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비판은 반기독교라기 보다는, 주로 기독교의 개혁을 바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서 헛소리도 곧잘 하는 사람이니, 잘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
이 글은 도올 김용옥의 저서 『금강경강해』중
>들어가는 말>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 종교를 믿는 사람일까?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나의 어머니는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개화의 물결의 선두에 섰고 나의 아버지 역시 휘문고보 시절부터 기독교야말로 우리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라는 믿음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개화된 의사집안 광제병원 일가의 막둥이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고 장성하여서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까지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 집안은 증조부가 구한말에 종이품까지 지낸 사람이고 할아버지도 과거에 급제하고 동복군수까지 하다 일제합병을 당했으니, 아주 고지식한 전통적 사대부 가문의 유교적 풍도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분위기에 철저히 물들여져 있었다. 그것이 내가 지금 漢詩까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漢學의 소용의 밑거름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유교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四書三經 나부랑이가 머리속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내가 학문을 하겠다는 실존적 자각을 하게되고부터 나의 사유의 출발이 된 경전은 유교경전이 아닌, 도가경전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학문의 적통은 노자와 장자, 즉 노장사상이다. 나의 기철학의 출발이 노자도덕경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내가 누누이 언명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노장철학 방면에 있어서는 세계적으로 어느 누구도 범치못할 확고한 문헌실력과 학문방법을 다져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춘추제가 경전중에서 외도라 하 수 있는 한비자, 묵자, 순자, 회남자, 손자, 내경 등의 외경을 폭넓게 공부했으니, 法家, 墨家, 陰陽家라고 말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대학시절부터 이미 삭발하고 절깐에 들어가 入山修道하는 승려의 체험을 했고, 대장경이라는 방대한 서물속에서 허우적거린지도 벌써 30년을 지냈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 파문을 던지는 적지않은 서적을 썼고 여기저기 대찰에서 說法을 하는 위치에 서게되었으니 독실한 불자라 말해도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신은 기독교인이요? 불교인이요? 유교인이요? 도교인이요? 선교인이요? 천도교인이요? 원불교인이요? 역술가요? 침술가요? 명리가요? 도대체 뭐요?
도대체 내 종교가 무엇인가? 나는 과연 어떤 종교의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은 정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나와 같은 삶의 역정을 가진 사람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혼란은 쉽게 이해가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곤혹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그 사람들이 곤혹스러운 것이다.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은 그 당신이 꼭 어느 특정 종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질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간결하고 소박하게 나의 평소 견해를 여기 밝히려 한다. 이것은 바로 금강경이라는 서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나의 인생을 살어온 자그마한 실존적 원칙같은 것이래서 많은 사람에게 여실하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같은 공기를 들여마시고 사는 한 사람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
문이다. 요즈음같이 자유로운 "민주세상"에 한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는 그 여실한 모습이야, 범법을 하지 않는 이상, 어찌 해볼 도리도 없는 것이 아닌가!
제1명제 :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생각해 보자! 여기 어떤 사람이 눈사람이 땡볕아래서 절대 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 믿음이 그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확고한 것이었다 한들, 눈사람을 땡볕에 놓고 보니 녹더라는 현상의 분석보다 구극적으로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에게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다 하더래도,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결국 눈사람이 땡볕 더위속에서 녹는다는 사실은 매우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믿음들이 더 강렬한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믿지 않아도, 세밀하게 깊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냥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부활했다)는 것을 믿어야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사람이 그냥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선생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해보자!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얼마나 훌륭한 말씀인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이 온전하게 알 때에는 폐하리라 한 것은 부분적으로 아는 것에서 전체적으로 아는 것으로 확대되어 갈 때에, 이런 지식의 확대만으로도 훌륭한 깨달음, 훌륭한 종교가 성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말씀이다.
孟子는 이것을 " 而充之"라 하지 않았는가? 여기 "거울" 얘기가 나오는데, 희랍시대의 거울이란, 박물관에 진열된 우리 옛날 거울도 마찬가지였지만, 요새와 같은 유리거울이 아니었고, 동판거울(銅鏡)이었던 것이다. 쑤세미에 돌가루를 민대어 닦아 놓은 동판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면 항상 희미하고 뿌열 것이다. 이런 비유는 실상 고린도라는 희랍의 도시에서 동판거울이 많이 생산되었었기 때문에 생겨난 비유였다. 그 뿌연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과도 같은 희미한 인식에서 얼굴과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과도 같은 맑은 인식으로 우리의 앎이 확대되고 깊어지는 현상을 사도바울선생께서는 "사랑"이라 표현했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때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괴팍한 남편(아내)도 전체적으로 알고 이해할 때에 비로소 참으로 사랑을 하게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가? 사는가? 꼭 죽을 것인가? 죽었다가도 살아 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모든 질문이 결국 부분적 앎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이러한 부분적 앎이 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러한 아이더 오아(either-or, 이것 아니면 저것)의 질문이 다 폐하게 되는 것이다. 왜 꼭 종교가 신앙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단순한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지식의 온전한 확대에서 오는 깨달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의 고정된 믿음체계난 교리체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것만이 종교라고 생각하는가? 나 도올은 말한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제2명제 :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가 있다.
이 두 번째 명제는 실상 상식적인 경우, 제1명제속에서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대개 상식적으로 神을 말하는 경우, 神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神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神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 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
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 대립이라고 하는 서양 중세철학의 쾌쾌묵은 전형적 개념의 짝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꼭 믿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버리고 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神의 존재가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일 필요가 하나도 없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神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털보아저씨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나는 구차스럽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는 나는 그러한 질문에 방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예비하고 있지만,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口業은 여기서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토끼뿔이 몇 그램이냐?"하고 누가 대짜고짜 물을 때, 토끼뿔의 중량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하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있지 않은 것에 대하여 그 존재의 가능태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 때문에 그 존재의 속성에 관하여 논의를 한다는 것은, 때로 재미가 있거나 유의미할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을 뿐아니라 결말이 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가다가 길거리에서 한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대짜고짜 "요즘 마누라 안 때리냐?"(Did you stop beating your wife?)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침 내가 평소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대답이 가능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내가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응", "아니"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제(presupposition)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이러한 문화적 전제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언어께임속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를 근원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나나냐? 둘이
냐?"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당신은 요즈음도 부인을 때리십니까?" "술 끊으셨습니까?"와 동일한 류의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神은"이라는 主部속에는 이미 "神의 存在性"이 포함되어 있음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神은"이라는 말은 이미 神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무의미한 토톨로기가 되어버릴 뿐이다. "까만 새는 까만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소소한 끝도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단지 神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
神이라는 말을 하는 話者의 의미체계에 있어서 규정되고 있는 수많은 숨은 述部的 전제를 확실히 드러내지 않는한, 그 어떠한 논의도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잇어서 神이 "사랑"이었다면 이것은 곧 "사랑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神이 "전지전능한 아저씨"였다면, 그 질문은 "전지전능한 아저씨는 존재하는가?"가 될 것이다. "神은 존재하는가?"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神이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이었다면, 그 질문은 곧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은 존재하는가?"라는 명제로 환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어의 술부적 속성이 기술될 때만이 그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곧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가 연재됩니다.
출처:http://my.dreamwiz.com/mss107/frame.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