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3]문화 비평 1

[칼럼 2-3]문화 비평 1

김장한 0 2,972 2004.10.06 05:17
 

문화적 편견

-개고기 식육, 스포츠 낚시, 고래 식육의 문제


  월드컵 개최 준비가 한창이던 때,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를 필두로 한 일단의 동물 애호가들이 우리나라의 개고기 식육 문제를 들고 나온 일을 기억하실 것이다.


생각해 보시라.


파리 시에서만 매년 천 마리 이상의 개들이 안락사로 “살해”된다.


 선진국들의 주요 도시는 개똥이나 고양이 똥이 도시의 주요 환경 문제로 대두된 지 이미 오래이다.


개를 식용으로 잡으면 동물 학대이고 안락사 시키면 동물 보호인 것인가?


개는 영리한 동물이므로 먹어서는 안 된다, 개 이외에도 먹을 것은 많이 있다, 개는 인간의 친구이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 이 운동이 동물 애호 운동이라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편협한 종교임을 아실 것이다.


  이러한 예는 또 있다.


 우리나라의 스포츠 낚시 애호가들은 손맛이 좋다며 미국 산의 검은 송어를 대량으로 수입 해다 방류해 놓았다.


그들의 주장은 송어를 낚은 후 다시 놓아 주므로 인간과 물고기는 스포츠만 즐기고 살생은 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동물 보호 자연 보호라고 말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가짜 미끼에 속아서 이리저리 내팽겨 쳐지는 송어의 입장에서 말이다.


게다가 그 검은 송어는 우리나라의 토착종이 아니므로 우리나라 토착종의 물고기를 먹고 천적이 없으므로 마구 번식하여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먹기 위해 낚시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먹지도 않을 물고기를 손맛이 좋다면서 잔인하게 즐겨놓고는 그것이 자연 보호인양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고래 식육 문제로 몇 십 년째 진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알아보면, 북극 참고래 등 일부의 종을 제외하면 고래는 멸종 위기의 동물이 아니며 오히려 고래 단체의 과잉보호로 인해 그 수가 과다하게 늘었다는 보고도 심심찮게 나오는 것이 바로 고래이다.


하지만 일본은 최근까지도 고래 보호라는 명분 아래 정식 포경을 실시하지 못하고 있다.


고래는 멸종위기의 동물이 아닌데도 고래는 인간 다음으로 영리한 생물이라느니, 고래는 인간의 친구라느니 하는 말로 포경을 반대하는 이들의 정체는 사실 환경 보호론 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직업 선동가라고 해야 격에 맞을 것이다.


 비과학적이고 맹신적인 이들이 고래보호라는 명목 하에 저지른 일의 태반은 “일본을 두들기는” 인종 차별이었을 따름이다.


한국의 특이한 문화적 형태

-개고기 식육의 양태에서 추론한 한국인의 미학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혹시 보신탕이나 수육을 드신 적 있는 분들이신가?


 드시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보시기는 하였을 것이다.


나는 보신탕이 우리나라 음식 중 예외에 속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음식으로 생각한다.


 생각해 보시면 쉬울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떤 음식이 생강 채를 초고추장에 섞어서 먹게 되어있던가?


국물이나 초고추장에 들깨를 대량으로 섞는 조리법을 무슨 요리에 적용하던가?


 아마 있다하더라도 대중적인 음식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돼지고기나 쇠고기를 이런 식으로 조리해서 먹지 않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갈비구이나 불고기를 떠올리신다면 개고기 요리법이 왜 신기한 현상인지 이해가 되실 것이다.


  하지만 이 음식은 너무도 한국적인 음식임은 분명하다.


한국인의 미적 감각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갈비를 양념한다 해도 간장, 소금, 후추, 간 사과, 마늘, 정종, 미림, 매실 즙, 채 썬 배, 양파, 파 등등을 넣어 버무리며 먹을 때도 상추, 쑥갓 등 생야채로 싸고, 양념된장과 마늘, 김치를 넣고, 고기는 따로 양념장에 찍어 함께 쌈을 싸 먹는다.


단순해 보이는 고기 요리이지만 요리 과정과 먹는 방법이 복잡하고 어렵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갖은 향과 맛이 첨가된다.


우리의 개고기 요리법은 위의 과정을 충실하게 지킨다.


 다만 양념하는 야채와 향채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누린내가 나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맛있게 먹을 수 없는 개를 이렇게 맛있게 만든 것은 수 천 년을 개를 먹어 온 우리 민족의 지혜이다.


 그리고 이 조리법은 단순하고 지루한 맛을 견디지 못해 하는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에도 잘 들어맞아 지금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이렇게 모인 조상들의 지혜-그리고 그 결실을 문화라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이 개고기 식육에 혐오감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식탁에 개가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눈에 고래가 맛있는 음식으로 보이지 아니한 것은 먹거리를 찾는 그들의 눈에 고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함으로 문화는 서로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고 그 자신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하며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나는 문화를 이렇게 생각한다.


  위에서 든 예처럼, 우리 눈에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문화도 사실은 수 백 년, 수 천 년이 걸린 문화의 결실이다.


몇 년 전 국제 엑스포 행사에 참석한 기자가 “온갖 인종이 모인 곳에서 한국인을 찾는 법”이란 수기를 읽고 웃었던 적이 있다.


그 기자가 말한 방법이란, 식당에서 카레가 나왔을 때, 카레를 그냥 국물과 함께 뜨는 사람은 외국인이고 먹기 전에 카레와 밥을 비비는 사람은 한국인이라는 이야기를 읽고 그 가자의 재치에 감탄했었다.


우리의 식탁에는 비빔밥이 있다.


그 정신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이런 곳에서 결정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인을 구분하는 방법이 바로 뒷짐을 지고 팔자걸음을 걷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문화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해 주는 잣대이다.


우리가 세계 어디에 있건 우리의 문화를 가지면 우리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문화는 우리의 자부심이다.


 수 천 년 모진 역사 속에서도 나를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의 발자취 그 자체인 것이다.


 당신이 인식하든 그러하지 아니하든 당신은 우리의 문화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걷고, 먹는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 문화에 의해 지배되며 그 사실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 사고방식조차 문화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금, 강대국을 중심으로 세계화 열풍이 한창이다.


우리가 인정하건 그러하지 아니하건 끌려갈 수밖에 없는 문화 전쟁이 한창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장하는 바, 민족적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이 거대한 흐름 속에 함몰되고 침묵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창조는 파괴보다 어렵다


  문화는 그 저변에 무수한 세월이 있다.


즉, 세월의 힘으로 완성된 것이 바로 문화라는 것이다.


음식 이야기를 계속 해 왔으니 또 음식이야기로 이어나가자면, 한 가정의 손맛이라는 것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정성껏 이어져 왔다.


그 며느리도 자신의 가정이 가진 맛이 있으므로 새로운 가정의 맛은 자신의 친정과 시댁의 맛이 더해져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며느리의 딸이 분가하면 또다시 새로운 맛이 생겨나리라.


우리의 미각 전통은 이러한 과정을 수 백 번이나 거쳐서 완성된 것이다.


자기 집의 장 담그는 핵심 비법은 며느리에게도 잘 말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때때로 장을 담그거나 초장을 갤 때 사이다나 콜라를 넣는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콜라 등의 탄산음료가 들어온 지 고작 수 십 년. 우리 어머니들은 어떻게 하여 이러한 지식을 깨우치시게 되었을까?


 문화의 변화 양상을 직접 목도하면서도 그저 놀랍고 신비하기만 한데.


  문화란 이러하듯 무구한 세월의 힘과 당대의 모든 이들의 노력과 정성이 있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문화 파괴는 쉽다.


단 한 세대만 건너뛰면 절대로 문화는 전수되지 않는다.


 그 가정의 미각 전통은 파괴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여 보시라.


국가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자면 우리는 밀, 보리 등 쌀 이외의 곡물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여기에 쌀 시장이 개방되어 우리 아이들이 캘리포니아 레스토랑에서 수입 쌀밥을 먹으면서 그 밥이 정말 맛있다 생각한다면 우리의 미각 전통은 파괴 완료되는 것이다.


 곡물 수입이 이루어진 지 고작 한 세대. 세계적 변화이니 저항할 수는 없지만, 식문화 파괴를 두고 여러 사람이 오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와 문화


  이 문제를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재조명해야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불교는 우리 사회에 편입되어 우리 문화의 일부가 된지 150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최소한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비교 평가된 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불교는 의상 대사 등과 같은 유학파 고승들의 노력으로 한국형 불교의 이론이 정립되었고 원효 대사와 같은 국내파 고승들에 의하여 민간전승이 가능해 졌다.


이들이 심은 씨앗은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명대사와 같이 “나라가 없으면 부처도 없다.”는 대승적 호국 불교로 그 꽃을 맺게 된다.


우리가 불교에 막연한 동경을 품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기 때마다 일어선 승병들의 노고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념 체계에 불교가 있든, 없든 우리는 이래서 우리나라를 지켜준 한 축인 불교에 감사한다.


그리고 불교문화는 우리나라 문화의 정수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 왕조 600년을 제외하면 신라시대부터 우리의 생활과 정신을 지배한 것은 불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념적으로나마 불교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뛰어난 문물을 외국인에게 보여준다고 가정해 보라.


 조선시대의 궁전들을 제외하고는 다 사찰이 아니던가?


우리의 문화사에 불교를 거세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녹아 있는 사상이므로.


하지만 기독교는 아직 우리나라에 깊이 있게 스며든 사상이 아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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