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비판은 반기독교라기 보다는, 주로 기독교의 개혁을 바라는 비판이 많습니다. 자아도취감에 빠져서 헛소리도 곧잘 하는 사람이니, 잘 걸러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
도올의 비판-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하느님개념
하늘은 항상 무제한적이며 광막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이는 하늘은 어디서 보든지 그 모습이 같다. 서울에서 보는 땅과 목포에서 보는 땅과 부산에서 보는 땅은 모든 다른 땅들(many)이지만, 하늘은 서울에서 보든지 목포에서 보든지 부산에서 보든지 다 동일한 것(one)이다. 결국 이렇게 본다면 하늘은 일(一)을 상징하고 땅은 다(多)를 상징한다. 하늘은 추상성·보편성·절대성의 상징이고 땅은 구체성·국부성·상대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하늘의 숭배는 유일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데(universalization) 반하여, 땅의 숭배는 그 숭배가 이루어지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국부화될(localization) 수밖에 없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이스라엘민족에게 있어서는 땅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항상 이동을 하기 때문에 정착된 땅에 자기들의 존재의 근원을 삼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막에 있어서는 이동을 할 때에도 여행의 기준이 되는 것은 하늘이지 땅이 아니다.
유목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들 삶의 양식을 제공하고 있는 자연대상은 동물(양떼)이고,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대상은 주로 식물(벼·보리·감자·채소 등)이 된다. 유목의 대상이 되는 양떼는 항상 일정한 곳에 있지 않으며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牧者, shepherd)의 명령이다. 경험있고 현명한 한 사람에게의 다수의 무조건의 복종이 그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가장 에라가 적은 것으로 요청된다. 이러한 심리를 소위 명령심리(command-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러한 심리는 유목과 유사한 이동집단에서도 공통된 것이다. 산악등반대의 캡틴이나 배의 선장에게도 무조건적인 복종이 요구된다. 매우 비민주적이고 종적인 상하굴종관계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캡틴이 실수하면 최악의 경우 다같이 죽게되는 한이 있더라도 에라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야훼하나님이나 주예수는 이러한 유목민족의 매우 비민주적 명령심리를 투사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목사(paster)라는 말자체가 "양떼지기"라는 뜻이다. 영어의 패스터(paster)는 원래 "초원에서 먹이는 자"란 어원을 갖고 있다. 목사(牧師)의 師는 스승사 자가 아니다. 師는 지금 우리가 군대용어로 사단(師團)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문의 원뜻은 군대의 단위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경민족의 농부와 식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심리는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식물은 자기가 뿌리박고 있는 땅의 自然(스스로 그러함)의 논리에 의하여 성장할 뿐이며, 간섭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휘모는 논리를 거부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농경민족은 항상 늑대나 이리, 그리고 가뭄의 사망의 골짜기에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민족의 행태와는 다른 행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처럼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부정의 논리(logic of negation)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욱 발달되어 있는 것은 화해의 논리이며 공존의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적""원수""죄악""사망" 등의 『성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러한 극렬한 어휘가 우리 고전(古典)에는 매우 적다. 농사를 짓는 지혜는 대부분의 농부들이 골고루 가지고 있는 것이며 한명의 장로(長老)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수의 민주적 협동이며, 지혜로운 한사람에게로의 다수의 복속이 아니다.
목동은 양떼를 간섭하고 명령하고 인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시로 이리떼들로부터 막아야 하고 항상 그들이 길잃은 양이 되지 않도록 염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농부와 식물의 관계는 정확하게 그 반대이다. 인위적으로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되고 간섭하지 말아야 되고 인도하지 말아야 한다. 식물이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기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 줄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에게 있어서는 양떼도 없고 따라서 양떼를 지켜주는 목자도 필요없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는 결코 인류문명사에서 보편성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둘이 있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제1계명은 이미 야훼자신이 자기의 유일성(하나인 님)을 거부하고 있다. 즉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이미 존재론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유일성이란 남을 윽박지르고 후두려 패는 배타성일 뿐이다. 우리 농경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이와같이, 노경이 간신히 얻은 아들 하나를 태워 죽여 피를 보기까지 해서 그 복종을 시험하고 강요하는(아브라함-이삭의 경우) 그러한 야훼하나님, 사랑하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벌을 주고 공갈하고 협박하는("협박의 하나님"[God of intimidation]은 내 말이 아닌 신학용어임) 그러한 하나님은, 마피아의 두목보다도 더 무서운 깡패새끼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깡패하나님"은 이스라엘인에게 너무도 정답고 친숙하고 또 든든하게 느껴지는, 즉 그들의 몸에 배어있는 유목기질(nomadic temperament)에 너무도 적합한 신앙대상이 될 수 있지만, 우리 고요한 새벽의 나라 조선에 조용히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이질적인 것이다.
-- 김용옥<여자란 무엇인가?> 중에서 *출처 http://xbible.com.ne.kr/