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인간
당신은 오늘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가?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는 매콤한 고등어조림?
두툼한 돼지고기를 잘라 끼운 근사한 커틀릿?
존득한 버섯들로 다시 국물을 낸 얼큰한 된장찌개?
산뜻한 맛이 일품인 시금치?
새콤한 김치를 잔뜩 얹은, 뜨거운 김이 오르는 쌀밥?
무엇을 먹었던 상관없이 당신은 오늘도 힘겹게 살고 있으며 내일을 향해 후손은 낳으려는 가련한 생물을 죽인 것이다.
저녁을 들며 죄책감을 느끼셨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눈앞에 놓인 쌀밥의 눈물을 볼 수 있는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들으셔야 한다.
쌀의 통곡을…….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는 한다.
식물을 먹는 것이 뭐 잘못이냐고.
그러하다면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는 행위는 잘못되었는가?
돼지는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도살되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만 맹그로브 숲은 자기 종족의 멸종에도 말 한마디 못한다.
맹그로브의 울음을 듣지 못하는 메마른 가슴의 인간이 열대 우림을 도살하였고, 범지구적인 탄산가스 문제를 야기했다.
맹그로브의 울음을 들은 지구가 지구의 자녀인 맹그로브의 복수를 해준 거라고 말하면 나도 지구교의 광신도가 되는 것일까?
협박에 굴복한 인간성
맞다.
우리 인간은 단 하루도 다른 생물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슬픈 생명이다.
불가에서는 이것을 업이라고 부른다.
모태를 찢고 나와 단 한 순간도 죄를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자체가 비극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나아가 생명의 본질이요,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는 나는 순간부터 다른 생명을 해치고 살기는 하나, 죽음으로 우리를 돌려준다.
윤동주 시인의 시처럼, 내 무덤에도 자랑스레 풀들이 자랄 것이고, 동물들이 이 풀을 먹음으로 우리는 순환된다.
인간은 나는 순간 죄를 짓겠고, 죽는 순간 사해지리라.
단 한번도 멈춘 적 없는 대자연의 순환에 우리를 던져 넣음으로.
나는 오늘 저녁에도 맛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내 혀를 즐겁게 할 풍성한 식단에 감사하고, 나를 위해 육보시를 해준 그들을 위해 깨끗이 그릇을 비운다.
언젠가 쌀이, 쑥이 나의 육보시를 하고 그들의 풍성한 식탁에 감사할 미래를 생각하며.
그 때도 나는 정죄되어야 하는가?
내가 알지도 못하고 나의 순환에 끼지도 않은 아담과 하와가 과일을 먹은 죄로 인해?
허구의 죄악
여호와가 자신의 과일 동산을 잘 못 관리하매 인간은 죄를 지었으며 그것을 인류가 평생 지어야 한다면 나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저주하리라.
그는 인간이 뛰노는 들에 왜 뱀을 풀어 인간을 실족케 하였는가?
왜 인간이 뛰노는 들에 먹어서는 안 되는 죄의 열매를 심어 놓았는가?
여호와가 누구인지 공부할수록 모호해 지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는 보호의무(duty do care)라는 법적 조항을 논해 보지 않은 미개한 신임은 분명하다.
(보호의무(duty do care)를 소홀히 하고 그에 따르는 피해(resultant damage)가 있으면 위법행위(breach of duty : 의무 태만 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피해 발생 억지를 소홀히 함으로 일어나는 위법행위, 즉 태만을 말함)가 성립한다.)
인간이 어버이의 명을 어긴 죄가 그 토록이나 중하다면 그는 자신의 정원에 최소한 죄의 열매와 뱀을 풀어서는 아니 되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인간이 실족하였다면 그는 인간을 가르치고 사랑하여야 옳을 것이다.
예수도 말하였다. 자녀의 것을 들어 개에게 줌이 옳지 아니하다고.
그럼 사랑하는 자녀를 사랑하여 지옥에 넣고 때려죽임은 옳다는 것인가!
기독인들이여, 무지한 너희가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인가, 매저키즘인가!
무지한 양을 들어 협박하라?
양치기가 양을 보고 그를 협박하며 회개할 것을 명한다.
양은 유순한 눈망울을 동글 거리며 양치기가 왜 화가 났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이 가여운 양은 왜 그가 화내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양치기는 화난 가운데서도 비유를 들어 “들을 귀” 있는 양만 알도록 설명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아는 죄가 없고, 신은 들리지 않는 말을 하였으니, 이 땅의 기독교가 무려 25000을 헤아림은 여호와의 은혜일 것인가?
후손이 모래알처럼 많아짐을 축복하였으니, 이 땅의 기독교도 역시 모래알을 셈과 같아지도다.
복되고도 복된가?
정말 유감스러운 것은 비유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의 말을 알지 못하는 양에게 말로 설명을 한 그 멍청한 양치기이다.
이로써, 양치기는 그다지 지능 높지 않은 이도 할 수 있는 일임이 증명되었으니 차라리 그건 다행이라 말해야 옳을까?
아니면 무조건 죽어가는 시늉만 하면 화를 내지 않는 양치기의 편파에 감사해야 옳을까?
하지만 나는 주님의 품 안에 들어온 그 불쌍한 양을 내쫓은 무능한 목자를 보고는 호곡하리라.
나는 목자의 방언을 들을 귀 없는 평범하고 유순한 양이기에.
내가 그토록 잘못했는가!
평범한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양인 것이?
애초에 못 알아듣도록 만들어진 양치기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
양치기 예수가 말하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 치라 하였으니 나에게도 돌을 들어 칠 수 있는 똑똑한 양이 있는가!
돌을 들어 나를 치고, 돌을 들어 치라는 부분은 비유가 아님을 말 할 수 있는 양에게 묻노니, 왜 당신들은 들을 귀 있는 양이었으매, 들었던 비유의 해석이 그렇게도 다른가?
허구의 죄악사
한번은 풍수를 공부해 본 일이 있었다.
풍수는 친환경적 설계 개념으로 오히려 서구에서 그 연구가 많이 진척되고 있는 학문이다.
이 때 놀란 것이, 풍수가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자신의 공부가 부족해, 남의 집에 우환을 끼칠까봐 자신의 공부를 남에게 날 알리지도 않고, 남의 음택이나 양택을 골라주지도 않는다.
대개의 풍수쟁이는 평생을 공부하여 자신의 묘 자리 하나만 보고는 세상을 뜬다.
나에게 풍수를 조금 가르친 그 선생은 열흘간이나 찾아가서 막걸리로 취하게 만든 후에야 단편적인 몇 마디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이 술을 깨셔서 하신 말에 나는 정말 당황했다.
자신이 말한 것은 자신이 “공부한 것에 불과”하니 제발 “잊어 달라”는 그 말 한 마디. 그렇게 공부 많이 하신 분도 자신은 무지하므로 자신의 공부가 남에게 폐가 될까 두려워하는 태도를 보고, 나는 내 공부를 반성하게 되었다.
너는 너 자신에게 그렇게 자신이 있는가라고.
뭔가 아는 사람이 볼까 두려워 밤을 새워 보았느냐고, 너의 지식이 잘못되어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그 분의 태도가 나를 반성하게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 혹시 타협을 원하는가?
기약 없는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지만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단 한 번 타협을 위해 내민 손을 잡았을 뿐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네와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일까?
우리의 타협은 아직 들통 나지 않았고 그들의 타협은 이미 발각된 사실이라는 점만이 다르다.
흔히 수사관들이 하는 이야기가 “모든 이는 범죄자이거나 잠재적 범죄자”이며, “모든 일들이 모든 이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궤를 달리 하는 말이지만, 죄를 지어야만 생명이 성립하는 세계 그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를 믿으면 용서되고 그러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 된다는 정말 알 수 없는 기독인들.
부흥회 한 번 가서 “성령 내림”이라는 빙의성 트랜스 현상을 한 번 체험하고는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말하는 당신들.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없겠거든, 침묵하라.
인간은 업에서 벗어나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포도를, 쇠고기를 먹는 것은 허락되었다고 말하는 기독인들. 부탁이니, 입을 다물어 달라. 그리하면, 누구도 당신네들이 그토록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를 터이니.
오늘도 열심히 다른 생명을 죽였던 기독교인인 당신, 그러나 그 업은 여호와가 주신 권리 이므로 무시하고 다른 죄를 열심히 지어 죄 사함 받겠다는 당신.
제발, 우리는 그냥 두어 달라. 우리는 우리의 죽음과 삶을 거대한 대자연의 순환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삶을, 인정하지 아니하신다면, 부디 침묵이나 하시옵소서.
인간은 죄를 짓고 삶이 너무도 타당하다.
하지만 죽음으로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생명을 죽여 오늘을 살았으매, 그건 여호와가 인정한 부분이므로 먹어도 상관없다는 그 무지한 태도에는 더 이상 할 실망조차 없다.
아담의 죄는 유전되는가?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는 아직도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가?
카인은 여호와에게 정죄 받은 후 다른 도시로 떠난다.
그럼, 다른 도시에서 태어난, 아담의 후손이 아닌 이들의 원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 점에서 우리는 확언할 수 있다.
여호와는 사막 유목민의 후예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그들이 믿는 원죄는 다만 그들 자신에게만 국한되며, 그것도 단지 그들 자신의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만약, 사막 어느 나라에서 곰을 수입하여, 쑥과 마늘을 먹이고 인간을 만들려 한다면 우리는 실컷 비웃어 주리라. 그 무지를.
만약 동방의 어느 나라에서 사막신이 죽었다 다시 산 날을 기리면 우리는 비웃어 주리라.
“남의 눈에 든 티”를 너무도 잘 보는 “눈에 들보가 든 자”들을.
같은 하늘의 신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상에 내려 보내 신이 되게 한 환웅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려 노력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요, 자애가 아니겠는가?
환웅은 인간이 노는 들에다 뱀을 풀어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노자의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놀랄 정도로 공평하고 정당한 노자의 하느님은 그저 인간을 따스한 눈으로 보고만 계실 뿐, 자기를 모독한다고 하여 인간을 몇 천년 간 죄에서 허덕이는 것을 보는 신이 아니요, 인간이 보는 앞에서 부활 쇼를 펼쳐야 되는 신이 아니다.
그는 그 자체로, 우주고 질서이며, 그 자신이 곧 도이기 때문이다.
죽어 다시 살아나는 신은 무능하리라. 이 우주는 그에게 빗겨서 있으니.
영원을 사는 신은 부정하리라. 그는 영원히 죽어있음이니.
자녀의 허물을 자녀에게 씌우는 신은 사악하리라. 그는 태만함이니.
자녀에게 비유로만 말 하는 신은 무지하리라. 그는 이기적이니.
그리고 황금의 우상을 쫓는 기독교인들이여, 언젠가 황금에서 나는 비린 금속 냄새에 코를 찌뿌릴 날이 오리니, 모든 것은 무지하고 무능한 여호와와 이기적인 예수의 허물이라...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죽었다던 예수. 그를 이제는 묻으라.
원죄 때문에 고민하시는가?
당신은 아담의 자손이 아니고 단군의 후예이므로 아담이 저지른 죄는 무시하라.
다만, 당신은 오늘 당신의 앞에 놓여진 식탁의, 육보시를 감사하라.
모든 생물을, 이 모든 자연을 사랑하여 침묵하시는 노자의 하느님을 생각하며, 당신도 언젠가 다른 생명체(아마도 식물이 되리라. 아니면 곤충들일 수도 있겠고)의 식탁에 당신의 죽은 육을 보시할 그날이 오리라는 것은 잊어도 된다.
당신이 그것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이 거대한 흐름은 한 번도 부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
저녁 맛있게 드세요.
짝짝짝----->>>
성녀님은요, 바이블과 예수의 말도 일축하는 사람입니다.ㅋㅋㅋ그러니 조심하지 않음 지옥가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ㅋ
저질 저능한 예수보다 성녀님을 미더야 천국가는 게 아닐까요?ㅋㅋㅋemoticon_024
주장하고 싶은 바 있으면 글로 올리세요. 글로 올리면 무식이 다 탄로나니까 어쩔 수 없기야 하겠지만...ㅋ
걍 무시하세요...저런 똘팍들 뭐 한두번 봅니까?? ㅋㅋㅋㅋ
교재용으로 복사해서 울 후배가 운영하는 애들에게 나누어 줄 계획입니다. (초등부...)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 있습니다. ^^
님에 주장처럼
죄를 지어야만 생명이 성립하는 세계 그 자체가 죄악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를 믿으면 용서되고 그러하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 된다는 정말 알 수 없는 기독인들.
어찌그리 사죄를 말하는 한국인을 비웃는 쪽발이들에 이론과 유사한지 님에 국적이 의심스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