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1]시대 정신과 종교

[칼럼 2-1]시대 정신과 종교

 

  디지털 혁명


  정보가 두 배로 늘어나는 기간을 측정한다면?

지난 수백 년 간의 정보 지수를 알기 위해 그것을 분석한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결론은? 정보가 두 배가 되는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현상을 발견한다.
 
즉, 정보란 자기 복제 내지는 어떤 유기체적 성격이 있어서 정보가 모이면 기하급수적으로 그 양이 늘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800년 전, 정보가 그 당시의 2배가 되는데 400년이 걸렸다면 그 시점에서 정보가 2배가 되는 데는 200년, 그다음은 100년, 50년 25년 13년 7년...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컴퓨터의 메모리가 2배로 늘어나는 시기가 점점 반주기가 되어간다는 현상과 상당히 유사하다. 정말 정보도 유기체적인 성향이 있는 것일까?


지난 10년은 정보를 디지털화하여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 찬 시도가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즉, 정보 자체는 변화가 없지만, 그 정보 자체를 저장, 운반, 가공하는 방법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이다.

다는 아니지만 이제 보통사람들도 고급 정보에 엑세스하여 그 정보의 리소스들을 볼 수 있게 된 시대가 온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의 시대가 열렸다고 사람들이 환호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가지는 완전한 익명성 때문에 야기되는 각종의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는 했지만, 반면에 말 하지 못하고 숨어있던 인간의 “말 하고자 하는 욕구”가 폭발한 것이다.
 
지금 넷 상에서 벌어지는 각종 아비규환은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던 욕구다. 새삼스레 놀랄 것은 없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인간성 그 자체이므로.


광고에 나타난 시대정신


  산업화가 한창이던 1920년대 미국의 냉장고나 텔레비전 광고를 보신 적 있는지?

넓고 우아하게 장식된 공간에 수십 대의 기기가 있다. 젊고 잘 생긴 신사와 유명 여배우는 이 기기들 사이로 우아한 춤을 추며 지나간다.

이러한 광고들은 우리 소비자로 하여금, 이 기기는 어느 가정에서라도 쓰이는 기구이니, 이것을 당신도 사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재고처리가 문제시되던 1930년대의 광고는 한 패러그래프의 제품 사용 설명서를 듣는 기분이다.

이러한 경향의 광고는 지금 우리는 홈 쇼핑 등의 중간 광고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 광고는 이러이러한 점이 좋으니 이 상품을 사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면 지금의 광고는 어떠한가? “난 나야”, “내가 왜?” 등 짧고 간결한 말로 정보를 전한다.

그 정보의 내용은 이 상품이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나”이기 때문에 이 상품을 쓰겠다는 결론이다.
 
나이기에 이 상품을 쓴다? 논리적으로 매치가 되시는지? 이러한 광고들은 이 상품의 느낌과 이미지가 젊고 도전적인 당신에게 잘 맞을 수 있다는 메시지만 전할 뿐이다.
 
1900년대 초반의 미국 광고와 비교하여 보시라. 얼마나 다른지.


이러한 차이들은 그냥 텍스트나 기업 성격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시대정신의 차이이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신 분이 있으면 20세기 초 미국의 광고들이 이해되셨을 거라 생각된다.

즉, 단일화, 획일화, 중앙 집권, 이성적인 판단 등의 사고가 지배하던 시기의 패러다임이 그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20세기 말이나 21세기 초의 광고들은 어떠한가? 감성적, 비이성적, 권력 분산, 개인주의, 다원화 등의 사고가 이 광고들에 녹아들어가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거의 모든 제품이 어느 정도 높은 수준으로 상향 평준화되지 않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시대정신이 변했다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성인이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핸드폰은 그 자체기능에 거의 카메라가 달려 있다.
 
왜 카메라가 달려 있을까? 이해되시는가? 요즘은 차라리 카메라도 없이 전화만 되는 폰은 구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어차피 화상전화가 불가능한 이 시점에서 카메라가 달리는 폰은 의미가 없을 것인데 말이다. 이러한 경향을 보고 조만간 우리 인간은 핸드폰 크기의 단말기를 노트북처럼 가지고 다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것이 짐작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트렌드이다. 즉, 정보를 단말하는 기능들이 국가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개인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


  이와 같은 현상에 발맞추어 세계의 종교 지도가 크게 변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세계적인 기독교의 몰락과 선종 계열 불교의 부흥이다.

이 시대정신을 이해한다면 누구나 이해할 법한 일이다. 즉, 거대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고, 도그마 해석이 거의 완료상태 내지는 소강상태에 머물러 답보만 반복하고 있는 기독교가 이제 힘을 잃는 것이다.

간단한 예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황청이 진화론이 일리가 있는 이론이며 창조론은 바이블 이외에 근거가 없음을 인정한 시기가 언제였던가?
 
교황청은 십자군 원정과 마녀 사냥과 관련하여 사과 성명을 발표했지만, 대체 언제적 일을 지금 사죄한다는 것인가?
 
그나마 지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했지만, 관련자는 물론 그 가족까지 모두 죽은 지금 이 시점에서의 사죄란 의미는 있지만 가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도그마의 해석이 완료된 기독교의 보수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기독교의 진리는 바이블이라는 텍스트 내에 존재하고 그 텍스트의 해석이 완료됨으로 인해서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교리와 해석을 융통성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과학 연구 하나에도 교리가 상충되는 것을 느끼고, 기독교 정신으로 저지른 일이 사실은 독단과 맹종으로 이루어진 잘 못된 행위임이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불교-특히 선종 계열은 자기 성찰을 주로 하는 교단이다.

교리라고 어찌 없을까 만은 그 교리는 자신의 깨달음만 못하다.

오죽하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까지 칭해지겠는가!

특히 불교는 명상과 호흡을 강조함으로써 친환경의 욕구가 있는 현대인의 종교 외적 요구에 들어맞는 것이다.

거기다 불교가 왕성한 중국이나 한국, 태국, 일본 등의 국가는 거의 사찰이 산 속에 위치함으로 인해 그 친환경적 면모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사실 늘어가는 서구의 불교 열풍도 알고 보면 명상 열풍에 자연욕 열풍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불교의 경우 믿을 것을 강요하지 않으며, 친환경적이고, 명상을 통해 지친 현대인의 심신을 씻어주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선종의 경우 깨달음은 선문답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 선문답의 경우, 인생과 철학에 관한 내용으로 크게 과학과 배치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은 사람이 사흘 만에 살아나서 너희 죄가 다 사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현대인은 어쩌면 기득권 종교 가운데서 굳이 선종을 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종교와 시대정신


종교가 하나의 사고체계이면, 시대정신은 패러다임이다. 종교도 가장 강대한 신념체계이지만 패러다임도 타협이 없는, 개종만을 원하는 완고한 사고 체계이다.
 
다만 종교적 신념 체계는 동시대에 혼재하여 있지만 패러다임은 동시대에 거의 동일한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심각한 세대간 갈등이 벌어지고는 한다. 보통 아주 보수적인 어른들은 자기 생각만이 옳으며, 자신의 자녀들은 주변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자기 생각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내 자녀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친다. 하지만 큰 착각이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자는 부엌에 들어가 밥이나 해야 되고 남자는 천하 대의를 위해 일해야 된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의 아들이나 딸은 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완고한 어른들은 많이 보았지만,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동년배는 전혀 본 적이 없다.

우리 사회를 가장 아프게 하는 이 세대간 갈등은 그대로 종교지도에도 반영된다.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 기독교인이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이제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집안은 기독교를 몇 대 째 믿어왔으므로 너도 당연히 믿어야 된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세대에 적합지 못하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집안과 나를 절실하게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싫으면 교회를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바이블은 우리 시대의 진실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

남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라?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인간은 진화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신이 바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라?

믿으면 용서된다?
 
구하면 구해진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어느 구석에 바이블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가 발견되는가?


 현대인은 적극적인 세대이다.
 
이제 회사에서 돌아와서 파김치가 되어 반주 한 잔 하고 잠이나 청하는 게으른 직장인은 발견하기도 힘들다.

적극적으로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땀을 바가지로 쏟아내는 것이라 해도 취미 생활에 온 몸을 내맡기는 것이 바로 현대인이다.
 
이러한 보통 현대인들에게 가족에게 봉사하고 취미생활을 즐겨야 하는 일요일에 교회를 나가 목사가 주도하는 따분한 설교나 듣고 있는 종교 활동이 현대인에 의해 스스로 거부되는 이 현상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기독교의 미래


  어느 역사학자는 역사 소명설을 말한 바 있다.
 
즉 역사는 인물을 택하여 그 인물로 하여금 역사를 주도하게 만들고 다른 역사를 취하고자 할 때는 이를 버린다는 것이다.

그럼 이 주체가 되는 역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시대의 민중들, 그리고 문화다.
 
그러하다면 이 역사라는 주체(즉, 민중과 문화)가 어떤 시대정신도 택하고 버린다고 생각해 보라.

이성 중심의 철학 사조가 발달한 근대 유럽과 비이성적, 감성적, 개인적 철학을 말하는 현대를 한 번 비교해 보라. 그러면 그 차이는 자명해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필요한 종교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는 무지한 중세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도그마다. 집단을 강조하는 교리, 의심하지 않고 따를 것을 명하는 교리 등, 획일화되고 미분화된 사회의 통합을 주창하는 도그마로써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직업 소명설 등은 나름대로 근대 중상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의의가 있는 도그마이기는 했다.
 
중세의 침묵이 향후 수백 년간 이어지는 유럽 중심의 세계 권력구도를 만든 사상의 기저에는 중상주의가 있었고, 중상주의의 기저에는 직업 소명설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도그마임에는 틀림없다. 각종 사회 문제를 일으키고 가정 해체를 주도하는 낡은 시대의 낡은 도그마인 것이다.

이 도그마는 개별화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도그마가 되기에는 너무도 미련하고 너무도 맹목적이다.

무지하고 투박한 중세인의 도그마이다. 서구 중세는 기독교의 발흥과 더불어 열리고 기독교의 쇠락과 동시에 망한다.


  이제 기독교는 어떠한 길을 걸을까? 기독교는 노쇠하여 더 이상의 적극적인 변화를 이루기가 힘들다.
 
아마도 지금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양로원화 되어가다가 결국은 이 세대의 몰락과 함께 무덤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비과학적, 반사회적, 반민족적, 반주지적인 교리와 교회의 행태를 볼 때, 이것이 거의 정답에 가까운 미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도 유명 목회자가 비리를 저지르면 교단에서는 옹호성명을 내고 학생들은 비난 성명을 낸다.

신도들과 사회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는커녕 사고 뒷수습을 하는 데만도 진땀을 흘리는 우리의 교회 풍경이 너무도 삭막하다.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의 처벌이 어려워 신학대학에서 성교육 관련 성명이 나오는 현실. 희곡이라 해도 이러한 현실은 아마 쓰지 않으리라. 관객이 너무 어이없어 웃지도 못할 일이므로.


새 술을 새 부대에


  혹자는 기독교가 붕괴되면 그 후는 어찌하겠느냐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포스트 기독교가 존재해야 하는가?

기독교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벽 너머의 세계를 우리는 모른다, 그리고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원래  인간 세상이란 것은 온갖 이권과 논리가 서로 부딪혀  상처 입히는 각축장이 아니었는가? 

다만 상처 입히기 위한 칼을 가진 도그마의 기독교를 우리는 경계하는 것이다. 슬퍼할 이유도 유감스러운 사실도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새천년이 온 지도 수년이 흘렀다.
 
예상했던 바처럼, 예수는 오지 않았다.
 
첨단 디지털 시대가 개막되었다.

하지만 기독교는 중세 때 담근 신 포도주를 이 신시대에 담으려 한다.
 
이에 나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또 이를 남에게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갈라질 것도, 더 이상 증오할 상대도 없는 이 탈 이데올로기 시대, 개인주의의 지평에 서서.



[이 게시물은 (ㅡ.ㅡ)님에 의해 2004-09-29 09:16:15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복사됨]

Comments

용가리 2004.09.25 10:36
휘리릭~~나이스~~~
신승문 2004.09.25 08:35
좋은글 정말 감사드리고,
한글 파일 정말 고맙습니다.
Asimov 2004.09.25 07:45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어쩜 이렇게 잘 정리하실 수 있으신가요? 부럽...
KiKi 2004.09.25 01:58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004.09.25 01:47
Very Good ^^
도무지 2004.09.25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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