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제자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는
예수는 마사다의 요새가 A.D 74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는 흥미있고 설득력있는 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나이는 거의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제자

엑스 0 5,427 2002.07.14 11:17
사랑하는 제자

만일 막달라와 베다니의 마리아가 동일 여인이라면 그리고 이 여인이 예수의 부인이었다면 나사로는 예수의 처남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들에는 나사로가 실제로 그러한 처남의 지위를 누렸음을 암시하는 어떤 증거가 있는가?


나사로는 누가복음, 마태복음, 그리고 마가복음에는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그의 '죽의 자로부터의 부활'은 원래 마가복음 기록에 수록되어 있다가 그후 삭제되었지만 말이다. 결국 나사로는 제4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통해서만 후세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죽음에서 일어난' 자에게 대한 대우 이상의 어떤 특혜적 대우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제자들 자신보다도 더 예수와 가까운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복음서들은 그를 제자들 가운데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제자들과는 달리 나사로는 실제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다. 제4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대제사장들은 나사로도 죽이기로 결정했다.(요 12:10) 나사로는 어떤 방법으로든 예수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제자들 중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될 수 있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론상으로 볼 때 그는 한명의 제자가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제자로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도 역시 십자가 처형 시에 참석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 예수에게 자기의 생명을 빚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뻔뻔스런 배은망덕의 행위이다. 그는 그에게 직접 위협이 닥치고 잇었기 때문에 숨으러 갓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들에서 더 이상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극히 이상한 일이다.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는 결코 다시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찌 되었는가? 우리는 그 문제를 더 면밀하게 조사하고자 한다.


베다니에서 3개월 동안 머문 후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루 거리쯤 떨어진 요단강 기슭에 은거하였다. 여기서 어떤 사람이 나사로가 병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그에게 급히 전하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나사로의 이름을 말하지는 않앗다. 반대로 그는 그 병든 사람을 대단히 중요한 어떤 사람으로서 묘사하고 있다. 즉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이 들었나이다.(요 11:3)] 이 소식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분명히 이상하다. 그가 사랑한다고 생각되는 그 사람을 도우러 황급히 돌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는 그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처리한다. 즉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느님의 아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요 11:4)] 그리고 그의 말이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라면 그의 행동은 훨씬 더 그렇다. 즉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요 11:6)] 간단히 말해 예수는 그가 받은 급한 소식에도 불구하고 요단강에서 이틀을 더 보냈다. 드디어 그는 베다니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때 그는 나사로가 이미 죽었다고 제자들에게 말함으로써 그의 이전 진술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놀라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나사로의 죽음이 어떤 목적에 기여했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으며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 라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네 절 뒤에서 그는 실제로 그 사건 전체가 주의깊게 조종되었으며 미리 배열된 사건이었음을 인정히고 있다. 즉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요 11:15)] 그러한 행동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행위라면 제자들의 반응도 적잖이 그렇다. 즉 [디모두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요 11:16)]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만일 나사로가 실제로 죽었다면 제자들은 집단 자살을 함으로써 나사로를 따르려 하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예수 자신의 부주의, 즉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그가 들었을 때 취한 무관심과, 베다니에 돌아오는 것을 지체한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져야 하는가?

그 문제에 관한 설명들은 몰톤 스미드 교수가 주장하고 있듯이 다소간 표준적인 '신비 학파'의 입회식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스미드 교수가 설명하고 있듯이 그러한 입회식과 그에 부수되는 의식들은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 상당히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 그 의식들에는 때때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수반되었다. 즉 상징적인 죽음과 재생, 재생의 모태가 되었던 무덤에의 격리, 오늘날 세례라고 불리워지는 의식, 즉 상징적인 침례, 그리고 그 예식을 주재하는 예언자나 마술사의 피와 동일시 되었던 한 잔의 포도주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컵으로부터 포도주를 마심으로써 제자는 그의 스승과의 상징적 일치를 성취한다. 즉 제자는 그의 스승과 신비적으로 '하나'가 된다. 사도 바울이 세례의 목적을 설명하는 것은 정확하게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여서인데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 자신도 최후의 만찬에서 동일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스미드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의 행적은 그 당시의 다른 마술사들, 치유자들, 기적을 행하는 자들의 행적과 대단히 유사하다. 예를 들면 네 권의 복음서들 전체를 통하여 그는 언제나 그가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은밀하게 만나거나 아니면 그들하고만 조용하게 이야기 한다. 그후 그는 때때로 그 일어난 것을 누설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일반 대중에 관한 한 그는 언제나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나사로는 예수가 요단강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전형적인 의식에 입회하여 그러한 의식들이 전통적으로 행했듯이 상징적인 부활과 재생에 이르는 절차를 진행했던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에 비추어 볼 때 '그와 함께 죽고자 한' 제자들의 바램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달리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사건 전체에 대한 예수의 자기만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는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정말로 나사로가 죽은 줄 알고 당황해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그 관습을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의식이 무엇인가 잘못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도 그 사건 전체는 교묘하게 고안된 하나의 연출로 그 참 성격 목적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었을 수도 있다.


만일 나사로 사건이 의식적인 입회식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는 대단히 특혜적 대우를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제자들 중의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입회식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제자들은 나사로의 특권을 결정적으로 시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도대체 왜 지금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베다니의 이 젊은이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하는가? 왜 그는 제자들이 그처럼 그와 함께 하고 싶어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가? 왜 카르포크라테스파의 사람들처럼 후세의 신비적 경향을 띤 이교도들이 그 문제를 그렇게 많이 다루었는가? 그리고 왜 그 사건 전체가 마가복음에서 삭제되었는가? 아마도 나사로는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예수가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나사로는 예수와 어떤 특별한 관계, 즉 처남의 관계와 같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둘 다 일지도 모른다. 예수가 나사로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은 정확하게 말해 나사로가 예수의 처남이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그 사랑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다. 예수가 베다니에 돌아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하여 울 때 또는 울음을 가장할 때 구경꾼들은 소식을 전한 자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여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요 11:36)]라고 하였다.


나사로 이야기가 나타나는 요한복음의 저자는 어디에서도 자기를 '요한'이라고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가장 독특한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받는 제자','예수가 사랑했던 자'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가 그의 동료들보다 더 독특하고 특혜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예를들면 최후의 만찬에서 그는 예수와 그의 개인적인 친밀성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가 밀고자를 가르쳐 준 것도 그에게만이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요 13:24)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주여 누구오니까(요 13: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어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요 13:26)



제4 복음서가 그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는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누구인가? 모든 증거가 제시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사실상 '예수가 사랑하시는 자'인 나사로이다. 그렇다면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는 하나의 동일 인물이며 나사로가 '요한'의 실제 정체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거의 불가피한 결론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만이 그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유명한 성서 신학자이며 사해 두루마리들에 대한 일류 전문가들 중의 하나인 윌리엄 브라운리(William Brownlee)교수에 따르면 "제4 복음서에 있는 내적 증거를 보아......사랑하시는 제자는 베다니의 나사로라는 결론이 나온다."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하나의 동일 인물이라면 수많은 예외들이 설명되어질 것이다. 나사로가 불가사의하게 성서기록에서 사라진 것과 그가 십자가 처형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설명되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나사로는 십자가 사건에 참석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가 그의 모친의 보호를 의탁한 것은 나사로에게였을 것이다. 예수가 한 말들은 처남에게 하는 말들일 수도 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요 19:26)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신지라(요 19:27)


이 인용구의 마지막 말이 특히 시사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에 있는 그들의 집을 떠나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사로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 집은 예수 자신이 때때로 묵었던 베다니에 있는 집이었다.


제사장들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언급된 이후로 나사로라는 이름이 다시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실제로 '사랑하시는 제자'라면 그는 결코 자취를 감추지 않고 제4 복음서의 끝까지 그의 활동들이 추적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의 연구를 보충해 주는 묘한 사건이 있다. 제4 복음서의 끝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죽음을 예언하며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로다.(요 21:20)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요 21: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 21:22)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라(요 21:23)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요 21:24)


어법이 애매하기는 하지만 이 구절의 취지는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도록 지시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본문 자체는 이 오심이 '재림'이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반대로 그것은 훨씬 더 현세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의 다른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한 후 '사랑하시는 제자'를 위한 어떤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본문은 마치 그들이 특수하고 구체적인 타협을 이루어야 하며 계획을 수립해야 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나사로라면 다른 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결탁은 어떤 전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십자가에 다리기 전 주에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였다. 그리고 메시아에 관한 구약성서 예언들과 일치되게 하기 위하여 그는 멍에를 매지 않은 나귀를 탔음에 틀림없다.(슥 9:9~10) 따라서 나귀가 구입되었음에 틀림없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는 두 제자를 베다니로 파견하며 그곳에 가면 나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 나귀 주인에게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라고 말하도록 지시된다. 모든 것이 예수가 예언한 바 그대로 일어나자 그것은 기적의 일종으로 간주 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에는 실제로 어떤 점이 있는가? 그 사건은 단지 주의깊게 짜여진 계획임을 입증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지정된 때에 나귀를 준비한 베다니의 그 사람은 나사로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휴 손필드(Hugh Schonfield)교수의 결론이다. 그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배열들은 나사로에게 맡겨졌으며 다른 제자들은 그것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의 추종자들 중에는 하나의 내부적 모임, 즉 협력자들의 핵심, 음모 단원들, 또는 가족들이 있었는데 예수는 그들에게만 자기의 비밀을 털어 놓았음이 입증된다. 숀필드 교수는 나사로도 그러한 모임의 일원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의 확신은 베다니에서의 입회식 또는 상징적인 죽음에 의하여 나사로가 특혜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스미드 교수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베다니는 예수가 주도한 독특한 의식들을 위한 제의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수수께끼적 베다니 사건을 설명해 줄 수도 있다. 시온 수도회는 렌느 르 샤토에 있는 베다니의 문을 '베다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소니에르는 시온 수도회의 요구에 따라 그의 별장을 '빌라베다니아'라고 명명하였다.


어쨌든 '베다니 사람'으로부터 나귀를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는 그 결탁은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그가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으라고 명령하는 제4 복음서의 수수께끼같은 종결에서 다시 등장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와 '사랑하시는 제자'는 수행해야 할 계획들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들에는 예수 집안을 돌보는 것이 내포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다. 십자가에 달릴 때 그는 이미 그의 모친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돌보도록 부탁했었다. 만일 그가 부인과 자녀들이 있었다면 아마 그들도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맡겨졌을 것이다. 물론 '사랑하시는 제자'가 실제로 그의 처남이었다면 이것은 훨씬 더 그럴듯 할 것이다.


훨씬 후세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의 모친은 제4 복음서가 쓰여졌다고 하는 에베소에서 망명 생활중 사망했다. 그러나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의 모친을 생전에 모셨다는 어떤 언급도 없다. 숀 필드 교수에 따르면 제4 복음서는 에베소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어떤 희랍인 장로가 거기에서 그 복음서를 자기 생각에 맞추어 집필하고 개정하고 편집하였을 것이다.


만일 '사랑하시는 제자'가 에베소에 가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는가? 만일 그와 나사로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승에 따르면 나사로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관해 상당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어떤 초대교회의 작가들은 물론이고 나사로, 막달라, 마르다, 아리마대 요셉과 몇몇 다른 사람들도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요셉은 빌립에 의해 성직임명을 받았으리라고 추정된다. 그리고 그는 영국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글래스터버리에다 한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나사로와 막달라는 고올(Gaul)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막달라는 액생 프로방스(Aix en Provence)가 아니면 생 봄므에서 죽었으며 나사로는 마르세이유에 최초의 주교관구를 설치한 후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들의 동료들 중의 하나인 생 막시밀리앙은 나르본에 최초의 주교관구를 창설했다고 한다.


만일 나사로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그들이 동시에 사라진 것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참 '사랑하시는 제자'인 나사로는 그의 누이와 함께 마르세이유에 상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나사로의 누이는 성배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망명을 위한 준비는 제4 복음서의 끝부분에서 예수가 그의 '사랑하시는 제자'와 함께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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