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배왕조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는
예수는 마사다의 요새가 A.D 74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는 흥미있고 설득력있는 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나이는 거의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성배왕조

엑스 0 9,912 2002.07.14 11:20
성배왕조

나그 하마디 문서에만 근거해서 판단해 보더라도 예수로부터 직접 이어진 혈통이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상당히 타탕성이 있다.
소위 '영지주의 복음서들'중 어떤 것은 신약성서의 책들 만큼이나 커다랗게 그 진실성이 주장되었다.
결국 그것들이 명시적으로 건암시적으로 건 증거해 주고 있는 것들은, 즉 십자가를 대신 진 사람, 베드로와 막달라 사이의 계속적인 불화, 막달라와 예수 사이의 결혼, '인자의 아들'의 출생 등은 아무리 그것들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들이라 하더라도 다루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다루지 않는 것이지 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 시대의 역사는 오늘날의 역사만큼이나 복합적이었고 다면적이었고 실용주의적이었다.

나그 하마디 문서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막달라 사이의 불화는 우리가 가정했었던 충돌, 즉 '메시아 지지자들'이었다. 학문,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문서작용 등에 관하여 그들이 점점 더 독점권을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증거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 가족과 메르빙 왕조 사이의 연관성을 확증해 주는 증거는 더욱이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메시지 지지자들'이 사태를 완전히 장악했던 것은 아니다.
첫 두 세기의 기독교 역사가 무절제한 이단들에 의해 괴로움을 당했다면 그후의 여러 세기들은 휠씬 더 그랬다.
정통주의가 신학적으로는 이레나이우스 아래서 정치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아래서 자신의 위치를 굳히기는 했지만 이단들은 계속해서 전례없는 규모로 급격히 증가했다.

신학적인 세부적 내용에 있어서는 아무리 다르다 할지라도 주요 이단들의 대부분의 어떤 결정적인 요인들에 있어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영지주의적이거나 영지주의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로마의 계급적 구조를 논발했으며 맹목신앙에 대한 개인적 계몽의 우위성을 찬양했다. 그들 중의 대부분은 또한 이러저러한 의미에서 이원론적이었으며 선과 악을 세속적인 윤리적 문제로서 간주했다. 마지막으로 그들 중의 대부분은 예수를 유한하며, 하나의 자연적 임신과정에 의해 태어난 존재로 생각하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즉 그들은 예수를 분명히 십자가에서 죽었거나 아니면 결코 십자가에서 죽지 않은 신적으로 영감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신 아닌 예언자로 간주하였다. 예수의 그 인간성을 강조할 때 이단들 중 많은 것들은 사도 바울의 존엄한 권위에 의존했다. 바울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롬1:3)에 관해 말했다.

아마 그 이단들 중 가장 유명하며 가장 급진적인 것은 마니교였을 것이다. 마니교는 본래 영지주의적 기독교를 조로아스터적 전통 및 미드라스적 전통과 혼합한 것이다. 마니교는 마니라는 어떤 개인에 의해 창도되었다. 그런데 마니는 A.D. 214년 바그다그 근처에서 페르시아 왕가의 한집에서 태어났다. 마니가 젊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를 금욕과 독신생활을 강조하며 침례를 행하고 흰옷을 입는 어떤 종파해 소개해 주었다. 아마 그 종파는 영지주의적 종파였을 것이다. A.D. 240년경 마니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가르침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예수처럼 그의 영적 치유와 귀신축출 때문에 유명하였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새로운 예수'라고 선포하였으며 심지어는 그가 처녀탄생을 하였다고 믿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처녀 탄생은 그 당신 신들의 선결조건이었다. 그는 또한 '구세주', '사도', '계몽자', '주', '죽은 자를 살리는 자',' 필로트', 헬스만' 등으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마지막 두 개의 칭호들은 특히 사시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온 수도회의 단장이 가지는 공식 명칭인 '노토니에'와 대치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후대의 아랍 역사가들에 따르면 마니는 많은 책들을 썼는데 그 책들에서 그는 예수가 단지 모호하고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던 비밀들을 자기가 드러낸다고 주장했다. 그는 짜라투스투라, 불타 그리고 예수를 그의 선지자들로 간주했으며 자기도 그들처럼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동일한 계몽을 받았다고 선언했다. 그의 가르침들은 장엄하고 정교한 우주론적 구조와 결합된 하나의 영지주의적 이원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빛과 어두움의 우주적인 투쟁이 모든 것에 충만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두 적대적인 원리들의 가장 중요한 점은 인간 영혼이다. 후대의 카타리인들처럼 마니도 재생육신 교리를 지지했다. 카타리인들처럼 그도 역시 주도 계급, 즉 '계몽되어 선택된 계급'를 강조했다. 그는 예수를 '과부의 아들'이라고 언급했는데 이 구절은 그후 프리메이슨단에 의해 사용된 구절이다. 동시에 그는 예수의 유한적 존재라고 선언했으며 그가 설령 신이었다 하더라도 계몽에 의한 상징적 또는 은유적 의미에[서의 신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마니도 바실리드처럼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 의해 대치되었다고 주장했다.

A.D. 276년에 마니는 왕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살가죽이 벗겨져 참수되었다. 목이 잘린 그의 몸은 공중 앞에 제시되었는데 아무도 이것은 부활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들은 그의 순교에 의해 촉진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후대의 지지자들 가운데는―적어도 한동안은 ―지지한 아우구스티누스도 있었다. 마니교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기독교 세계전역에 퍼졌다. 그를 없애려는 무수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살아남아 후대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에 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는 마니교의 학교들이 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십자군 원정 무렵에는 이들 학교들이 특히 이탈리아와 불가리아에서 온 다른 마니교 종파들과 연결되었다. 카타리인들이 불가리아 보고밀(Bogomils)의 일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날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가장 최근의 연구에 의해 제시되는 바에 따르면 카다리인들은 프랑스에 오랫동안 확립되어 있는 마니교 학교들로부터 생겨났다고 한다. 어쨌든 알비겐시아의 십자군(Albigensian Crusade)은 본래 마니교에 대하여 싸운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계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니교적'이란 단어는 계속 살아남아 우리 언어와 어휘와 공인된 부분이 되었다.

물론 마니교 이외에도 많은 다른 이단들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통적인 기院교 교리의 1천년 역사에 가장 위험스런 위협을 가했던 것은 아리우스 이단이었다. 아리우스는 318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으며 335년에 죽었다. 정통주의와 그의 논쟁은 상당이 단순하였으며 단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였다. 즉 예수의 전적으로 유한적 존재였으며 단 하나의 전제에 의존하였다. 즉 예수는 전적으로 유한적 존재였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신이 아니었으며 하나의 영감된 교사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 하나의 전능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즉 육신으로 성육신하지 않았으며 피조물에 의해 굴욕과 죽음을 당하지 않은 하나님을 설정함으로써 아리우스는 실제로 기독교를 본질적인 유대교적 가르침들, 예를들면 에비온파의 가르침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동시에 아리우스주의의 절대적인 하나님은 서방에서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기독교가 점차로 세속된 권력을 획득해감에 따라 그러한 하나님은 점점 매력적이 되어갔다. 왕들과 군주들은 아마 저항도 없이 순교하며 세상과의 접촉을 꺼리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신에 대해서보다는 그러한 하나님에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아리우스주의가 335년에 니케아공의회에 의해 정죄되긴 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언제난 그것에 대해 동정적이었으며 그의 생애 말년에는 더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디우스는 즉시 아리우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후원하에 여러 공의회들이 소집되어 정통주의 교회 지도자들을 추방하였다. 360년경 아리우스주의는 로마 기독교에 의해 대체되었다. 그리고 비록 아리우스주의는 381년에 재차 공식적으로 정죄되긴 했지만 여전히 번성하였으며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 5세기에 메르빙왕조의 왕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는 실제로 기독교계의 모든 주교좌는 아리우스파의 주교좌였던가 아니면 공석으로 남아 있었다.

아리우스주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 가운데는 4세기에 이교로부터 개종되어졌던 고트인들이 있었다. 쉬바비아인, 롬바르트인, 알란인, 반달인, 부르군디인 그리고 오스트로고트인은 모두 아리우스파였다. 비지고트인들도 그랬다. 그런데 그들은 480년에 로마를 습격했을 때 기독교 교회는 습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만일 클로비스 이전의 초기 메르빙왕조 왕들이 조금이라도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면 그것은 그들의 바로 이웃에 있는 비지고트와 부르군디의 아리우스파 기독교였을 것이다.

비리고트의 후원하에 아리우스주의는 스페인,페레네 그리고 오늘날 남부 프랑스의 지배적인 기독교 형태가 되었다. 만일 예수의 가족이 실제로 고올에 피난하였다면 5세기까지 그들을 지배한 최고주권자들은 아리우스파의 비지고트인들이었을 것이다. 아리우스파의 정권하에서 그 가족은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가족은 대단히 존중시되었을 것이며 프랑크인들과 결혼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비지고트의 후원과 보호를 받아 그 가족은 로마로부터의 모든 위협을 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비지고트의 귀족과 왕족 가운데 베라(Bara)와 같은 셈족 이름들이 나타나는 것은 특별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고베르2세는 한 비지고트 공주―그의 아버지는 베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와 결혼했다. 베라라는 이름은 다고베르2세와 시지스베르 4세로부터 이어져 온 비지고트 메르빙 가(家)의 계보에 거듭하여 나타난다.

로마교회는 다고베르의 아들이 아리우스주의로 개종했었다고 선언했다 한다. 그리고 그가 아리우스주의로 그렇게 개종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교회와 클리비스 사이의 조약에도 불구하고 메르빙 왕조는 언제나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었다. 클리비스의 손자들 중 하나인 킬페릭은 그의 아리우스적 경향을 감추지 않았다.

만일 아리우스주의가 유대교를 적대시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7세기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슬람교도 적대시하지 않았다. 예수에 관한 아리우스적 견해는 코란의 견해와 상당히 일치하였다. 코란에서 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사자'와 「메시아를 포함하여 수많은 인상적인 칭호들로 35회 정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어디에서 보아도 그는 유한한 예언자, 모하멧의 선구자, 그리고 단일한 절대적 하나님의 대변자 이상의 어떤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고 있다.」그리고 바실리드와 마니처럼 코란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으며 그를 십자가에 달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를 죽였다고 착각했을 뿐이다.」코란 자체는 이 애매한 진술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주석자들은 그것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들 대부분에 따르면 한 명의 대리인이 있었는데 그는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시렌네 시몬이었다고 추정된다. 어떤 이슬람교 작가들은 예수가 벽감 속에 숨어 대리인이 십자가 사건을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나그 하마디 문서에서 이미 인용된 단편들과도 일치한다.


유대교와 메르빙 왕조

가장 강렬한 박해에 직면하여서조차도 이단들이 특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렇게 강렬하게 예수의 유한성과 인간성을 강조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누군가가 그처럼 끈질기게 고수한 전제에 관해 필연적으로 어떤 직접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그 하마디 문서들 제외하면 그들이 어떤 혈통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어떤 증거는 휠씬 더 적다. 물론 나그 하마디 문서와 유사한 문서들, 즉 족보들과 공문서들이 존재했었을 가능성은 있다. 지독하게 악랄한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러한 증거를 가지기 두려워했을 것이며 그런 증거를 영원히 숨기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로마가 성공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이단들은 예수의 가족과 약 4세기 후에 세계사에 등장한 메르빙 왕조 사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적인 확증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그러한 혹증을 위해서는 다른것, 즉 메로밍 왕조의 왕들 자신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 언뜻 볼 때 그 증거는 자체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미 메로베의 전설적인 출생, 즉 두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 두 아버지 중 하나는 바다를 건너 온 신비한 수중생물이라는 전설을 생각해 보았으며, 이 기묘한 우화는 어떤 왕조적 동맹 또는 결혼을 반영하며, 동시에 감추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고기 상징은 시사적이긴 하였지만 거의 결정적이지는 못하였다. 마찬가지로 클로비스와 로마교회 사이의 협정은 우리의 각본에 있어서 대단히 의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협정 자체는 구체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의 혈통에는 신성하고 기적적이며 신적인 본성이 인정되긴 하였지만 이 피가 실제로 예수의 피였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명백하게 진술되지 않았다.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연구를 더 진행해야 한다. 우리는 실재적인 증거를 가지는 단편들을 가려내어 이 증거들로 하나의 일관성있는 형태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먼저 메로빙 왕조에는 어떤 독특한 유대교적 영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확실히 메로빙 왕조의 왕들은 반셈족이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그들은 로마 교회의 계속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토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대하여 관용적이었을 뿐만아니라 노골적으로 동조하기까지 했다. 혼합 결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많은 유대인들 특히 남부에 있는 유대인들은 많은 땅을 소유하고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인 노예들과 하은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메로빙 왕조의 군주들을 위한 행정관들과 고위 장관들이었다. 대체로 유대교에 대한 메로빙 왕조의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서구역사에 있어서 그 유례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메로빙 왕조의 왕들 자신은 그들의 기적적인 힘이 주로 그들의 머리털에서 주어진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머리털을 자르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삼손이 그 한 회원이었던 구약성서의 나실인들의 입장과 같았다. 예수도 나실인 이었음을 암시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초대 기독교 작가들과 현대의 학자들은 모두 그의 형제 야고보는 논란의 여지없이 나실인이었다는데 동의하였다.

메로빙 왕조의 왕가(家) 및 그 왕조와 관련된 왕실에는 대단히 많은 수의 특수하게 유대교적인 이름들이 있었다. 이리하여 577년에는 클로타이르 2세의 한 형제가 삼손으로 이름지어졌다. 그후의 르 레비트(le Levite) 는 브잘롱(Besalon)의 백작이자 제로나(Gerona)의 주교였다. 루시용(Roussillon)의 한 백작은 솔로몬이라는 이름이었으며 또다른 솔로몬은 브리타니(Brittany)의 왕이 되었다. 엘리자샤르(Elisachar)라는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엘르아잘'과 '나사로'의 별명이다. 그리고 메로베(Merovee)라는 이름은 중동지방에서 유래된 명칭인 것처럼 보인다.

유대교적 이름들은 메르빙 왕조와 비지고트 사이의 왕조적 결혼을 통하여 점점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러한 이름들은 비지고트의 귀족과 왕족에게서 나타난다. 그리고 소위 많은 '비지고트' 가족들이 사실은 유대교적 가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역사가들이 '고트(Goth)'와 '유대(Jew)'라는 말을 빈번하게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곤 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 확증된다.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국경지역들에는 즉 메로빙 왕조와 카롤링 왕조 시대에 셉티마니아로 알려졌던 지역에는 대단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지역은 '고티' 또는 '고티아'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유대인 거주자들은 'Goths' 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이는 고의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는 오류이다. 이러한 오류 때문에 유대인들은 특수한 성명에 의하지 않고는 구별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다고베르의 장인은 베라라는 셈족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베라의 누이는 레위라는 가족의 한 사람과 결혼했다.

물론 이름들과 머리카락에 대한 신비주의적 태도만 가지고는 메로빙 왕조와 유대교 사이의 관련을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더 설득력있는 또 다른 증거 단편이 있었다. 메로빙 왕조는 튜튼적 종족법을 고수한 튜튼 족인 프랑크인들의 왕조였다. 5세기 말에 이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래 샐릭법은 궁극적으로 튜튼적 종족법이었으며 로마의 기독교가 서구에 등장하기 이전에 작성되었다. 그후 몇세기 동안 그 법은 로마적인 체계로 성문화되어 샐릭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몇세기 동안 그법은 계속해 서 로마에 의해 전파된 교회법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했다. 중세기 전반에 걸쳐 그법은 신성로마제국의 공식적인 세속법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무렵에 독일의 농부들과 기사들은 교회에 대한 그들의 불평에 있어서 전통적인 샐릭법을 무시한 루터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샐릭법의 한 전체 부분이 남아있는데 그것은 제목 45, 「De Mirrantibus」로 계속해서 학자들과 주석가들을 혼란시켜 왔으며 끊임없는 법적 논쟁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여러 규정들 및 유랑인들이 정착하여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는 상황에 관한 조항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단원이다. 그것에 관해 흥미있는 것은 그것이 원래는 튜튼적 법이 아니라는 것과 작가들은 그것이 샐릭법에 포함되어진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상한 가정을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 비로소 샐릭법의 이 단원이 유대교적 법에서 직접 기원되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그것은 탈무드에 있는 한 단원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따라서 샐릭법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법으로부터 직접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것이 샐릭법을 법전화하도록 후원한 르빙 왕조의 왕들이 순히 유대교의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본문들을 접하기도 했었음을 암시해 주고있다.


셉마티아 공국

그러한 단편들은 자극적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의 가정을 위해서는 빈약하게 지지해 주었을 뿐이다. 즉 예수로부터 이어진 혈통이 프랑스 남부에 존재했었으며 이 혈통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과 결혼했다는 것과 메르빙 왕조는 결국 부분적으로는 유대교적이 되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메르빙 왕조 세대는 우리의 가정을 위해 어떤 결정적인 증거도 제시해 주지 못했지만 그 바로 다음 왕조의 시대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주었다. 이러한 '소급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가정은 갑자기 타당성이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메르빙 왕조의 혈통이 가롤링 왕조의 왕들에 의해 폐위된 후에도 계속 남아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탐구한 바 있다. 그, 탐구 과정에서 우리는 150년 동안 프랑스의 남부에 존재했던 자치공국을 만났었다. 그 공국의 가장 유명한 통치자는 귀염 드 겔론느였다. 귀염 드는 그 시대의 가장 존경받는 영웅들 중 하나였다. 그는 또한 볼프람 폰 에센바하에 의 씌어진 빌레할룸의 주인공이기도 하였으며 성배가족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놀랍고 흥미있는 증거를 발견한 것은 귀염과 그의 배경에서 였다.

전성기의 귀염 드 겔론느의 영 토에는 스페인 북동부, 피레네, 그리고 셉티마니아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 남부지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6세기와 7세기에 이들은 아리우스적 기독교를 지지하는 비지고트 군주들과 대단히 진심어린 관계를 맺고있었다. 사실 이러한 관계는 너무나 밀접하여 혼합 결혼이 통상적으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트'라는 단어와 '유대'라는 말이 종종 상호 대치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711년경에는 셉티마니아와 스페인 북동부에 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 무렵 다고베르 2세가 살해되었으며 그의 가문은 렌느 르 샤토를 포함하여 그 주변 지역인 라제로 은신하였다. 그리고 메로빙 왕조와 같은 계열이 아직도 명목상으로는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실제적인 권력은 카롤링 왕조의 침략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의 재가와 지지를 얻어 그들 자신의 왕조를 수집하는데 착수했다. 그 무렵에는 또한 비지고트인들도 로마기독교로 전향했었으며 그들 영토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었다. 따라서 비지고트 스페인이 711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침략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그 침략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이슬람교의 통치하에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번성하였다. 무어인들은 그들에게 너그러웠으며 때로는 그들에게 코르도바, 그라나다, 그리고 톨레도와 같은 피정복 도시들의 행정장관직을 부여하기도 했다. 유대의상업과 무역은 조장되었으며 새로운 번영을 누렸다. 유대교적 사상은 이슬람교의 사상과병존하였으며 그 둘은 서로를 보완해 주었다. 그리고 스페인의 무어인 수도였던 코르도바를 포함한 마을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8세기 초에 무어인들은 피레네를 가로질러 셉티마니아로 갔다. 그리고 720년부터 759년까지 다고베르의 손자와 증손자는 계속 라제에 비밀리에 존재하고 있었지만 셉티마니아는 이슬람교의 수중에 있었다. 셉티마니아는 자치적인 무어인의 공국이 되었다. 그 공국은 나르본을 수도로 가지고 있었으며 코르도바의 왕족에 대해서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르본으로부터 무어인들은 계속 북진하여 리용과 같은 프랑스 영토 깊숙한 곳에있는 도시들도 정복했다.

무어인들의 진군은 궁정장관이자 샤를르마뉴의 조부인 샤를르마르털에 의해저지되었다. 샤를르는 무어인들을 나르본으로 몰아 내었으며 그다음에는 그곳마저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무어인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방어된 나르본은 난공불락 이었다. 그리하여 샤를르는 주변에있는 지방을 파괴함으로써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했다.

752년경 샤를르의 아들 페팽은 지방 귀족들과 동맹을 맺어 셉티마니아를 완전히 자기의 수중에넣었다. 그러나 나르본은 7년동안에 걸친 페팽 군대의 포위공격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항했다. 페팽, 그의 위치를 굳히는 것이 가장 긴급한 마당에 있어서 그 도시는 페팽측에서 볼 때 하나의 가시였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좌를 찬탈한 책임에 대단히 민감해 있었다. 합법적인 자격을 확립하기 위해 그는 메르빙 왕조의 남은 혈족들과 등맹을 가장했다. 그의 대관식을 준비할 때 성서적인 기름붓는 의식을 넣어 특색있게 하였다.

그때 교회는 왕을 즉위시키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학자들에 따르면 기름붓는 것은 그 프랑크 군주국이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유대교적 군주국의 복사판이었음을--실제로 그 군주국의 계승은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암시하고자 하는 고의적인 시도였다.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극히 흥미있다. 왜 찬탈자 페팽이 성서적 모형에 의하여 자신을 합법화하고자 했는가? 그가 폐위시켰던 왕조, 즉 메로빙 왕조는 정확하게 그와 동일한 방법으로 합법화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쨌든 페팽은 두 개의 문제에 직면했다. 즉 나르본의 계속적인 저항과 성서적 전례를 언급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확립하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콜럼비아 대학의 아더 즈커맨, (Arthur Zuckerman) 교수가 설명했듯이 그는 759년에 나르본의 유대인들과 협정함으로써 그 두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결심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페팽은 성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위해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또한 무어인들에 대하여 싸울때 유애인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 보답으로 그는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에게 그들 자신의 하나의 공국과 하나의 왕을 허락했을 것이다.

759년에 나르본에 있는 유대인들은 갑자기 그 도시의 이슬람 수비대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살해했으며 성문을 포위 공격하는 프랑크인들에게 열어주었다. 잠시 후 유대인들은 페팽을 그들의 정규적인 군주로 인정하였으며 합법적인 정서적 계승에 대한 그의 요구를 승인했다. 한편 페팽도 그의 계약을 지켰다. 768년에 셉티마니아에는 하나의 공국이 세워졌는데 그 공국은 명목상으로는 페팽에게 충성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나라였다. 하나의 통치자가 그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그 이야기에서 보면 그는 애메리(Aymery)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록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크의 귀족으로 인정되자 데오도리쿠스 또는 티에피라는 이름을 취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데오도리쿠스느 귀염 드 겔론느의 아버지였다. 그는 페팽과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의해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다.

우리가 이미 조사해 보았듯이 현대의 학자들은 데오도리쿠스의 출신과 배경을 확실히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는 메르빙 왕조의 후손이었다. 즈커맨에 따르면 바그다드 출신이었다고 한다. 즉 바벨론 포로기 이후 바벨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후손이었다. 한다. 그러나 바그다드 출신의 그 왕은 데오도리쿠스르르 축성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왔는데 그후의 기록들이 그 두 사람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 즈커맨 교수는 '서방의 왕들'은 동방의 왕들보다 더 '순수한 혈통'이었다는 묘한 주장을 하고 있다.

'서방의 왕들'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아니라면 누구였겠는가? 왜 메르빙 왕조의 한 개인이 유대인의 왕으로서, 즉 유대인 공국의 통치자요 '다윗 왕가의 씨'로서 인정되었는가? 메르빙 왕조의 왕들이 실제로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유대인이었음이 분명하다.

데오도리쿠서는 샤를르마뉴의 숙모이자 페팽의 누이인 알다(Alda)와 급히 결혼함으로써 페팽의 위치는 물론이고 자기의 위치도 더 확고히 했다. 그후 셉티마니아의 그 유대인 왕국은 번영을 누렸다. 그 왕국에는 카롤링 왕조의 군주들로부터 자유 보유권으로 보유된 부동산들이 증여되었다. 그 왕국은 또한 교황 스테파누스 3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한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용적의 교회 부지도 주어졌다.

셉티마니아의 유대인들의 왕인 데오도리쿠스의 아들은 귀염 드 겔론느였는데 그는 바로셀로나의 백작, 툴루즈의 백작, 오베르뉴의 백작, 그리고 라제의 백작이란 칭호를 가지고있었다. 그의 부친처럼 귀염도 메로빙왕조의 한 사람이었을 뿐만아니라 왕족의 피를 받은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 왕족 혈통은 카롤링 왕가, 갈리프, 그리고 교황에 의하여 다윗 가라고 인정되었다.

그후에 그것을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학문적 탐군는 귀염의 유대교가 논쟁의 여지가 없었음을 입증했다. 그가 오랑쥬의 제후 귀염으로서 나타나는 이야기들에서 조차도 그는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모두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의 방패 도안은 동방 왕들의 도안과 동일하였다. 즉 유다의 사자 다윗 가와 그후의 예수가 속해 있던 지파가 그것이다. 그는 매부리 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전투 중에조차도 그는 안실일과 장막절을 지키느라 애쓰고 있다. 즈커맨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포위와 함락을 원초적으로 기록한 그 역사가는 사건들을 유대교의 달력에 따라 기록하였다 ……. 나르본 툴루즈의 공작이자 그 원정군의 지휘관이었던 윌리암은 유대교의 안식일들과 성일들을 엄격히 지켰다. 이런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는 루이 왕의 완전한 협력을 얻게 되었다.


귀염 드 겔론느는 소위 ‘샤를르마뉴의 동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즉 그는 일반적 정식과 전승에 있어서 롤랑과 올리비에와 같은 그러한 전설적인 인물들과 동등한 권위있는 역사적 영웅이었다. 샤를르마뉴의 아들 루이가 황제에 즉위했을 때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운 사람은귀염이었다. 루이는 「윌리암, …… 나의 혈통은 당신의 혈통과 같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계열이 전혀 모호해 보이는 사람에게 주어진 언급임을 볼 때 대단히 이상한 언급이다.

동시에 귀염은 전사 이상의 인물이었다. 792년 직전에 그는 겔론느에 하나의 학술원을 창설하였으며 학자들을 초청하고 하나의 유명한 도서관을 만들었다. 겔론느는 곧 유대교적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교적' 플레제타니가 배출된 것은 그러한 학술원으로부터였을 것이다. 그는 볼프람에 따르면 성배의 비밀을 프로방스의 가요에 한정시켰던 솔로몬 후손의 히브리 학자였다.

806년에 귀염은 실제 생활에서 물러나고 학교로 은돈하였는데 812년경 그는 죽고 후에 그 학교는 현재의 유명한 생 귀염 르 데세르(Saint Guillelm Ie Desert)라는 수도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러나 귀염이 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겔론느는 유럽에서 막달라 마리아 숭베를 위한 곳으로 최초로 알려진 장소 중의 하나가 되었었는데 막달라 마리아 숭배는 여기서 유대인학교와 함께 매우 의미있는 듯이 융성되었다.

예수는 유대지파며 다윗의 왕가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배--승계승 또는 '왕가의 피'--를 프랑스로 가져갔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8세기에는 프랑스 남부에서 유대임금으로 인정된 유대지파 다윗 왕가의 주권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적인 유대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메르빙 왕조였다. 볼프람 폰 에센바하의 시를 보면 그와 그의 가족은 성배와 관계가 있다.



다윗의 후손

여러 세기 후 셉티마니아의 유대인 왕국의 행적에 대한 기족들을 모두 말살하려는 간절한 시도가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고트인과 유대인의 빈번한 혼란은 이 검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검열이 완전히 성공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휠씬 뒤 1143년 클러니의 존사 피터는 프랑스의 루이 7세에게 연설을 하는 중에 자기들 가운데 왕이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나르본의 유대인들을 비난하였다. 1144년에 캠브리지 수도승 데오발트단 사람은「스페인에 거주하면서 왕가의 후손이 거주하는 곳인 나르본에 모이는 유대인 주요 귀족들과 랍비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1165∼6에는 유명한 여행가요 연대기 저술가인 투들라의 베자민은 나르본에 「현자들, 권력자들 그리고 귀족들이 있는데 이들의 우두머리는 그의 족보에 진술된 것처럼 다윗가문의 한 후손이다.」라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12세기경 나르본에 거주하던 다윗의 후손은 누구든지 그외의 다른 곳에 살던 어떤 후손보다도 덜 중요하였다. 족보의 나무들은 두갈래로 나뉘어져 퍼져 나가며, 다시 자게 나뉘어져 실질적인 숲을 형성하였다. 만일 데오도릭과 귀염 드 겔론느의 어떤 자손들이 나르본에 머물렀다면, 그 사이에 4세기에 걸쳐서 더욱 정당한 영역을 획득한 다른 자들이 있었다. 12세기경 이러한 영역들에는 기독교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역인 로렌느와 예루살렘의 프랑크 왕국이 포함되었다.

9세기에 귀염 드 겔론느의 혈통은 최초의 아퀴텐느의 공작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또한 브리타니의 공작가와 합쳐졌다. 그리고 10세기에는 '메부리코'란 별명을 지녔으며 다고베르와 귀염 드 겔론느의 직계후손인 위그 드 플랑타르란 사람이 블로뉴의 최초의 백작인 외스타슈의 아버지가 되었다. 외스타슈의 손자는 로렌느의 공작이요 예루살렘의 정복자 고드프라 드 부용이었고, 고드프라에게서부터 왕조와 '왕가의 전통'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시온의 반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장점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을 다스리던 자와 동등시되었다. 만일 메르빙왕조가 진시로 예수에게서 흘러 나온 자손이라면 메르빙왕조의 혈통적 왕손 고드프라느 예루살렘 정복시에 자기의 정당한 유산을 다시 얻는 것이다.

고드프라와 그의 뒤를 잇는 고렌느의 가문은 물론 평상시에는 가톨릭교도였다. 당시 기독교화된 세계내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가톨릭교도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원들은 적어도 몇몇 진영들에게서는 알려져 왔던 것 같다. 후대에 16세기에 이르러 귀즈의 공작 앙리 드 로렌느가 샹파뉴지방에 있는 죙빌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영접되었다. 이 군중들 가운데 몇몇 개인들은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라고 찬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이 1966년에 인쇄된 로렌느의 현대사 속에서 상술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는 것 같다. 이 저작에는 오늘날 로렌느의 유명무실한 공작이며 예루살렘의 유명무실한 왕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쓴 특별한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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