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

도올의 비판은 반기독교라기 보다는, 주로 기독교의 개혁을 바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서 헛소리도 곧잘 하는 사람이니, 잘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

엑스 0 8,857 2002.06.15 16:04
[발췌글]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2)

그런데 일반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런 엄밀한 철학적 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냥 "하나님", "하느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무엇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어떻게 믿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은 어떤 전지전능한 유일한 절대자, 우주의 시공속의 모든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절대자라는 어떤 막연한 "초월신=유일신"는 생각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절대자가 있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존재)과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도대체 어떠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떠한 근거위에서 그 필연성이 도출되는 것일까?

그런데 믿음의 대상으로서 神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고집한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神이 存在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신만이 우주 전체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 참 그것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나,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他존재를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他존재를 배제하는 유일무이한 存在라는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存在하는 모든 것이 될 수밖
에 없다. 보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전체 그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우주밖에 있다면 그 존재는 또다시 한정되는 一者가 될 수밖에 없음으로, 他存在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유일신임을 자처하는 모든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한정된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뜻은 저기 있는 저 나무나 의자처럼 "실체로서 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신이란 우주밖에 있거나 우주내에 있는 어떤 물체인가?

흔히 유일신이라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경배하는 存在의 대표적 예로서 우리는 야훼, 혹은 여호와 하나님, 혹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에 거슬렸다간 뼈도 못추리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유일무이한 神이 아니라 他神이 存在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백성에게 내리신 그 유명한 십계명(Ten Commandments)의 첫계명은 무엇이었든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공동번역 출애굽기 20:3)

You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RSV)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것은 그 말을 하는 당신 자신이 다른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직접 말에 의하면, 여
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딴 신들은 섬기지 말고, 나만을 섬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언명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유일신이라고 믿는 여호와 하나님 당신 자신이야말로 다신론자이신 것이다. "유일신"이라고 할 때 유일(only)의 실제 의미는 "유일하게 받드는," "유일한 방식으로 모시는," "유일한 것처럼 섬기는"이라고 하는 부사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야훼 자신이 유일者임을 자처하는 한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多者性인 것이다. 唯一은 頗多를 전제로 한다. 一은 곧 多다. 一은 곧 多의 전제없이 성립할 수가 없는 名言에 불과한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앱굽기 34:14).

야훼는 바로 다른 신들을 진투하는 많은 신들 중의 一者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신관을 자랑하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조차 "유일신"관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신 구약선경이 모두 雜神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한 위에서 성립한 유일신을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내말은 아무리 위대한 성서신학자라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대한 거역일 뿐이다. 유일신관은 곧 성서를 부정하는 불경이다. 우리가 神을 存在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神이 存在者인 한 그것은 많은 存在중의 一者일 수밖에 없다. 야훼래야 그것은 역사적으로 雜神을 물리친 萬神일 뿐이다. 이러한 야훼의 유일신화는 유
대민족사에 있어서 다윗왕조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과, "잡신의 통일"의 일치현상은 모두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현상인 것이다. 정치권력의 통일과 신적 권력의 통일은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神 중심으로 종교를 논할 수 있을까? 그 많은 神의 역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많은 유일신들을 어떻게 다 취급할 것인가? 부뚜막에는 조왕신(부뚜막신)이 있고, 툇마루에는 성주대감이 있고, 장독대에는 항아리신이 있고, 돼지우리에는 돈신이 있다. 인간의 이름보다도 더 많을 신들을 따라 종교를 논한다면 과연 종교가 논구될 수 있을 것인가? 신의 족보를 따질려해도 그것은 최소한 우리민족의 大同譜를 따지는 것보다 더 복잡할 것이니 과연 어느 장단에 그 유일성을 맞출 것이며, 어느 이름에 그 기준을 짤 것인가?

나는 말한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이 진정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神의 學"(신에 관한 배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神學이 만약 神의 學이라면 그것은 신의 족보학(the Genealogies of Gods), 신의 전기학(the Biographies of Gods)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 모든 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現今의 수준이, 아무리 정교한 레토릭을 가장해도, 세계적으로 족보학 전기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종교는 철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문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예술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과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종교가 신학이어야만 하는가?

종교를 신학이라고 생각하는 옹졸한 자들은 모두 기독교나 그 유사한 아류의 초월신관을 기준으로 삼아 그런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세계 종교사에 있어서, 종교학에 있어서, 그러한 편협한 규정은 불교의 엄존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교는 분명 이 지구의 엄청난 인구가 신앙으로 삼고 있는 고등종교다. 그것은 종교로서 현실적으로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는 神이 없다. 불교는 神을 믿지 않는다. 불교에는 神이라는 초월적 존재자가 없는 것이다. 단언하건데 불교는 무신론인 것이다. 무신론이
어떻게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여기 우리는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테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무신론"아른 "신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없다"라
는 말은 "신은 있는데 없다"가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데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불교는 세속적 의미에서 무신론이라 말할 수
는 없는 것이다.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불교를 굳이 무신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神이 존재와 비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언어영역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맥락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神의 실체성 즉 존재성이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으로 역시 무신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닌 것이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심리학이 될 수도 있는 것이요, 철학적 성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종교적 주제와 만나게 된다. 어찌 신학만을 종교의 유일한 통로라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신만을 종교의 유일한 주제라 말할 수 있으랴!

제3명제 :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절깐에 다니면 부처를 믿는다 하고, 나처럼 일요일날 교회도 아니가고 절에도 아니가면 예수도 안믿고, 부처도 안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교회나 절깐에 가는 것을 예수믿고 부처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장가면서 영화 믿는다고 하고, 식당가면서 음식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나의 삶의 구원이요, 영화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영화에 대한
특수한 믿음과 그의 극장가는 행위가 전적으로 일치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 일이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 개인 홀로만의 행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으로서 행위를 전젤 한다. 대강 인간의 제도라는 것은 인간집단의 어떤 기능의 유지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원래 인간 개인의 내면의 요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나의 내면의 구원이라든가 평온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고통의 벗어남이라든가 하는 매우 私的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종교의 기능이 사회적 집단을 통한 대중적 행위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부
인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원숭이나 고릴라도 꼭 떼지어 같이 살고, 나도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종자인 것 같다. 그러니 종교생활이라는 것도 자연히 군집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人之常情 같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제형태속에 내재하며, 그러한 사회적 형태으 존속을 위하여 필요하게 되는 제요소, 예를 들면, 건물, 조직, 규약, 경제 등등의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이다. 따라서 종교를 생각할 때 종교적 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 불교를 생각할 때 절깐을 부인할 수 없고, 기독교를 생각할 때 교회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가 제도와 공존하고, 종교가 제도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곧 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동아시아역사에 있어서 희한한 인물이 한명 있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의 크메르혁명을 주도한 폴 토트(Pol Pot)라는 인물이다. 폴 포트라고 하면 흔히
"킬링필드"를 생각하고, 대규모의 인민학살과 잔혹하고 끔찍한 혁명극을 연상케 된다. 따라서 폴 포트하면 매우 냉혹하고 잔악하게 생긴 혁명가의 얼굴
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폴 포트라는 인물은 개인적으로 만나본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매우 인자하고 조용하고 온화하고 과묵하고 설득력있는 인물이
라는 것이다. 성장배경도 아주 유복한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불란서유학을 했고 사상적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지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1975년 4월에 국문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정권을 장악하여 1979년 1월에 다시 월남군에 의하여 축출될 때까지, 자그만치 150만명 이상의 자국민이 살상되었으며 20만명 이상이 공식처형된 인류사에서 그 유래를 보기 힘든 피의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그의 오류는 바로 이 인간세의 제도의 부정에 있었던 것이다. 老子 80장에 보면 "小國寡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곳에 "이웃 나라간에 닭소리 개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함이 없다"라는 매우 목가적인 표현이 있는데, 아마도 폴 포트야말로 老子가 80장에서 설파한 "소국과민"의 농업주의적 평등사회(agrarian egalitarianism)를 극단적으로 실현하려했던 과격한 이상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시를 철폐해버렸다. 화폐를 없애버리고, 시장을 없애버리고, 학교를 없애버리고, 신문을 없애버리고, 종교를 없애버리고, 모든 사유재산을 없애버렸다. 그의 사고는 극단적인 반문명론적 해탈주의였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을
순박하고 무지한 원시적 농경사회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만이, 가장 원천적으로, 구조적으로 서양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벗어나고 오염되지 않은 정결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판단이 원칙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원칙의 급격한 실현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원초적인 요구를 위배한 것이다. 도시문명이라는 제도 그 자체가 인간이 수천년을 걸쳐 구축해온 자연스러운 業이었다. 그 業의 부정이 폴 포트 자신의 해탈을 이루었을지는 몰라도, 수많은 국민을 기아와 질병과 공포의 아수라속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종교는 분명 제도속에 있다. 그리고 제도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그러나 제도가 요청된다고 제도가 곧 종교는 아니다. 제도는 종교를 질식시킨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종교의 방편일 뿐이다. 내가 절깐에 앉아있다고 곧 불교인일 수는 없으며, 내가 교회에 앉아있다고 곧 기독교인일 수는 없다.
제도가 곧 그 종교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기실 모든 종교의 역사는 제도와 반제도의 투쟁의 역사였던 것이다. 미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기존의 카톨릭 제도와 투쟁하는 샐운 반제도적 성령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주의의 승리는 또 새로운 제도로 고착된다. 그러면 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제도를 부정하는 새로운 성령주의가 탄생케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제도와 반제도의 변증법은 모든 종교사에 공통으로 구가되는 리듬이다.

마지막으로 도올의 종교에 대한 견해(3)이 연재됩니다.
출처http://my.dreamwiz.com/mss107/fram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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