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비판은 반기독교라기 보다는, 주로 기독교의 개혁을 바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서 헛소리도 곧잘 하는 사람이니, 잘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
[발췌글]여자란 무엇인가(3)
그리고 하늘과 땅 자체가 여성성과 남성성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인간은 바로 이러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체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天地之德, 陰陽之交, 鬼神之會"라는 원문에 있어서 地-陰-鬼와 天-陽-神은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자든 남자든 불문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하늘성과 땅성, 양성과 음성, 신성과 귀성의 교회(交會)로 이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인간의 이해는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여자와 남자의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또 대부분의 중국 고문헌이 이런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나의 이런 원리적 설명이 동양사회 남녀관계의 현실적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경제사적 시각으로 남녀의 문제를 규명해 들어가면 그 현실적 양태는 동서에 별 차이가 없다. 부권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와 동동한 위치를 향유한 역사는 인류사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최소한 그런 제도사의 사회경제사적 분석에 앞서서 그들이 이상으로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 체계가 너무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일단 지적해 놓고 그 현실적 모순을 더 깊게 천착해 들어가려는 나의 작전 계획을 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여 부연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철학적 사실은 창세기의 신화나 예운의 설명 방식이 그 연원에 있어서는 거의 동시대에 성립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인간 창조를 설명하는 어떤 원리적 틀이 결여된 단순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하여 예운의 인간 형성이 설명 방식을 음양오행이라는 매우 과학적이고 원리적인 설명원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자! 그럼 여자 女子라고 할 때의 女라는 글자의 원형을 추적해 보자.
한자는 상형문자에서 출발했지만 대부분은 상형문자가 아니다. 상형은 사물의 형체라는 공간성을 주로 나타내고 또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 그 공간적 물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 때문에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인간의 관념이나 시간적 개념들, 그리고 공간적 물체와 관계없이 순수한 의미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개념들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제약이 뒤따른다. 그래서 생겨난 문자가 희의자(會意字)와 형성자(形聲字)이다.
회의자란 상형자에서 성립하고 있는 뜻과 뜻을 모아서 만든 뜻글자이고 형성자란 형체를 본뜬 상형자의 문자성분과 순수하게 그 뜻과 관계없이 소리만을 나타내는 문자 성분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소리글자이다. 한자의 발전은 이런 문자학의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단계적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형 -> 회의 ->형성의 순서로 발전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한자의 90%가 형성자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러므로 한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상형문자가 아니다. 그러나 상형문자의 뜻을 일반적으로 넓게 쓰는 용법으로 규정하여 한자를 상형문자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여(女)나 남(男)이라는 글자는 중국문자학사상 최고층에 속하는 갑골문자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여(女)년 상형자이고 남(男)은 회의자라는 사실은 男보다는 女가 앞선다는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女라는 글자는 여성의 어떤 특징적인 모습을 그린 상형자이다. 그러므로 女는 매우 원초적인 시기에 이미 형성된 글자이며 그러나 男이라는 글자는 田자와 力자의 합자이다. 力이란 밭을 가는 농구구인 보습의 상형이며 田+力의 합자는 힘써 밭을 가는 장부의 모습이라고 <설문>은 말하고 있다.
즉 男은 단순한 상형자가 아니라 田이라는 상형자와 力이라는 상형자가 형성된 후에 그 상형자가 의미하는 뜻을 모아 만든 글자이므로 결코 원초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사유가 고도화된 이후의 개념을 나타내며, 사회경제사적 분석시간을 빌리면 농경문화의 성숙 이후의 개념이다. 그리고 男이라는 글자의 용례를 보면 그것이 단순히 농지 경작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농지의 관리자를 뜻하는 것으로 이미 사회계급이 분화된 이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女라는 글자는 매우 원초적이고 안정성이 있으며 포괄작인 글자이다. 우리는 보통 옥편으로 글자를 찾을 때 글자를 분류한 부수 즉 변으로 찾는데 계집녀 변은 있지만 사내남 변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중국문자에서 계집은 사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주체적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 주기 바란다.
女는 <설문해자>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순수한 상형자이다. 갑골문에 나타난 모습을 보면 사계의 권위자인 시라카와씨는 이를 "여자가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의 설명이 부지불식간에 현대적인 여성관념에 사로잡혀 전체적 측면을 보지 못한 설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굴종적인 개념밖에는 이 해설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우선 <설문>에서 "女, 婦人也, 象形" (女는 부인을 말한다. 상형자이다)라고 짧게 설해를 붙인 사실에 주목한다. 즉 女가 추상적인 여성의 전체를 나타내고 있는 개념임에는 틀림없지만, 여기서 말하는 여성은 처녀를 제외한 부인이라는 개념으로 <설문>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내가 주목한 사실은 우리가 엄마의 의미로 쓰고 있는 어미 모(母)자의 갑골문 고형이 바로 계집 女자와 동일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갑골문에서 母자는 계집 女의 유방 두 개만 첨가되었을 뿐 글자의 모습이 동일하다.
<설문>에는 이 母자를 설해하여 "아기를 가슴에 품고 젖을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라고 하고 있는데 그 아기의 모습이 갑골문이나 금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즉 쉬선의 추측은 부정확한 것이다. 갑골문에 있어서 母와 女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쓰이며 금문(金文)에는 여자의 이름을 母자를 써서 만든 경우가 많으니 可母 魚母와 같은 예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女가 부인을 뜻하는 것과 또 女가 母와 동자(同字)라는 사실 그리고 여자를 나타내는 母자에 젖통(젖통은 유방의 순수 우리말임)이 강조되었다는 사실, 이 모든 사실은 일맥상통하는 연관체인 것으로 보인다.
女가 상형이라면 과연 어떠한 모습을 본 뜬 것일까?
나는 인디안의 풍습을 그린 영화를 볼 때마다 유의하여 관찰한 여자의 모습이 있다. 인디안 여자가 아기를 낳는 모습이다. 인디안 여자는 아기가 밑으로 나올 때가 되면 땅 위에 꿇어앉아 양 무릎 가랑이 사이의 흙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똥을 누듯이 아기가 나오면 양손으로 받아낸다.
터키의 중부에 있는 카탈 휘이크 지방에서 출토된 진흙으로 만든 여신의 형상도 마찬가지였다. 이 출토품은 BC 6,500년에서 5,700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인류사에서 최초의 해산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아즈텍 문명에서 출토된 여신 틀라졸테오틀의 해산 모습도 역시 동일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그 가랑이에서 애기가 나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해산 모습이 고대 인류사에서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고대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집단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이다. 곡식이 많이 생산되어야 입에 풀칠을 할 수 있고 자식이 많이 생산되어야 그 집단이 부강해질 수 있다.
생산, 그것은 그 집단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며 고대사회에서는 그 생산을 가능케 하는 힘을 찬미하고 숭배하는 종교가 생겨나고, 그에 따라 의식이 발달한다. 이를 인류학에서는 퍼틸리티 컬트(fertility cult) 즉 생산 숭배라고 부른다.
우리가 보통 아기를 낳는 것을 "생산하신다"라고 하는 용법도 이러한 생산 숭배에서 그 근원이 찾아지는 것이다. 생산숭배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며, 그러한 고대의 인간 중심적 사회에 있어서는 그러한 생산성의 상징으로 여성의 성기, 즉 보지에 대한 숭배가 의식화하게 된다.
앞서 인용한 여신들의 형상이 해산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 숭배의 종교적 의식에 그 출토품이 쓰였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 생산성은 여성을 특징 지우는 생물학적 사실로 이 생산성 때문에 여성은 고귀해지기도 하고 비천해지기도 하는, 그야말로 여성이라는 존재에서 떼어 내버릴 수 없는 하나의 운명인 것이다.
다음에 우리가 규명해야 할 것은 女子라고 할 때의 子의 의미이다. 우리는 子 하면 아들을 말하면 그것이 남성을 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나라의 천편일률적 천자문의 훈의 해독에 불과하다.
子라는 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글자이다. 女子라는 말에서 子를 아들로만 훈을 단다면 계집아들이 될 것이니 이는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說文解字注>에 나온 여자의 해설을 들어보자
"여자라고 말하는 것은 남자와 짝을 지어서 대칭으로 말하는 것이다. 子라는 것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모두 부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또한 여자의 자는 그 부모에 매여 말한 것이니 자식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해설은 후대의 용법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며 우리가 흔히 쓰는 여자라는 말은 고어에는 없는 용법이다. 한문이란 기본적으로 단음절 언어이기 때문에 女면 女고 子면 子이지 女子라는 복음절 단어는 후대에 형성된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子라는 말에는 반드시 성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즉 <詩經>의 용법상으로 子는 남자, 여자에게 구분 없이 다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자의 용법을 아들 자로만 규정 짓는 오류는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왜 분명히 르언(人)은 남과 여라는 상대적이면서도 동등한(논리적으로) 두 개념의 교합체로 이해되고 있는 데 반하여 왜 맨(사람)은 맨(남자)라는 즉자적(卽自的) 절대성에 의하여만 규정되고 있는가? 왜 여자는 그것 자체로 하나의 즉자가 될 수 없고 즉자에 대한 타자(他者)로서만 이해되는가? 왜 남과 여는 동등한 대자(對自)가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왜 우맨은 맨에 대한 우로서만, 저급하고 비본질적이며 우연적인 위치밖에 차지할 수 없는가?
즉자에 대한 타자가 성립한다면 바로 동일한 논리에 의하여 그 타자는 즉자가 되고 그 즉자는 다시 타자화해버릴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항상 즉자와 타자간의 충돌이 생겨나고 이러한 충돌을 막기 위하여 소위 상대성이라는 개념이 인간의 마음에 자리잡게 된다.
여태까지 어려웠던 논의를 매우 쉬운 말로 풀면 다음과 같다.
"맨(man)에 있어서 보지는 자지의 결여태이다. 그런데 르언(人)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이란 존재는 아담에게서 이미 완성되었다. 그래서 아담(남자=사람=진흙)인 남자는 자기라는 즉자(the one)를 대자가 필요 없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완전한 존재의 모습은 두 다리 가랑이 사이에 대포 받침의 두 바퀴와 같은 불알이 딱 버티고 있고 그 불알 위에 대포 같은 작대기가 우뚝 솟아 있다. 그 우뚝 솟은 작대기의 형상이 소위 자지라는 것인데, 이 위대한 자지, 가끔 수시로 울끈불끈 빳빳해지는 이 자지의 형상이야말로 야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며, 신과 통하는 초월(transcendence)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