락사에는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가 있다. 안락사는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과학적, 의학적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데서 자살과는 구분되며, 소극적 안락사는 지체의 일부를 움직일 수 있는 환자에게 안락사의 기술적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며, 적극적 안락사는 지체의 자유가 거의 없는 환자에게 호흡기를 떼거나 독물 등을 주사하여 직접 환자의 생명을 끊는데 일차적 행위가 있는 경우를 말한다.)
짧은 생의 대가가 단지 참기 어려운 고통과 모욕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고귀한 자유 의지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우리 인간이 고귀하다면, 그것은 단지 뇌파가 움직이는 단백질 분자들의 조합만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과 감성으로 다른 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우리의 인간성을 말함인가?
우리는 이런 의문에 답할 수 없다.
생명이 소중한 것이 무조건 진리라면 케보키언 박사는 살인마이다.
하지만 생명보다 살아 있는 인간의 고귀함이 중요하다면 케보키언 박사는 고귀한 인본의 순교자이다.
그는 휴머니스트인가, 살인마인가?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낙태는 인간적인가, 비인간적인가?
강간 등 불건전한 성행위나 미성년자의 실수로 임신한 아이는 저주인가, 축복인가?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태아의 입장에서 사유가 가능할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산모는 자신의 아이를 선택해 낳을 권리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태어나면서부터 저주 받은 일생이 될 아이의 생존권이 우선하는가?
당신이 낙태 찬성론자이면 반대론자를 일축할 수 있는가?
반대로 낙태 반대론자이면 찬성론자를 살인자로 매도할 수 있으신가?
당신이 무슨 말을 하건, 위 두 문제는 선진 국가들의 뜨거운 감자이다.
냉철한 지성과 뜨거운 가슴을 가진 이들이 위의 문제를 논하는 자체가 우리는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함을 반증한다.
생명이 고귀하다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일진데, 생명을 끊는 일이 논란이 되다니.
낙태 찬성과 안락사 찬성-어떤 경우에라도 악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은 돌을 던지시라!
낙태 반대와 안락사 반대-어떤 경우라도 용납할 수 없다는 이가 먼저 돌을 던지시라!
그러할 제, 당신의 주장은 보편타당한가?
네 행위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 안에 있게 하라?
유명한 칸트의 말이다,
절대주의자였던 칸트는 너희 개인이 행위가 항상 누가 언제라도 시행할 수 있는 보편의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말하고 인간의 행위는 순수 이성 안에서는 항상 참임을 말한다.
그래서 안락사 찬성론자와 낙태론자들은 무조건 무죄일 것인가?
그러한 것이 이성이라면 나는 이성을 거부하리라!
그러한 이성은 관념의 노예이므로.
그리고 이것도 생각해 보셔야 할 것 같다.
칸트의 시대는 자살 밖에 없었다.
그 당대에는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살려 놓을 수 있는 의학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공호흡기로 고통 받는 환자를 칸트가 보고도 그런 주장을 하였을까?
칸트의 보편은 인공호흡기가 없는 세상의 보편이다.
그래서 그 말은 비판되어야 한다.
너는 가망이 없는 지독한 고통과 모욕이 끝없이 가해지는 가운데서도 그리 주장할 수 있느냐고!
너는 인간적 죽음과 생물학적 죽음을 두루 다 경험해 보아야 하느냐고!
인간은 보편 속에 있는가, 아니면 인간은 보편을 꿈꾸는가?
단지 남과 달라지는 것이 싫어서 보편 속에 있다면 인간은 슬픈 생명이다.
자신의 손아귀에 움켜쥔 진리
진리가 쉬울 것이라는 명제에 대해 말해보자.
진리가 쉽다는 말은 달콤하고 듣기 좋다.
하지만 그러하다면 과연 그러한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염화미소니, 성령의 영접함이니에 진리가 있다 말하고, 그 진리의 내용에 대하여는 침묵을 지키는 이들은 과연 득자들일 것인가?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노력 가운데 사실의 앞과 뒤를 따져 옳고 그른 명제에 대한 분별만이 우리에게 허용된 사실이라는 점이다.
진리가 쉽다는 말은 우리가 행위하여야 할 내용이 쉽다는 의미이지 그 사유 체계 자체의 단순함이나 논리의 가벼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은 단지 믿고, 아는 사람은 말하고, 진정 깨달은 사람은 실천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된다는 속담이나 격언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수 십 개씩 발견된다.
하지만 진정 거짓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아직 나는 그러한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선의의 거짓말이니 하는 변명은 그래서 존재한다.
인간이 진실만을 말하기엔 진실은 너무나 차가울 수 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진리는 어렵다.
그 사유는 여상스럽게 행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률도 제대로 실행할 수 없다.
우리의 도덕률을 실행하기 위한 명제는 쉬운 것이지만,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그 사유를 하는 과정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염화미소라는 말이 난무할 리 없지 않는가.
언어의 매트릭스
우리 인간이 단지 앞뒤의 문맥을 따지는 것이 그 사유능력의 한계라고 할 때 우리는 언어로 이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는 말을 미리 전제한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그 언어에 의하여 제한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당신의 눈앞에 사과 하나가 있다.
그것은 왜 사과인가?
당신은 그 사과를 본 일이 없다.
이 세상에, 완전히 동일한 두개의 사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하다면 당신의 눈앞에 있는 그 과일은 당신이 태어난 이후 처음 보는 과일이다.
그런데, 당신은 그 과일이 사과임을 보이기 위해 실험실로 달려가는가?
당신은 그것을 그냥 사과라고 말하고, 남들도 그것에 동의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태와 색상, 향기와 맛을 가진 과일을 사과라고 하자는 약속이 이미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개념화이다.
우리는 개념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산다.
내가 오늘 사과를 먹은 경험은 누구에게도 전해줄 수 없다.
그러한 사과는 단 둘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경험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인 그 사과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단지 말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관념화하고,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물 그자체로 이루어진 객관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는 언어로 이루어진 관념의 세계 안에서 산다.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언어로 이루어진 매트릭스 속이다.
불가지의 사유
이러한 논의는 종교에 접하면 가장 첨예화된다.
천국, 지옥, 성령, 방언, 은사 등등의 온갖가지의 매트릭스가 혼란을 유도한다.
천국이 금은보화로 치장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천국은 근심이 없는 낙원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지옥은 불구덩이이며, 구더기가 살아있기도 한다고 한다.
지옥은 고통만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