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는
예수는 마사다의 요새가 A.D 74년 로마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그곳에서 죽었다는 흥미있고 설득력있는 논증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의 나이는 거의 80세가 되었을 것이다.......

<b><font color=navy>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font></b>

엑스 0 11,672 2002.07.14 11:19
기독교가 금지한 비밀1

물론 우리는 우리의 각본이 기존의 기독교적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보다 많이 연구하면 할수록 수세기에 걸쳐 유래된 그 가르침들은 고도의 발췌 편집으로 그럴듯하게 삭제되고 개정되었음이 그만큼 더 명백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는 예수와 그의 시대를 어떤 특권층 즉, 기 문제에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그리고 아직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어떤 그룹들과 개인들의 필요에 따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손상시키거나 난처하게 할 수도 있는 어떤 것은-- 예를 들면 마가의 '비밀 복음서'처럼-- 당연하게 삭제되었다. 사실 너무나 많은 것이 삭제되어 일종의 빈 공간이 생겨났다. 이 빈 공간에서는 추측이 정당하고 필연적이다.

만일 예수가 합법적인 왕권 소유자였다면 그는 비교적 소수의 대중 즉 갈릴리의 그의 직계 가족, 그 자신의 귀족적 사회 계급에 속한 어떤 다른 사람들, 그리고 유대와 예루살렘에 전략적으로 베치된 몇몇 대표자들에 의해 지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랬을 것이다. 그러한 추종자들은 탁월하기는 했지만 그의 목적 실현을 보장하기에는, 즉 왕좌를 차지하려는 그의 노력을 성사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다른 계급들로부터 보다 확고한 추종자들을 모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보니 왕자 찰 리가 이전의 지위를 추구하지 위해 1745년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는가?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의도된 메시지를 전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메시지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메시지처럼 냉소적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주 고상하고 강력한 이상을 곁들인 선한 신앙의 형태로 전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지는 종교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현대의 정치가들의 목적과 동일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짓밟히고 고통받고 약탈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파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약속의 메시지였다.

만일 오늘날의 독자가 그 문제에 관해 편견과 선입관을 버린다면 그는 현대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수법, 즉 대의명분으로 백성들을 규합하고--언제나 그랬듯이--독재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는 수법과 아주 유사한 점을 간파해 냈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윤리적인 동시에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메시지는 정치적 동기에 따라 특수층의 대중에게 지향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대규모의 추종자들을 모집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억압받고 짓밟히고 약탈당하고 고통받는 자들 가운데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복에 굴복하였던 사두개인들은 역사상의 모든 사두개인들만큼이나 그들의 소유를 나누어 주기 싫어했으며 그들의 안전과 안정이 위협받는 것을 싫어했을 것이다.

복음서속에 나타나는 예수의 메시지는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전적으로 독특한 것도 아니다. 예수 자신은 바리세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는 바리새적 교리의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사해 두루마리들이 입증해 주고 있듯이 그의 가르침속에는 엣세네의 중요한 사상적 측면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 자체는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은 독창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 자신은 대단히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병을 치유하고 , 그런 유의 다른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니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는 생생한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재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의 청중은 전혀 세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더구나 예수는 그이 엣세네파 선배들과는 달리 메시아의 강림을 예고하는 데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그 메시아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휠씬 더 권위가 있었을 것이며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할 무렵 예수는 이미 추종다들을 다 모집해 놓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추종자들은 그들의 관심이 서로 상충되는 다른 두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편에는 소수의 핵심적인 추종자들, 즉 직계 가족과 다른 귀족 회원들 및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지지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주요 목적은 그들의 지지자가 왕좌에 즉위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보다 많은 '일반 백성' 즉 그 운동의 대오(隊俉)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주요 목적은 그 메시지와 그 메시지에 포함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이들 두 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정치적 목적 즉, 예수를 왕좌에 앉게 하려는 목적은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들은 근본적으로 달랐을 것이다.

그 거사가 완전히 실패하자 이들 두파 즉 '메시지 지지자들'과 '가족 지지자들' 사이의 부자연스런 결속은 붕괴되었을 것이다. 붕괴와 임박한 학살의 위험에 직면하자 그 가족은 오래 전부터 왕가에 가장 중요하였던 하나의 요소, 즉 어떤 희생을 치뤄서라도, 필요하다면 도망하여서라도 혈통을 보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지 지지자들'에게는 그 가족의 미래는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혈통 보존은 이차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 메시지를 영속화시키며 전파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첫 몇세기 동안 전개되어 드디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수된 기독교는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기독교의 보급과 발전과정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대단히 광범위하게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사도 바울과 함께 '그 메시지'는 이미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 형태는 기독교의 전체 신학체계가 근거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북음서들이 작성될 무렵에 그 새로운 종교의 교리는 사실상 완결되었다.

그 새로운 종교는 무엇보다도 로마의 청중 또는 로마화된 청중을 주요 목표로 하였다. 따리서 예수의 죽음에 있어서의 로마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미화되었으며 책임은 유대인들에게로 전가되었다.

그러나 로마 세계에 맞도록 사건들을 왜곡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로마 세계는 그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시이저는 이미 공식적으로 신으로 취임했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예수도 신격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었다. 바울에 의해 그는 신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으로부터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 이집트, 로마와 서유럽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 새로운 종교는 먼저 그 지역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종교는 기존의 신조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것을 고수할 수 있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 그 새로운 신은 힘과 권위와 기적들의 목록에 있어서 그가 대치하고자 하는 신들에 필적해야만 했다. 만일 예수가 당시의 로마화된 세계에서 지반을 다지고자 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완전한 신이 되어야 했다. 옛날 의미에서의 메시아가 아니고 제사장적 왕이 아니라 시리아, 페니키아, 이집트의 고전적인 신들처럼 지하계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고 봄과 함께 다시 소생한 성육신한 하나님이 되어야 했다. 부활에 관한 사상이 최초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이 점에서였으며, 대단히 명백한 이유 때문이었다. 즉 예수를 타무스, 아도니스, 아티스, 오시리스 그리고 그들 시대의 세계와 의식을 모두 섭렵한, 소멸하고 소생하는 모든 다른 신들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 한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처녀탄생의 교리도 선포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축제인 부활절 축제는 당시의 다른 종파들과 신비교의 봄의식에 일치하게 되었다.

하나의 신을 선포할 필요가 생기게 되자 그'신'의 실제적인 육신상의 가족과 그의 이야기에 나오는 정치적이고 왕조적인 요소들은 불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보편성의 주장을 더 촉진시키기 위해 모든 정치적·왕조적 요소들은 예수의 전기에서 엄격하게 삭제되었다. 따라서 열성당원들과 엣세네파에 대한 모든 돤계들도 역시 신중하게 제거되었다. 그러한 관계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난처하게 하는 장애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신이 복잡하고 일시적인 정치적·왕조적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도 실패로 끝난 음모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온당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복음서들에 수록된 것 이외의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복음서속에 로마에 의해 점령된 1세기의 팔레스타인에서 단지 우연히 일어나 엄격하고 신화적인 얘기만 기록되었다.

'그 메시지'는 이러한 형태롤 발전되었지만 그 가족과 그 지지자들은 근거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1세기의 작가 울리우스 아프리카누스는 예수의 살아남은 친척들이 유대 귀족들의 족보를 파괴하여 왕좌에 대해 도전할 수 있는 모든 증거들 제거한 헤롯 왕가의 통치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친척들은 A.D. 66년과 77년 사이의 반란기간 동안 문서 파괴를 겨우 모면하고 남아 있던 어떤 족보들을 가지고 전세계에 흩어졌다고 한다.


새로운 신화의 선지자들에게 있어서 이 가족의 존재는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존재는 언젠가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일을 직접 증명할 수 있었던 그 가족은 그 신화에 대한 위험스런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가족은 직접적인 지식에 근거하여 그 신화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에 관한 일체의 언급이 억압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태의 냉소적 현실이 인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의 정체를 폭로할 수 있는 그 가족 자체는 가능하다면 제거되어야 했다.

따라서 그 가족측에서는 극도의 비밀이 요구되었다. 초대 교회교부들은 그들이 부과하고자 했던 정통주의에서 벗어나는 어떤 것도 묵과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반유대주의적 기원들 중의 하나가 생겨났을 것이다. 결국 '메시지 지지자들'과 신화의 선전자들은 유대인들을 비난하고 로마인들을 무죄로 함으로써 이중적인 목적을 성취했을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신화와 '메시지'를 로마의 청중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유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가족의 신뢰를 비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유발시킨 반유대적 감정으로 인하여 그들의 목적은 휠씬 더 촉진되었을 것이다. 만일 그 가족이 로마 제국내에 있는 어떤 유대 공동체로 도망했다면 당시에 널리 행해지고 있던 일반적인 박해로 인하여 위험스런 증언들이 간단하게 침묵되었을 것이다.

로마 청중의 비위을 맞춰주고 예수를 신격화하며 유대인들을 희생제물로 삼아, 그 후기독교적 정통주의가 된 새 신화의 보급은 성공이 보장되었다. 이런 정통주의의 입장은 주로 A.D. 180년경의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나이우스에 의하여 2세기에 결정적으로 견고하게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레나이우스는 어떤 초대 교부들보다도 더 기독교 신학에 확고하고 일관성 있는 형태를 부여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단 반박(Libros Quinque Adversus Haereses)>이라는 방대한 책에 의하여 이를 이룩했다. 그의 철저한 저서에서 이레나이우스는 정통주의에서 빗나간 모든 것들을 열거하여 그것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단을 한탄하면서 그는 오직 하나의 확고한 교회가 있을 뿐이며 그 교회 이외에는 어떤 구원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단언에 도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단이라고 선언하였으며 따라서 축출되고 가능하다면 멸종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초대교회의 많은 이단들 중에서도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가장 신랄하게 공격받은 것은 영지주의였다. 영지주의는 게인적인 경험 즉 신과의 개인적인 영합에 의존하였다. 이레나이우스가 볼 때 이러한 영지주의는 자연적으로 성직자들과 주교들의 권위를 손상시켰으며 통일성을 지향하려는 노력에 방해가 되었다. 결국 그의 영지주의를 제거하는데 몰두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공상을 금지시키고 고정된 도그마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한 신학적 체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개인에 의한 어떤 해석도 용납하지 않는 법전화된 교리 체계가 필요로 되었다. 개인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한 반대로 이레나이우스는 사도적 기초와 계승에 의존하는 단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를 고집하였다. 그러한 교회의 창시를 보충하기 위해 이레나이우스는 명확한 정경(政經) 즉 권위있는 저서들의 고정된 목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당시 널리 유포되어 있는 책들을 발췌하여 어떤 것은 포함시키고 어떤 것은 배제함으로써 그러한 정경을 편집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오늘날의 정경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신약성서 정경을 편집한 최초의 인물이다.

물론 그러한 조치들이 초기 이단들의 확장을 막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이단들은 점점 더 융성하였다. 그러나 이레나이우스와 함께 '메시지 지지자들'에 위해 선포된 기독교 유형인 정통주의는 일관성있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후 계속 잔존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레나이우스가 콘스탄틴누스 황제 통치기간과 그 직후에 발생했던 일을 위해 선구자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콘스탄틴누스황제의 보호하에 로마 제국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제국이 되었다.

기독교의 역사와 발전에 있어서의 콘스탄틴누스 황제의 역할은 위조 되었으며 잘못 제시되었으며 오해되어 왔다. 9장에서 논의된 8세기의 가짜 '콘스탄틴누스의 기증'은 후대의 작가들이 보기에 문제를 휠씬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지 지지자들'의 결정적인 승리는 때로 콘스탄틴누스의 공으로 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부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니는 그들 더 철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돌려진 보다 환상적이고 그럴 듯한 업적들 중 어떤 것을 배제해야 한다.

후대의 교회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동정적인 입장을 물려받았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처음에는 하나의 방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인들의 수효는 상당히 많았으며 콘스탄틴은 그의 왕좌를 노리는 막센티우스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도움이라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A.D. 213년 막센티우스는 '물비안다리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으며 따라서 콘스탄틴의 왕좌는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 결정적인 교전이 있기 직전에 콘스탄틴은 하늘에 걸려있는 빛나는 십자가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 환상은 후에 예언자적인 꿈에 의해 재강조되었다. 그 십자가를 가로질러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In Hoc Signo Vinces(이 징표를 사용하면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전승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러한 하늘의 징조를 쫓아 군병들의 방패에다 기독교의 상징적인 징표, 즉 Xpcotos라는 단어의 첫 머리인 Xp를 장식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몰비안다리에서의 막센티우스에 대한 콘스탄틴의 승리는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기적적인 승리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콘스탄틴이 종종「로마제국을 기독교화시켰다」고 생각되어지는데 근거하는 일반적인 기독교 전승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가 행한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정확하게 짚어보기 위해 우리는 그 증거를 보다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첫째, 콘스탄틴의 '개종--이 단어가 적절하다면 --은 결코 기독교적인 개종이 아니라 이교적인 개종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보스게스(Vosges) 또는 아우툰(Autun) 근처에 있는 이교적인 아폴로 신적의 경내에서 모종의 환상을 보았거나 신비한 경험을 했던 것처럼 보인다. 당신 콘스탄틴 군대를 따라간 어떤 목격자에 따르면 그 환상은 즉 「무적의 태양(Sol lnvictus)」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어떤 종파가 숭배하는 신인 태양신의 환상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틴이 환상을 보기 직전 솔 '인빅투스'의 의식에 참석했었다는 증거가 있다. 어쨌든 원로원은 물비안 다리의 전투 이후 콜로세움에 승리의 문을 세웠다.

이 문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승리는 「그 신의 격려 덕분」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 신은 예수는 아니었다. 그 신은 이교의 태양신인 '솔 인빅투스'였다.

전승과는 달리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인 국교로 삼지 않았다. 사실 콘스탄틴 통치하에서 로마의 국교는 이교적인 태양신 숭배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일생동안 그 태양신 숭배 의식의 제사장으로 활동했다. 실제로 그의 통치는 「태양의 제위(帝位)」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는 제국국기와 화폐를 포함한 모든 곳에 등장하였다. 콘스탄틴이 열렬한 기독교 개종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콘스탄틴 자신은 337년까지 세례조차 받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임종 직전이었으며 너무 허약하고 너무 무감각하여 세례를 거부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Xp라는 징표를 사용한 것도 그의 공로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징표를 가지고 있는 한 비문이 폼페이에 있는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틴보다 250년 전에 기원된 것이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시리아에서 기원되었으며 콘스탄틴보다 100년 전에 로마 황제들에 의해 그들의 신하들에게 숭배하도록 명령되어졌다. 그 의식에는 바알과 아스다롯 숭배의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래 단일신론적인 의식이었다. 결국 그 제의식은 태양신을 모두 다른 신들의 모든 속성들을 다 가진 총화로서 간주하였다. 이리하여 그 제의식은 아직 발달하지 않은 모든 제의식들을 포용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것은 당시 로마제국에서 역시 널리 행해지고 있었으며 태양 숭배를 내포하기도 했던 미드라스(Mithras)와도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볼 때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편리한 방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은 정치, 종교 그리고 영토에 있어서의 통일이었다. 모든 다른 제의식들을 내포하고 있는 제의식 즉 국가종교는 이러한 목적에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 위치를 확고히 한 것은 '솔 인빅투스' 제의식의 후원하에서 였다.

기독교적 정통주의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과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솔 인비투스 제의식의 묵인하에 방해를 받지 않고 번성할 수 있었다.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본래 단일신론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단일신론을 위한 길을 닦아 놓았다. 그리고 솔 인빅투스 제의식은 다른 측면들 즉 기독교의 전파를 변경시킨 동시에 용이하게 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역시 편리하였다. 예를들면 A.D. 321년에 선포된 칙령에 의하여 콘스탄틴은 「신성한 일요일」에는 법정이 쉬도롤 명령했으며 이 날을 휴일로 선포하였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유대교의 안식일 즉 토요일을 거룩한 날로 지켰었다. 그러나 그후 콘스탄틴의 칙령에 따라 기독교는 신성한 날을 일요일로 바꾸었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는 기존 정부와 조화를 이루게 됐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원에서 더 멀어지게 되기도 하였다. 더 나아가 4세기까지는 예수의 출생일이 1월 6일에 지켜져 왔었다. 그러나 솔 인빅투스에 있어서는 일년의 결정적인 날이 12월 25일이었다. 그날은 태양의 탄생(또는 재탄생)을 기념하는 나탈리스 인빅투스 축일로 낮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이 점에서도 역시 기독교는 정부와 기존의 국교와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솔 인빅투스의 제의식은 다행히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그 둘이 때로는 서로 혼동될 정도였다. 그 둘은 모두 태양의 지위를 강조했으며 일요일을 신성한 날로 지켰고 중요한 탄생 축일를 12월 25일에 거행했다. 결국 기독교도 미드라스의 제의식과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기독교는 미드라스 제의식이 영혼불멸, 미래의 심판,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보다 더 그것들을 강조했다.

통일을 위하여 콘스탄틴은 기독교, 미드라스 제의식 그리고 솔 인빅투스 사이의 차이점을 조정하고자 했다. 즉 그들 사이의 어떤 모순도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신격화된 예수를 솔인비투스의 지상적 현현으로 생각하여 묵인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교회를 세웠을 것이며 동시에 시벨레(cybele)여신의 동상과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동상도 세웠을 것이다. 솔 인빅투스는 콘스탄틴의 형상으로 그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절충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조치들 속에서 우리는 통일성에 대한 강조를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콘스탄틴에게 있어서 신앙은 정치적인 문제였다. 그리고 통일성에 도움이 되는 신앙은 어떤 것이든 인내를 가지고 처리되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틴은 후대의 전승이 묘사하고 있는 '선한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통일과 일률성이라는 명목으로 기독교적 정통주의의 입장을 견고하게 해 주었다. 예를들면 A.D. 325년에 그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에서는 부활절의 날짜가 확정되었고 주교들의 권위를 명백히 규정하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힘의 집중을 예비해 준 규칙들이 제정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는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가 아니라 신이었다는 것을 투표로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다시 콘스탄틴의 가장 중요한 생각은 경건이 아니라 통일성과 정치적 방편이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신으로서의 예수는 솔 인비투스와 쉽게 조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유한한 예언자로서의 예수는 적응시키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적 정통주의는 그 공식적인 국가종교와 정치적으로 바람직하게 혼합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콘스탄틴은 기독교적 정통주의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니케아 공의회 1년 후에 콘스탄틴은 정통주의적 가르침들에 도전하는 모든 저서를 즉 '이단적인' 기독교인들의 저서들은 물론이고 예수에 관해 언급하는 이교적 저자들의 핵도 몰수하고 소멸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또한 교회에 고정된 수입이 할당되도록 조치하기도 했으며 로마의 주교를 라테란 궁에 취임시켰다. 그후 A.D. 331년에 그는 새로운 성서 사본들을 만들도록 위탁하였으며 재정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것은 전체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들 중의 하나였으며 기독교적 정통주의 즉 '메시지 지지자들'에게 미증유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4반세기 전인 303년에는 이교적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눈에 띄는 모든 기독교 서적들을 파괴했다. 결국 기독교적 문서들, 특히 로마에 있는 기독교 문서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콘스탄틴이 이들 문서들의 새로운 판들을 위탁했을 때 정통주의의 후원자들은 그들의 자료를 그들의 교리에 따라 적절하다고 생각한 대로 개정하고 편집하고 재집필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에 있는 결정적인 변형독본들 중의 대부분은 이때에 만들어졌을 것이며, 예수가 그후 지금까지 알려져 온 대로의 독특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던 것도 이 때이다. 콘스탄틴의 위탁이 가지는 중요성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

5천 개의 현존하는 초기 신약성서 사본들 중에서 4세기 이전의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신약성서는 본질적으로 4세기의 편집자들과 작가들을 보호하는데 기득권을 가진 정통주의 지지자들 곧 '메시지 지지자들'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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