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4][속보-22세기 뉴스]기독교 박물관 개장!

[칼럼 2-4][속보-22세기 뉴스]기독교 박물관 개장!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다.


이 말은 시대적으로 근대로 구분되는 조선시대 유학자의 정신이다.


 당시 부처와 보살의 괴력난신을 믿고, 국가의 위기시마다 군자금 비축은 뒷전으로 밀어놓고 대규모 불사만 일삼던 고려 말엽의 불교 폐단을 시정하려는 당대 신지식인인 유학자들의 수고로운 노력이었다.


그 600년 후, 유학자들의 노력도 헛되이 기독교라는 괴력난신이 난무하는 것을 보아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유교의 유일한 업적도 빛이 바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근대를 이성과 합리, 중앙집권적 군주체제, 상비군, 중상주의로 정의 내린다면 조선조는 분명한 근대이다.


비록 전기는 중상주의적 사고가 약했지만, 육의전이 폐지되고 상평통보의 전국적 유통이 가능하며 보부상과 난전이 시장을 지배하던 조선 후대는 분명 근대 왕조적 성격을 띠고 있다.


아니, 한글의 보급으로 인한 문맹률 저하는 오히려 서구의 근대보다 더 좋은 점도 있을지 모른다.


오늘은 이 한글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까 한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민중의 요구


한글은 왜 창제되었을까?


그저 세종대왕이라는 걸출한 정치 지도자와 학자들의 상호 협력관계가 올바른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이 단지 “어린 백셩을 어여삐 너겨” 창제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높다.


우선 중국의 모화사상에 위배되므로 중국과의 많은 외교적 마찰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각종 자료를 연구하고 수입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규모의 국고가 소비되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글이 창제되기까지 있었던 많은 간난신고 가운데 국내의 보수적 유학자들과의 중화사상으로 인한 소모적인 정치 논쟁은 아직 이슈가 되고 있다.


국내적으로 보수 유학자 세력과의 알력과 국고 소비, 국제적으로 명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겪고 탄생된 한글이, 단지 지배 계급의 변덕스러운 동정심에 의해 창제되었다 말하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많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신진 학자들은 새로운 가설을 내어 놓는다.


즉, 한글 창제란 민중들을 지배하기 위해 최소한의 지식 체계를 만들지 않으면 지배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는 말이다.


한글 창제 후 곧바로 나온 용비어천가 같은 노래집을 보면 그 사실을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집현전 주도로 나온 도서는 요즘 말로 해서 국민 계몽용이고, 왕조 선전용인 것이 태반이다.


고려의 불교와는 달리 새로운 지배사상으로 등장한 유교 이념을 교육시키기 위해 “날로 쑤메 편키 하고자” 하는, 언어라는 새로운 도구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또한 의리가 강한 한국인의 정서상, 왕위 찬탈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전달 도구를 위해서도 한글 창제는 필연적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시대 변화에 따른 선택적 도그마


(*한 시대를 지배하는 지배적 사고를 일컫는 말로 통상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어차피 종교 이야기를 하는 중이고, 국가에 의해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주도된다는 점에서, 일반 민중에 반박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하므로 도그마라는 말로 대체합니다. 용어 이해에 차질 없으시길 바랍니다.)

 

신라시대의 신화를 읽어보면 왕은 출생부터가 남다르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아마 이해되실 것이다.


알에서 태어나느니, 신이 내려와서 잉태시켜 주느니, 태어나는 날 상서로운 구름이 노니느니 하는 각종의 신화들이 이에 접목된다.


그래서 신라시대 왕이 될 수 있는 계급을 “성골”과 “진골”이라는 말로 부른다.


뼈다귀에도 급수가 있다고나 할까?


진짜 뼈다귀와 성스러운 뼈다귀만 왕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라 시대를 무너뜨린 고려는 같은 방법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신이 내린 사람을 자신이 죽이고 왕위를 강제로 빼앗은 때문이다.


그래서 태조 왕건이 이용한 방법은 그 당시 수입되어 막 유행하던 풍수이다.


자신이 아버지를 어떠어떠한 곳에 모셨는데, 그 자리에 조상을 모시면 그 땅의 음덕이 모여 후손 중 왕이 될 것이 미리 하늘에 의해 점지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신라 시대의 방법보다는 훨씬 세련되었다.


신라 시대의 방법인, 내가 신이 내린 사람이니까 단순하게 그냥 믿으라고 하는 방법보다 원래 우주에는 이런 법칙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물론 같은 방법으로 왕이 되려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당대의 최고 풍수가인 국수를 가려 황실에서 단속하면 되니까 그 위험 수위를 조절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있다.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인 유교는 이것과도 다르다.


전대(중세시대인 고려)와 전전 대(고대시대인 신라)와는 완전히 차별되는 정치, 사회 이념적인 도그마인 유학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급인 것이다.


왕은 왕의 일을 하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백성은 백성답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우며 자식은 자식다운 정식 정치 이념을 가지고 사는 새로운 이념을 가지고 출발한 것이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야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어찌 없겠는가!


그러므로 태조의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왕통이 조작되고, 모든 권력의 주체는 왕실, 더 정확히는 종묘와 사직을 향해 집중된다.


여기서도 완전히 이성적인 경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국사인 무학 대사가 나오고 왕십리라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본질은 이러한 괴력난신의 전설 이야기가 아니고 충효라는 핵심사상을 가지고 정치를 하려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종교 가운데 일반적으로 유교가 공부하기는 가장 어렵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므로 핵심 사상을 공부하고 깨닫기 위해 수행하면 된다.


그 수행은 여타 종교보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는 귀의의 종교이므로 성령의 불로 세례 받고 영광 중, 주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교회에 십일조 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하지만 유교는 종교라기보다 하나의 학문 체계로 출발하여 공자 등의 성현을 제사지내는 종교적 행태 이외에는 모두 학문이다.


특히, 주자학은 인간의 도리와 우주의 질서에 대한 광범위한 철학적 체계를 다루는 학문이므로 그 난이도는 더하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현대를 제외하고, 모든 정치권력은 우민화 정책을 선호한다.


공자도 “백성이 너무 많이 아는 것도 병이다.”고 말한 바 있고, 君君臣臣民民(군군신신민민)이라는 말은 백성은 백성의 도리를 다하는 것으로 백성은 생업에 종사해야지 많이 아는 것은 백성답지 않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교화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만 주고 그 당대의 핵심 지식인 성리학에 대한 정보를 양반만이 공유하는, 정보 공개의 한도를 정하는 방법으로 한글 창제가 적격이지 않았을까?


(*참고로, 원래 공자의 군자는 정말 임금 될 자를 말한 것이다. 즉, 군은 군답고, 신은 신답고, 민은 민다운 이 세상에서 그 중심에 서는 군의 자질이 어떠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을 삐뚜로 보게 하는 도구-도그마


전술해 온 바, 우리는 생각을 하고 세상을 살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습관대로 산다.


우리 이전에 미리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


그 중 가치 있게 평가되는 것은 우리에게 교육이란 이름으로 주입되고, 우리는 여기에 근거하여 사물을 판단한다.


현대 문학가가 재구성한 흥부전을 본 일이 있다.


그 책에서 흥부는 가족계획에 실패한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묘사된다.


딴은 옳은 이야기이다.


가족을 부양할 방법도 없는데 누가 덜컥 결혼을 해서 아이를 한 다스나 낳으라고 하던가!


돈이 없는데도 돈 벌 궁리는 안하고 “공매나 맞아 볼까?”라고 하는 답답함에는 질릴 지경이 아닌가!


형에게 붙어살며 분가할 생각도 하지 않는 점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점을 꼽으라면 대책 없이 착한 것 하나일까?


그러나 이것은 현대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근대의 사고방식으로는 놀부가 너무한 것이 옳다.


착한 사람은 무조건 성공해야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 아닌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성공해야 한다는 현대의 사고와는 많이 틀리다.


흔히 듣는 “그...사람은 좋은데 말이야...” 뒤에 생략되는 말이 무엇일까?


“눈치가 없어.”, “업무 능력이 모자라.”같은 말이 아니겠는가.


참새가 보화가 든 박씨를 주지 않으면 먹고 살 수도 없는 그런 대책 없고, 능력 없는 인간상이 바로 흥부고, 일찍 일어나 먹이를 먼저 찾는 부지런한 인간상이 놀부다.


최소한 현대적인 감각으로는 말이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콩쥐 엄마가 이해된다.

 

그 토록이나 못 생기고 뚱뚱했다면 누구나 가슴에 한이 맺힐 만 하다.


더욱이 제 딸도 아닌 팥쥐는 그렇게나 아름답고, 남편은 아름다운 팥쥐를 보며 역시 아름다웠던 옛 마누라를 못 잊어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현대적인 감성으로는 못 생겨 자살도 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는가.


그 당시에 성형 수술이 있었더라면, 지방 흡입술이 있었더라면 콩쥐 엄마는 자기 무덤을 파지 않아도 행복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조선왕조 시대와 지금의 도그마 차이이다.


우리가 정상이라는 말은 지금 당대에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가치가 지금에 와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가치임에 분명하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점이야 만국 전시대 공통이지만, 현대의 가치는 맨손으로 시작해 거대한 부를 쌓아올린 빌 게이츠이지, 참새 박씨 복권에 당첨되어 비루한 부를 쌓은 흥부가 아니다.


최소한 현대인은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는 그 중심에는 자기가 있어야 한다.


지나간 시간의 유물


합리주의에 찌들은 각박한 현대인이라 평하면 할 말 없지만, 나는 신의 아들이니 믿으라는 이야기는 신라시대의 유물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최소한 주역을 땅과 하늘에 비유하여 만든 풍수가 훨씬 낫지 아니한가!


만물은 음과 양이 조화되어야 하므로 집을 지을 때도 땅의 좋은 지기를 받아야 하고 그만큼 빛이 들어오는 뜰(명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은 종종 현대 건축에도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최소한 한국의 집은 마당(즉, 빛이 들어오는 명당)이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중세적 가치보다 훨씬 뒤떨어진 도그마를 믿는 이들이 있다.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미신이 바로 그것이다.


박혁거세 신화에서, 나는 알에서 태어났으니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문자 그대로 고집하는 이들이 있다.


그냥 믿기만 하면 좋은데 이것을 남에게 강요하여 우리 사회를 신라시대로 퇴보시키려 하는 집단이 존재한다.


바로 기독교라고 하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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